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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습관

독서습관212_과학자이자 신학자를 통해 17세기를 경험하는 책_팡세_파스칼_2006_민음사(200214)

by bandiburi 2020. 2. 16.

● 저자: 파스칼 Pascal
1623년 6월 19일, 프랑스 오베르뉴의 레르몽 페랑에서 고등 세무원장인 아버지 에티엔 파스칼과 어머니 앙투아네트 베공 사이에서 태어났다. 3세 때 어머니를 여의고, 8세 때 가족이 파리로 이주하였다. 1세의 파스칼의 유클리드 제32명제를 푸는 것을 목격한 아버지가 크게 놀라며, 그때부터 수학과 기하학을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14세 때부터는 당대 과학자들의 모임인 메르센 아카데미에 출입하였다. 1640년 17세 때에는 <원추곡선론>을 발표하고, 2년여에 걸쳐 계산기를 제작하였다. 24세 때에는 '진공'에 관한 실험을 실시하여 그 결과를 <진공에 관한 새실험>에서 발표하였다. 이를 계기로 데카르트 및 노엘 신부 등과 일련의 논쟁을 벌인다. 그는 거의 전생에 걸쳐 자연과학과 수학, 기하학 등에서 탁월한 연구 성과를 보였다. 그러나 파스칼은 제1차 회심(1646년), 아버지 에티엔의 죽음(1651년), 사교 생활(1651~1654년), 제2차 회심(1654년)등의 일련의 체험을 통해 실용적 학문의 범주를 뛰어넘어, 이후 기독교의 원리 탐구와 인간과 신에 대한 사색에 전념한다. 1655년에는 포르루아얄 데 샹에 체류하면서, 철학과 종교에 관한 대화를 드사시와 주고받는다. 1656년부터 장세니스트들에 대한 예수회의 비난이 점차 격화되자. <한 지방인에게 보내는 편지>(일명 <플로뱅시알>이라는 글을 통해 장세니스트들을 변론하는 데 앞장선다. 1658년부터는 신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대항하기 위해 '기독교 호교론'를 쓸 구상을 시작하였다. 1659년부터 건강이 현저하게 악화되었고, 1662년 8월 19일 지병이 악화되어 39세를 일기로 생을 마친다. 1670년에는 파스칼의 유고 출판이 성사되어, 그의 조카 에티엔 페리에가 서문을 쓴 <종교 및 기타 주제에 관한 파스칼의 사상>(팡세 초판본)이 출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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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감
파스칼은 기독교인이었습니다.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에 대한 의견이 많이 언급됩니다. 과학이 발달한 오늘날에는 그 원리가 밝혀져 명백한 사실들에 대해서도 17세기에는 신의 섭리로 받아들여졌습니다. 

'팡세'라는 책 자체가 접근하기 어려운 책으로 간주되어 아직까지 읽지 않고 제목만 아는 척하다가 이제야 과감하게 책을 펼쳤습니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독서는 책과 책이 서로를 연결하며 지식의 폭과 깊이를 더해주고 있습니다. '팡세'에서 언급하는 역사, 인물, 종교에 대해서도 학창시절보다는 이해의 폭이 넓어져 상황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책을 읽어가며 17세기를 살았던 저자 파스칼이 왜 이런 생각을 가지게 되었을까에 대해 상상을 해봤습니다. 많은 철학적 사고를 담아놓은 글은 시대적 상황이 이런 글을 필요로 했던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생각하게 하는 책은 좋은 책입니다. 저자가 써놓은 것은 어디까지나 참고이지 절대적인 진리는 아닙니다. 그래서 편하게 읽었습니다.

