책을 읽고 독후감을 쓰는 이유는 한 권의 책을 모두 읽었다는 데 만족하지 않고 읽은 내용을 정리하면서 내 것으로 소화하는 과정입니다. 저자가 어떤 사람이고 어떤 시대적 상황에서 글을 썼는지 배경을 이해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리고 정리하면서 독자로서 자신이 이해하고 소화했던 결과물을 글로 풀어내는 과정입니다.
에라스무스의 책 <우신예찬>은 고등학교 시절 유명한 책이라고 해서 르네상스 시대의 저자와 함께 연결해서 암기했던 기억이 납니다. 아쉬운 점입니다. 한창 지적 호기심을 자극받아서 읽고 토론하며 세계적인 명저를 이해할 수 있었던 고교시절을 대학입시라는 시험을 위한 문제풀이 중심으로 보내버린 것입니다.
꽤 시간이 지난 시점에 100페이지도 되지 않는 짧은 영어 원서로 된 <우신예찬 In Praise of Folly>를 읽었습니다. '15년 5월에 처음으로 읽었을 때 기록해 둔 것을 보니 '무슨 내용인지 이해하기 어려워서 번역서를 읽어봐야겠다'라고 적혀있습니다. 이번에 두 번째 도전했는데 번역본을 보지 않고 5년의 세월은 이해하는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더 어렵게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유튜브에서 에라스무스의 <우신예찬>에 대한 강의를 듣고서야 조금은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에라스무스는 당시 유럽에서 최고의 지성을 대표하는 지식인이라고 합니다. <우신예찬>은 1511년에 출판되어서 2020년 현재 509년이 되었습니다. 이 책을 번역한 것이 1927년이었고 일본어판을 기준으로 했지만 일본어판이 어려운 부분을 제외하고 번역한 것이다 보니 한글판도 불완전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1975년에 처음으로 불어판을 기준으로 한 번역본이 나왔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불어판을 경우는 <우신예찬>에서 프랑스에 대한 비판적인 내용은 빠져있다고 합니다.
역사적인 배경을 보자면, 기원전 5세기경 그리스 시대부터 로마 시대인 기원전 1세기 전후에 희랍어와 라틴어로 쓰인 자료들을 찾고 재해석하는 고전 라틴어 부활의 시기가 15, 16세기였습니다. 즉, 르네상스 시대입니다. 재해석한 것이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 인쇄술을 이용해서 책자로 만들어져 널리 배포되고 읽혔습니다. <우신예찬>은 유럽에서 성경 다음으로 많이 팔린 책이었다고 합니다. 재미있는 것은 사람들이 읽기 위해서라기 보다는 읽은 척하기 위함이었다고 합니다.
에라스무스는 라틴어 성경 불가타 본의 번역 오류를 바로 잡아서 편집한 것을 1516년에 바젤에서 출판했습니다. 당연히 종교계에서는 불쾌하게 여겼을 것입니다. <우신예찬> 자체를 1524년에는 성경을 비판했다는 이유로 금서로 선언했고, 심지어는 1529년에 불어 번역자를 이단으로 취급해서 화형에까지 처했다고 합니다. 오류를 바로잡고 다양한 언어로 번역해서 배포하는 것은 장려해야 할 사항일 텐데 그런 시대적 상황이었습니다.
에라스무스는 토마스 모어가 지은 <유토피아>란 글을 보며 '모어가 어리석게도 유토피아를 보여주었으니 얼마나 훌륭하냐'라고 하며 그리스어로 책 제목을 '유토피아'라고 붙여주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유토피아'는 어리석은 듯 보이지만 현명한 사회를 의미하고, '우신예찬'은 현명한 듯 보이지만 어리석은 세상을 보여주는 책이라고 합니다.
기원전 1세기 로마 공화정 시대의 시인이었던 호라티우스가 풍자시를 지었고, 웃음으로 진실을 이야기한다는 풍자문학을 에라스무스가 <우신예찬>으로 다시 보여주었습니다. 풍자문학은 실명으로 비판하는 것을 피했고 가능하면 철학적으로 도덕적 훈계를 하려고 했습니다. 아마도 직접적인 비판으로 통해 피해받는 것을 최대한 회피하기 위함으로 생각됩니다.
