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리카 케냐 출신의 탈식민주의 작가인 응구기 와 티옹오(Ngugi wa Thiong'o)의 <십자가 위의 악마 Devel on the Cross>는 케냐를 포함한 아프리카 여러 국가들이 서구의 식민지에서 독립한 후에도 신식민지 제국주의의 영향 하에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영국의 식민지배를 받았던 케냐에서 태어난 저자는 영국식 이름을 가지고 영어를 모국어처럼 배우고 유학까지 다녀왔습니다. 영국인 제국주의자들이 사용하는 영어는 우수하고 케냐의 기쿠유어는 열등한 것처럼 간주됩니다. 영어를 잘하면 기회를 얻을 수 있지만 기쿠유어만 가지고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영국 식민주의자들과 결탁해서 형성된 매판자본과 관련자들은 케냐 민중들의 피와 땀을 갈취하면서 부를 향유합니다.
우리 민족도 일본의 식민지배를 받았던 경험이 있기에 공감이 갔습니다. 일제시대에도 민족의 얼과 문화를 말살하기 위해 한글 사용을 금지하고 창씨개명까지 강요했습니다. 한 나라의 언어를 사용하지 못한다는 것은 언어로 이루어진 다양한 문화가 사라지는 것입니다.
더구나 일어를 더 우대한다면 민중들은 호구지책을 위해 세대를 거듭할수록 자국언어를 잊어버리고 일본어가 보편화될 것입니다. 다행히도 해방 이후 우리 민족은 일제의 흔적을 지우고자 현재까지도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 책은 응구기가 기쿠유어 연극을 공연했던 것이 정치색을 띤다고 정치범으로 교도소에 수감되었을 때 화장지 위에 집필한 것이라고 합니다. 케냐의 민중, 그들의 노력, 언어, 노래, 빈부격차, 신식민주의, 매판자본 등에 대해 고심하며 만들어진 작품이라 생각됩니다.
책에는 성적으로 착취당하는 여성인 와링가를 주인공으로 하여 일을 빼앗긴 노동자 무투리와 땅을 빼앗긴 농민 왕가리, 진보적 의식을 지닌 지식인 가투이리아, 자본가 음위레리 그리고 비밀 청부살인 조직에 속한 운전자 음와우라가 모여 일시적인 작은 사회를 이루게 되는 것이다.
왜 제목이 <십자가 위의 악마>일까 궁금증을 가지고 읽었습니다. 하지만 소설의 줄거리에는 무엇이 악마인지 명확하게 드러나지는 않습니다. 마지막 해설 부분을 통해 이래할 수 있었습니다.
악마의 존재에 대한 논쟁은 이 소설의 제목과도 연결되는 중요한 모티프라고 할 수 있다. 십자가에 달린 악마는 작품 초반 이미 와링가의 꿈을 통해 등장하는데, 알레고리와도 같은 이 장면에서 악마는 서구 제국주의를, 추종자는 케냐의 매판자본가들을 의미한다.
민중이 악마를 십자가에 못 박았지만 곧 추종자들이 악마를 다시 내리는 것은 식민지 지배를 끝장내고 독립을 이룬 뒤에도 매판자본가들에 의해 다시 들어온 외국자본이 여전히 신식민지 지배를 이어가는 것을 의미한다. 동시에 식민지 지배에서 기독교가 행사하는 영향력을 나타내기도 하는데, 음위레리의 설교나 경연 대회의 연설에서 나타나듯이 기독교는 지배를 정당화하고 복종적, 체념적 세계관을 심어주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왜 완독 후에 작품해설을 봤을 때 도움이 됩니다. 책의 제목에서 등장하는 악마란 것이 서구 제국주의를 의미하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추종자들은 일제시대의 친일파를 연상케 합니다. 특히나 기독교에서 언급하는 악마와 성경의 내용이 자주 인용되는 것이 민중 길들이기로 활용되고 있다는 것은 놀랄 만한 일입니다. 결국 제국주의자들을 추종하는 케냐인들이 자국 민중을 순종적으로 만들기 위해 기독교를 활용한다는 것입니다.
지배계급의 폭력이 일상화되어 있는 상황에서 피지배계급의 저항만 폭력으로 치부되어 단죄되고, 기독교는 폭력에 폭력으로 맞서서는 안 된다는 교리를 설파함으로써 저항의 싹을 잘라버린다.
대한민국에서도 일제로부터 해방 후에 미국에 의한 군정이 시작되었습니다. 영어를 잘 하는 사람들이 통역관으로 매판자본가로 기회를 얻었습니다. 친일은 문제 되지 않고 친일 지주나 자본가들, 경찰들이 재고용되었습니다. 일제시대의 긴 터널을 끝으로 제국주의가 끝나는가 싶었는데 또 다른 제국주의 국가인 미국이 지배를 시작한 것입니다. 그들은 영어라는 언어를 추종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기독교라는 종교도 더욱 확대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케냐의 상황이 많이 유사합니다.
1970년대의 케냐의 모습을 그리고 있는 소설을 통해 21세기의 대한민국의 모습을 바라봅니다. 매년 증가하는 부동산 투자를 위한 대출의 증가, 어려서부터 영어를 잘 하도록 하기 위해 천문학적인 돈을 투자하고 있습니다. 미국에서 유학생활을 하는 것은 대학에서 교수의 지위를 얻기 위한 필수과정입니다. 자본주의의 작동원리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를 유혹하여 마음이 눈멀고 정신이 귀먹게 만드는 악마를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한다. 그리고 그의 추종자들이 악마를 다시 십자가에서 내려, 사람들이 사는 이 땅을 다시금 지옥으로 만들지 못하도록 거듭 주의를 기울여야 하느니... - 10페이지
정리하면서 도입부에 나오는 이 말이 이해가 되었습니다.