전반부에는 윤리 과목과 같은 인간학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조금은 지루한 감이 있습니다. 하지만 후반부에는 성경에 대한 내용이 많이 언급됩니다. 그래서 성경에 대한 지식이 없다면 이 책은 이해하기 어려울거라 생각됩니다. 파스칼이 두 번의 회심을 경험하고 장세니스트들을 변호할 정도로 지식이 출중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과학자 파스칼이 아닌 신학자(성서학자) 파스칼을 볼 수 있는 책입니다. 다만 파스칼 사후에 그가 계획했던 '호교론'에 관련된 글들 900여개를 모아서 책으로 출판한 것이라서 지루한 감이 있습니다. 하지만 연구자의 입장에서 특정한 부분에 대해 깊이 있게 들여다본다면 1650년 전후의 시대상황을 잘 알 수 있겠습니다. 

제일 뒷 부분에 있는 '작품 해설'이 아주 유익했습니다. 파스칼의 생애에 대한 요약과 팡세의 내용에 대한 정리가 되어 있어 앞에서부터 읽어가면서 어렵고 생소한 이름들이 왜 나왔는지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책에서 발췌
5-(9) 사람을 유익하게 꾸짖고 그의 잘못을 깨우쳐주려고 할 때는 그가 어떤 방향으로 사물을 보는가를 관찰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그 방향에서 보면 대체로 옳기 때문이다. 
25페이지) 자기를 행위의 유일한 주인으로 생각하고 그것에 대해 자기에게만 책임을 진다고 말하는 것을 듣는다고 해서 우리에게 무슨 이익이 있겠는가
26) 이치에 합당하다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은 두 종류밖에 없다는 것을 인정하라. 신을 알기에 마음을 다하여 신을 공경하는 사람들과, 신을 모르기에 마음을 다하여 신을 찾는 사람들
28) 그러나 이 영원은 존재한다. 그리고 이 영원의 문을 여는 죽음, 시시각각 그들을 위협하는 죽음은 머지않아 그들을 영원히 파멸되거나 불행하도록 운명 지어진 끔찍한 필연 속에 어김없이 빠뜨릴 것이다. 
31) 신을 알지 않고는 행복이 없고 신에게 가까이 갈수록 행복해지며 따라서 궁극의 행복은 신을 확실히 아는 데 있다는 것. 그리고 신에게서 멀어질수록 불행해지고 따라서 궁극의 불행은 반대의 것을 확신하는 데 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34) 신에게 버림받는 것은 이방인들 가운데 나타나고 신에게 보호받는 것은 유대인들 가운데 나타난다. 
50) 53-(161) 헛됨. 이 세상의 헛됨과 같은 명백한 것을 사람들은 너무나도 모르고 있기에 가령 권세 영화를 좇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라고 말하면 무슨 묘한 뜻밖의 이야기가 되어 버린다. 참으로 기가 막힐 일이다. 
55) 73-(164) 이 세상의 헛됨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이야말로 그들 자신이 참으로 헛되다. 
59) 만약 법관들이 진정한 법을 가지고 있고 또 의사들이 참된 의술을 가지고 있다면 사각모 따위는 그들에게 필요 없을 것이고 이 지식의 위엄은 그 자체로써 충분히 존경받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단지 상상적인 지식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자신들이 상대하는 상상력에 작용할 헛된 장치들을 이용할 필요가 있으며 실제로 그렇게 함으로써 존경을 모으고 있다. 
63) 각자 자기의 생각을 살펴보라. 우리 생각이 온통 과거 또는 미래에 사로잡혀 있는 것을 알 것이다. 우리는 거의 현재를 생각하지 않는다. 혹 생각한다면 미래를 사용하기 위한 빛을 그것에서 빌려오기 위해서일 뿐이다. 현재는 결코 우리의 목적이 아니다. 과거와 현재는 우리의 수단이고 단지 미래만이 우리의 목적이다. 따라서 우리는 사는 것이 아니라 살기를 바라고 있다. 그리고 항상 행복하려고 준비하고 있으니 결코 행복할 수 없다는 것은 불가피하다. 
