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연수 작가의 <소설가의 일>에서 '글을 천천히 쓴다'말이 기억에 남는다. 책을 읽으며 나도 모르게 글을 써보고 싶다는 마음이 드는 책이었다. 블로그에 글을 쓰고 있기에 그의 글은 더욱 부러웠다. 김연수 작가의 또 다른 책 <청춘의 문장들>에 대한 기대가 컸다. 나와 유사한 시대를 살았기에 그의 청춘의 흔적은 나의 흔적과 많이 겹친다. 그래서 더욱 정겹다.
가수 김광석과 그의 노랫말을 보며 나도 마음이 다시 아려왔다. 그의 콘서트에 한 번 가봐야지 마음먹고 있었는데 어느 날 그의 사망 소식을 접했다. 가슴이 텅 비어버린 느낌이었다. 누가 김광석과 같은 노래를 부를 수 있을까 다시는 없을 거야 그런 생각으로 한동안 보냈던 기억이다.
작가가 경험했던 추억들과 자신이 읽었던 책의 내용을 씨줄과 날줄처럼 이야기로 펼쳐간다. 그리고 시간을 거슬러 과거를 살다 간 사람들의 시를 한자와 함께 더해놓는다. 가벼운 듯하면서도 공감을 이끌어내는 글솜씨다.
어떤 사람이 소설을 쓰게 되는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예컨대 기호학자였던 움베르토 에코는 "너는 중세에 대해서도 잘 알고 추리소설에 대해서도 잘 아니 중세를 다루는 추리소설을 한 번 써보라"는 여자 친구들의, 삼단논법에 가까운 권유에 혹해서 거의 쉰 살이 가까워 <장미의 이름>을 썼다.
나는 블로그에 가끔 글을 쓰고 있고, 회사생활을 하고 있고, 다른 사람이 쓴 책읽기를 좋아하고 더구나 곧 쉰 살이 가까워오니 '회사생활을 다루는 책 읽기'를 써볼까. 비슷하게 맞추려고 억지로 말을 만들어봤다. 어색하다.
내가 해야만 하는 일들만이 내 마음을 잡아끈다. 조금만 지루하거나 힘들어도 '왜 내가 이 일을 해야만 하는가?는 의문이 솟구치는 일 따위에는 애당초 몰두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완전히 소진되고 나서도 조금 더 소진될 수 있는 일을 하고 싶었다. 내가 누구인지 증명해주는 일, 나를 행복하게 만드는 일, 견디면서 동시에 누릴 수 있는 일, 그런 일을 하고 싶었다.
사람마다 천성이 다르듯이 좋아하는 일도 다르다. 작가와 같이 마음을 잡아끄는 일을 하고 싶은게 직업을 처음으로 찾는 청년들에게 드는 마음이다. 하지만 내가 내 마음을 알기가 어렵다. 그래서 무엇이 마음을 잡아끄는지 모른다. 그래서 직업 자체를 구하는데 올인한다. 취업 후에 나의 천성과 하는 일의 괴리가 크면 힘들게 입사한 곳인데도 그만두게 된다. 우리를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소진되게 하더라도 하는 것 자체가 즐거워 더 소진되고 싶어 하는 일을 한다면 하루하루가 즐겁겠다. 나는 현재 어떤가?
미국의 흑인작가 랄프 엘리슨이 쓴 <투명인간>에 보면, 주위의 누구도 관심을 가지지 않아 자신을 투명인간으로 여기는 주인공이 등장하는데, 내가 바로 그 꼴이었다.
투명인간이 되면 무엇을 하고 싶은가라는 질문을 받아본 적이 있다. 투명인간이란 말은 왜 나왔을까. 내가 존재하는데도 주변인들이 나를 없는 것처럼 대우할 때 투명인간처럼 여긴다고 한다. 즉 공상과학 만화영화에 나오는 투명인간이 아니라 심리학적인 투명인간인 것이다. 사무실에서도 함께 존재하지만 함께 없는 듯한 사람도 있다. 관계가 단절된 상태다. 우리는 인정의 욕구가 있다. 돕고자 하는 이타심도 있다. 조금만 서로에게 손을 뻗으면 투명인간은 사라진다.
할 일이 많지 않으므로 나는 하루 종일 뒹굴뒹굴 책이나 읽으면서 보내는 일이 많았다. 손에 잡히는 대로 책을 읽었다. 책을 읽다 보면 하루가 저물었다. 아무리 책을 천천히 읽어도 언제나 시간이 남았다. 그렇게 느릿느릿 책을 읽었는데도, 그렇게 많은 책을 읽었는데도 창 밖을 보면 아직 해가 저물지 않았으니 그게 너무나 신기했다.