이 책 <우신예찬>의 주요 내용은 아래와 같습니다.
고대 교육방법 중의 하나인 연설문의 형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바보신 즉 '우신'은 자신의 어리석음을 칭송하며 자화자찬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인간은 본성적으로 어리석음을 타고났으며 교황 등 지배계층의 어리석음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부유의 신인 아버지와 청춘의 신인 어머니 사이에서 어리석은 방법으로 어리석게 태어났다고 합니다. 그리고 우신의 시종은 악덕과 관련된 것들입니다.
첫째는 결혼과 출산에 대해 언급합니다. 결혼생활의 불편함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왜 결혼하는가에 대해 우신의 시종 '경솔' 때문이라고 합니다. 당시에는 출산이 생명을 건 위험천만한 노고가 필요하고 양육도 번거로운 일임에도 왜 사람들은 아이를 낳을까. 아이를 잘 키우기 위해서 수고하고 열심히 수고해도 아이가 잘 될지 알지 못함에도 우신의 시종인 '망각' 때문에 아이를 다시 낳는다고 합니다.
둘째는 사람의 인생을 유년, 청년, 장년, 노년기로 구분합니다. 그리고 유년기와 노년기, 이 두 시기가 가장 행복하다고 합니다. 유년기는 어리기 때문에 그리고 노년기는 다 잊어버리기 때문에 행복합니다.
셋째는 호메로스의 책 <일리아스>에 나오는 아킬레우스는 명예를 남기기 위해 전쟁터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전쟁은 어리석음이 이끄는 것입니다. 전쟁은 몸집이 크고, 살집이 단단하고 과감하면서 생각이 없는 사람의 일이라고 합니다.
넷째는 학자들은 대중이 좋아하는 헛소리를 지껄이며, 생각 없이 아무렇게나 글을 쓰고, 남의 글을 함부로 베끼는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시대가 500년이 넘은 현재도 에라스무스의 비난은 그대로 적용할 수 있습니다.
에라스무스는 진짜 학자의 고된 삶에 대해서도 언급합니다. 덧대고 바꾸고 치우고, 한 없이 글을 고치며 보상은 받지 못하고, 소수의 칭찬과 보상을 받을 뿐이며 연구하고 밤 새우며 달콤한 잠을 포기하고 연구를 하는 동안 청춘을 사라지고 눈은 흐려지고 노년은 일찍 찾아와 요절한다고 합니다. 진짜 학자가 이렇게 살아야 한다면 학자가 되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을지 걱정됩니다.
당시의 군주들에게 하고 싶은 말을 적었습니다. 아첨에 귀를 기울이고, 열심히 사냥하고 명마를 사육하고, 행정과 군인 요직을 판매하고, 불공정한 일을 공정하게 포장하고, 공공의 이익에 반하는 개인적은 유익만을 추구하고, 쾌락에 흠뻑 젖어 학문과 자유와 진리를 혐오하고, 국가의 안녕은 생각하지 않고 오로지 자신의 욕망에 따라서 측량하는 인간이라고 비판합니다.
또한 교황에 대해서는 흡사 무대 의상을 걸치고 예배를 거행하고, 토지와 도시, 세금, 통행료와 권력을 누리며, 장사치의 법률로 그리스도를 결박하며, 억지 해석으로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왜곡하며, 역병 같은 삶으로 그리스도를 살해하고 있다고 합니다. 교황들은 칼을 뽑아 형제의 복부를 찌르는 것을 그리스도의 크나큰 사랑이라고 가르칩니다. 또한 11세기부터 15세기까지 이어진 십자군 전쟁에 대해 이 전쟁을 확대하려는 황제들과 이를 통해 기회를 잡으려는 사제들을 비판하고 있습니다.
<우신예찬>이란 책을 읽기 전에 15, 16세기 역사에 대해 잘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겠습니다. 역사적인 배경지식이 없이 이 책을 읽는다면 상당히 어렵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이 책을 통해 르네상스 시대의 유럽의 모습을 알아가는 시간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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