67) 97 인간의 모든 활동은 재물을 갖는 데 있다. 그러나 인간은 재물을 정당하게 소유할 근거도 없고 확실하게 소유할 힘도 없다. 학문도 쾌락도 마찬가지이다. 우리에게는 진리도 행복도 없다. 
71) 왕과 함께 사는 사람들은 그들이 섬기는 왕의 이익보다 자신들의 이익을 더 소중히 여긴다. 
 (중략) 인간은 자신 안에서나 타인에게나 위장이고 기만이고 위선일 뿐이다. 그는 타인이 자기에게 진실을 말해 주기를 원치 않는다. 그는 타인에게 진실을 말하기를 피한다. 
75) 틀림없이 자연법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타락한 희한한 이성이 모든 것을 타락시켰다. 
76) 법이 옳기 때문에 복종하는 사람들은 실은 그들이 상상하는 정의에 복종하는 것이지 법의 본질에 복종하는 것은 아니다. 
78) 법은 정당하지 않다고 민중에게 말하는 것은 위험하다. 그들이 법에 복종하는 것은 오직 법이 정당하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법은 법이기 때문에 복종해야 한다는 것도 동시에 말해 줄 필요가 있다. 
95) 그러므로 인간은 그 누구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특성만을 사랑한다. 
97) 또 하나의 극단은 위대한 정신의 소유자들이 도달하는 무지이다. 
98) 다수는 최선의 길이다. 다수는 명백하고 복종시킬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장 무지한 사람들의 의견이다. 
101) 그러나 이제 이 최후의 명제를 깨뜨려야 하며, 민중의 의견은 매우 건전하다 해도 그들의 공허함은 여전히 진실이라는 점을 밝혀야 한다. 민중은 진리가 있는 곳에서 진리를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고, 진리가 있지 않은 곳에 진리를 둠으로써 그들의 의견은 항상 매우 그릇되고 불건전하기 때문이다.
104) 사람을 귀족의 신분이나 재산과 같은 외양으로 구별하는 것. 저들은 이것이 얼마나 불합리한지를 지적하며 의기양양해한다. 
105) 힘없는 정의는 무력하고 정의없는 힘은 폭력이다. 
110) 세상의 가장 불합리한 것이 인간의 착란으로 인해 가장 합리적인 것이 된다. 한 나라의 통치를 위해 여왕의 장남을 선택하는 것보다 비합리적인 것이 어디 있는가.


117) 신을 느끼는 것은 심정이지 이성이 아니다. 이것이 곧 신앙이다. 
118) 그런데 사유의 순서는 자신으로부터 그리고 자신의 창조자와 그의 목적으로부터 시작된다. 
119) 사유는 인간의 위대를 이룬다. 
123) 습관은 제2의 본성이다. 그것은 제1의 본성을 파괴한다. 
125) 우리가 잠을 잔다고 생각할 때 실은 그것에서 깨어나는 또 하나의 잠이 아닌지 그 누가 알겠는가
127) 자연은 회의론자들을 꺾고 이성은 독단론자들을 꺾는다. 
132) 전 인생에게 가장 중요한 일은 직업의 선택이다. 우연이 그것을 좌우한다. 
133) 성서는 모든 신분의 사람들을 위로하고 또 모든 신분의 사람들을 겁먹게 하기 위해 필요한 구절들을 갖추어놓았다. 
138) 그러므로 인간의 유일한 행복은 자신의 조건을 생각하는 것에서 마음을 돌아서게 하는 데 있다. 이것을 생각할 여유를 주지 않는 어떤 활동에 의해서나 아니면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을 즐겁고 새로운 정열, 도박, 사냥, 흥미를 끄는 관극, 결국 위락이라 일컬어지는 것에 의해서 말이다. 
153) 인간 정신의 위대함은 중간에 머물 줄 아는 데 있다. 위대함은 중간에서 벗어나는 데 있기는커녕 거기서 벗어나지 않는 데 있다. 