갑자기 와링가의 머릿속에서 어떤 목소리가 울렸다. 너는 왜 또다시 네 목숨을 끊으려 하느냐? 이 땅에서 네가 할 바를 다 마쳤다고 누가 얘기하더냐? 네게 주어진 시간이 이제 끝났다고 누가 말하더냐? -17페이지
최근 식민주의의 사슬에서 벗어난 모든 나라의 모든 도시들이 다 마찬가지죠. 그 나라들은 도대체 가난을 벗어나기가 힘든데, 그건 그저 경제를 운영하는 법을 미국 전문가들에게서 배우겠다고 나섰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사리사욕의 체계와 그 원칙을 배우는 반면, 공동체의 선이라는 개념을 칭송하는 옛날 노래들은 다 잊어버리라고 교육받은 거죠. 돈벌이를 찬양하는 새로운 노래, 새로운 찬가만을 배워온 거예요. -22페이지
문화제국주의는 정신과 육체의 노예화를 낳았어요. 자기 땅에서 외국인들이 이래라저래라 하는 게 아무렇지도 않을 만큼 정신적으로 눈멀고 귀먹은 상태를 초래하고, 우리 민족의 문제를 대하면서 외국인들의 귀와 입으로 행세하게 만든 게 바로 문화제국주의입니다. - 95페이지
일제시대 우리의 모습이 그랬습니다. 식민지배의 기간이 길어질수록 민족적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일제의 지배를 당연하게 여깁니다. 일제에 빌붙어서 살고자 하는 자들이 늘어납니다. 독립에 대한 체념이 커집니다. 문화제국주의를 우리는 체험했습니다.
외국 것이 우월하고, 케냐의 것은 열등하다. 그게 현대 케냐 상류층들이 돈을 버는 기초였습니다. -186페이지
갑자기 두려운 마음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면서 이런 생각이 떠오르는 것이었다. 무슨 일이 생기든 힘겨운 삶의 과정에서 도망치는 일은 이제 그만할 테다. 그러자 엄청난 용기가 솟아올랐고, 그래서 그녀는 보이지 않는 목소리를 향해 물었다. "거기 누구예요?"-308페이지
이 얘기가 뭐냐면, 교회와 학교와 문학과 노래와 영화와 양조장과 술집과 신문 등이 모두 힘을 합쳐 민중을 세뇌시키는 독약의 역할을 할 것이고, 그 목적은 노동자들로 하여금 이 세상에 키멘데리 계급의 노예로 사는 것만큼 영광스러운 일은 하나도 없다고 진심으로 믿다 못해 심지어 자기가 죽어서 그 시신이 농장을 더욱 비옥하게 만들 비료가 될 날을 손꼽아 기다릴 정도로 만드는 것이지. -316페이지
이 부분을 읽으며 현재까지도 언론과 권력이 대한민국을 지배하고 있는 원리라고 생각되었습니다. 특히나 군사정권 시절에는 더욱 심했습니다. 언론을 통제하고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기사만을 흘려보냈습니다. 문화를 조장했습니다. 학교에서 배우는 교과서를 만들었습니다. 스포츠와 유흥문화를 만들었습니다. 종교를 이용했습니다.
오직 가난한 사람들이 받은 대로 되갚아주겠다고 나설 때만 그게 폭력이 되지. - 319페이지
무전유죄 유전무죄라는 말이 대한민국의 현재를 잘 설명합니다. 정치권과 사법부, 검경, 정부관료, 지식인들 및 기업인들이 뉴스에 범죄와 관련되어 등장할 때와 일반 국민들이 범죄로 법정에 섰을 때 판단의 경중이 다릅니다. 돈이 있으면 변호사를 써서 빠져나갑니다. 일반 국민은 변호사를 선임하는 것조차 부담스럽습니다.
권력을 가진 자들이 채찍질하는 것은 당연하게 여기고 반대로 국민이 잘못된 것에 대해 채찍질하고 바로잡고자 하면 귀머거리 행세를 합니다. 지금은 많이 나아졌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국민의 목소리에 대한 귀머거리 행태가 보입니다.
당신처럼 기계를 고치고 깎고, 금속을 녹여 주조하는 기계공학을 배우는 것이 아주 중요한 첫걸음이거든요. 다른 젊은 여성들에게도 그들의 능력과 잠재력을 알려주는 일종의 신호탄이라 할 수 있죠.-407페이지
1970년대 케냐에서 여성들을 어떻게 대우했는지 소설속에 잘 나타납니다. 주인공인 와링가가 남성들에게 농락당해도 반항하지 못하던 상태에서 새롭게 태어나서 호신술을 배우고, 공학을 배워서 자동차 정비를 하는 모습은 케냐에서 여성들의 정신적 굴레를 벗어날 것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부분에서 와링가가 자신을 성적으로 농락하고 임신한 사실을 알고 난 뒤에는 버렸던 노인을 만났습니다. 그가 와링가의 결혼하려 했던 가투이리아의 아버지로 설정된 것은 극적인 반전이었습니다. 이전과는 달리 그의 감언이설에 농락당하지 않고 당당하게 자신의 말을 하고 결국에는 총으로 그를 죽입니다. 이는 신식민주의적 자본주의의 사망을 희망하는 작가의 마음이 담겨있다고 생각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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