158) 이 무한한 심연은 오직 무한하고 불변하는 존재, 즉 신에 의해서만 채워질 수 있으므로 이런 사물에는 구원의 능력이 없다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171) 우리의 종교를 제외하고 어떤 종교도 인간이 죄 안에서 태어났다고 가르치지 않았다. 어떤 철학 학파도 이것을 말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어떤 것도 진실을 말하지 않았다. 
178) 불신자들에 대해서는 동정하는 것으로 시작할 것, 그들은 그들의 상태로 인해 매우 불행하다. 그들을 욕하는 것이 그들에게 유익할 때만 그렇게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것은 그들을 해친다. 
186) 정욕이 해를 끼치지 않도록 목숨이 일주일밖에 남지 않은 것처럼 하자. 
190) 복종해야 할 때 복종하고 회의해야 할 때 회의하고 확신해야 할 때 확신해야 한다. 이렇게 하지 않는 사람은 이성의 힘을 깨닫지 못한 사람이다. 
194) 이성의 최후의 한걸음은 자기를 초월하는 무한한 사물들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이것을 아는 데까지 이르지 않는다면 그 이성은 허약할 뿐이다. 
196) 이성이란 모든 것에 대해 휘어 구부러지므로
200) 자신의 비참을 모르고 신을 아는 것은 오만을 낳는다. 신을 모르고 자신의 비참을 아는 것은 절망을 낳는다.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은 그 중간이다. 그 안에서 신과 우리의 비참을 동시에 만나기 때문이다. 
202) 사랑의 원인이 무엇이고 그 결과가 무엇인지를 고찰하는 것보다 인간의 공허를 더 잘 보여주는 것은 없다. 전 세계가 그것 때문에 변하였으니 말이다.(클레오파트라의 코)
220) 마호메트는 예언되지 않았다. 예수 그리스도는 예언되었다. 마호메트는 죽임으로써, 예수 그리스도는 자기를 믿는 사람들을 죽게 함으로써. 마호메트는 읽는 것을 금함으로써, 사도들은 읽으라고 명함으로써. 결국 이것은 너무나도 상반된 것이어서 마호메트가 인간적으로 흥하는 길을 택했다면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적으로 망하는 길을 택하였다. 
221) 참된 종교는 그의 신을 사랑하도록 의무 지우는 것을 특징으로 삼아야 한다. 
223) 오직 기독교만이 외면과 내면이 섞여 있어 모든 사람들에게 적합하다. 
233) 부활고 처녀 출산에 반대하여 그들은 무슨 할 말이 있는가. 사람이나 짐승을 낳는 것이 다시 낳는 것보다 더 어려울 게 무엇인가. 만약 그들이 어떤 종류의 짐승을 한 번도 본 일이 없었다면 그것들이 서로 짝 없이 태어났는지 분간할 수 있겠는가
242) 예수 그리스도는 신이자 인간이다. 아리우스파는 그들이 양립할 수 없다고 믿는 이 둘을 조화시킬 수 없어서 예수는 인간이라고 말한다. 이 점에서 그들은 가톨릭이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가 신이라는 것을 부인한다. 이 점에서 그들은 이단이다. 그들은 우리가 예수의 인성을 부인한다고 주장한다. 이 점에서 그들은 무지하다. 
246) 어떤 이유로 그들은 부활할 수 없다고 말하는가. 태어나는 것과 부활하는 것, 없었던 것이 생기는 것과 있던 것이 다시 있게 되는 것 중 어느 것이 더 어려운가. 존재를 갖는 것이 존재로 되돌아오는 것보다 더 어려운가. 
275) 왜냐하면 자연은 은총의 표상이고, 보이는 기적은 보이지 않는 기적의 그림자이기 때문이다. 
276) 유대인의 교리는 기적과 예언과 영속성을 가지고 있었지만 참된 것은 아니었다. 신만을 섬기고 신만을 사랑한다는 또 하나의 요건을 갖추지 않았기 때문이다. 
284) <탈무드 히에로솔>이 나온 지 백 년 후(440년), 랍비 아세 R. Ase에 의해 전 유대인들의 동의를 얻어 <바벨론의 탈무드 Talmud babylonique>가 편찬되었다. 유대인들은 그 안에 포함된 모든 것을 기필코 지켜야만 한다. 
289) 인간은 영광과 신과의 교제의 상태에서 비애와 회한과 신으로부터 유리된 상태로 추락하였으나 이 삶이 끝나면 강림하실 메시아에 의해 복위될 것이라고 믿는 이 종교는 땅 위에 항상 있어왔다. 모든 것이 흘러갔어도 모든 것의 존재 목적인 이 종교는 존속하였다. 
293) 육적인 유대인은 기독교도와 이교도 사이에 중간에 위치한다. 이교도는 신을 모르고 이 세상만을 사랑한다. 유대인은 참된 신을 알고도 세상만을 사랑한다. 기독교도는 참된 신을 알고 이 세상을 사랑하지 않는다. 유대인과 이교도는 같은 복을 사랑한다. 유대인과 기독교도는 같은 신을 안다. 유대인은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이교적 감정만을 가진 사람들이고, 다른 하나는 기독교적 감정을 가진 사람들이다. 
307) 70인이 성스러운 책을 번역하는 데 있어 사람들이 경탄할 정도의 일률성을 보여주었다는 것은 믿을 수 없는 일이 아님을 증명한다. 
320) 로마의 황제 칼라귤라는 예루살렘 성전에 황제의 동상을 세우라고 명하였는데 요세푸스와 피론은 당시의 유대인들의 반응을 전하면서 이들의 결사적인 반대를 증언하였다. 
386) 신이 바라지 않는 모든 것은 금지되어 있다. 죄는, 신이 원치 않는다는 전반적인 선언에 의해 금지되어 있다. 
412) 만약 우리가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로 정죄한다면 당신이 옳을지 모른다. 그러나 다양성 없는 통일은 외부의 사람들에게 무익하고, 통일 없는 다양성은 우리에게 파멸을 가져온다. - 전자는 외부에 해롭고, 후자는 내부에 해롭다. 
420) 4세기경, 이단자 아리우스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사람들은 기적과도 같은 하늘이 내린 벌로 생각하였다. 파스칼은 아리우스와 아타나시우스와의 싸움을, 예수회와 장세니스트의 싸움과 비교하고 있다. 
435) Pelagius : 인간의 우수성과 자유 의지를 주창함으로써 아우구스티누스의 결렬한 비판을 받았으며 가톨릭 교회로부터 이단 판정을 받았다. 
437) 잘할 수 있는 능력과 잘할 줄 아는 지식은 즐거움을 준다. 
488) 기적은 사용된 수단의 자연적 힘을 초월하는 하나의 결과다. 그리고 거짓 기적은 사용된 수단의 자연적 힘을 초월하지 않는 하나의 결과다. 
535) 파리와 루뱅에서 신학을 공부한 생 시랑은 얀센(장세니우스)과 친교를 맺었는데 이들은 당시의 가톨릭 교회의 무력하고 해이된 상태를 개탄하며 아우구스티누스의 정신으로 되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539) 예수회가 인본주의의 영향을 받아 교리를 근대화하고 인간의 자유 의지에 입각한 유연한 도덕을 표방한 데 반해 장세니스트들은 초대 신앙의 영적 순수성과 내면적 도덕의 엄격성으로 돌아갈 것을 주장하였다. 
550) 중세의 영적 억압에서 풀려난 16~17세기의 서구인들은 바야흐로 인간의 시대를 구가하며 자신들의 의지와 욕망과 능력만을 믿는 인간적 모험을 펼치려 했다. 신이 없는 인간은 무슨 가공의 대상이 아니다. 이들은 바로 17세기 프랑스 사회의 주축을 이루고 있었고 파스칼의 눈앞에 실존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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