오전 8시부터 오후 5시까지 직장에서 평일을 보내고 주말에는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는 것이 평범한 샐러리맨의 일상이다. 지루할 정도로 시간이 가지 않는 생활이 부럽다. 물론 학창 시절에는 누구나 그런 경험이 있었을 것이다. 다만 책을 읽는데 관심이 있어서 책을 읽고 또 읽어도 시간이 느릿하게 가는 그 느낌을 지금 다시 느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아마도 은퇴 후에는 가능하겠다. 그때는 눈이 침침해질 것 같은데 글이라도 잘 읽을 수나 있으면 좋겠다.
세상에 똑같이 생긴 돌이 없듯이 같은 유형의 사람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우리는 저마다 자신의 유형일 뿐입니다. 우리가 다른 누군가의 삶을 살아갈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모여 있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살아온 환경이 다르고 취향이 다르고 직업을 가진 이유도 다릅니다.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서 함께 살아갑니다. 그런데 사회에서는 획일적인 모델을 제시하며 그렇게 돼야 한다고 강요합니다. 성적, 영어, 외모, 명품 등이 그렇습니다. 자신의 인생관이 확고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이 제단 한 사이즈의 옷을 입게 됩니다.
그건 내가 아닙니다. 나에게 맞는 옷이 있습니다. 나에게 맞는 삶을 추구하고 나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행복의 시작입니다. 비교할 필요가 없습니다. 사무실에서 한 후배직원에게 물었습니다. 요즘 주식을 하냐는 물음에 인생 '공수래공수거'라 생각하며 살기에 주식은 하지 않습니다. 참 쿨한 후배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는 모르겠으나 공수거 할 때까지 춥지는 않아야겠습니다.
일주일이면 거의 50매에 가까운 글을 쓰는 생활이 1995년부터 이어졌으니 숙명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이런 숙명이 그토록 간단한 과정을 통해서 결정된다는 사실을 아직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진정 구르는 돌처럼 그렇게 굴러다니다가 낯선 곳에 머무르는 게 삶이란 말인가? 구르는 돌에는 이끼가 끼지 않는다는데 내 마음에는 의문만 잔뜩 끼었다.
블로그를 2018년 1월에 시작했을 때는 새로운 것에 대한 도전을 한다는 생각이었다. 벌써 3년이 되었다. 글로 나의 자취를 남기는 것이 좋았다. 이것도 20년 정도 이어지면 몇 권의 책이 되겠다. 압축해서 액기스만 모아놓으면 나만의 인생 에세이가 탄생한다. 그 한 권을 기대해 보자.
자기가 뜻한 바대로 살아가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을 것이다. 오늘은 거지에게 동전을 던지다가도 내일이면 그 거지가 자리를 지키고 앉아 구걸할지도 모르는 삶이다. 이건 내가 한 말이 아니고 밥 딜런이 그 노래에서 한 말이다.
인생사 세옹지마라는 말을 좋아한다. 일희일비하지 말라고 한다. 좋아지기도 하고 나빠지기도 한다. 현재를 충실하게 살고자 노력할 뿐이다. 불행하다고 생각할 때가 행복이 시작되고 있을지 모른다. 내가 구걸한 거지의 자리에 내가 있을 수도 있다는 말이 상상만으로 충분히 새옹지마의 교훈을 얻는다.
<Long Distance Flight>를 들으며 나는 잊혀지는 것도 그렇게 아쉬운 일만은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잊혀진 것들은 변하지 않고 고스란히 내 안에 남아 있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정말 그럴까. 정말 낭만적인 글이다. 잊혀지지 않기 위해 동상을 만들고 미화하고 역사를 왜곡하기도 하는 것은 성숙하지 못해서 일 것이다. 죽은 자들은 말이 없다. 살아서 그들이 했던 행적들만이 남아서 우리에게 전해진다. 어떤 손을 거쳐왔느냐에 따라 단맛이 나기도 하고 쓴맛이 나기도 한다. 아무리 왜곡을 해도 그들과 동시대를 정직하게 살다 간 이들의 눈길이 있었기에 우리는 좀 더 정제된 역사를 볼 수 있다. 잊혀지는 것은 망각이고 무이다.
서른 살 너머까지 살아 있을 줄 알았더라면 스무 살 그 즈음에 삶을 대하는 태도는 뭔가 달랐을 것이다.
사람은 미래를 모르기에 행복하기도 하고 게으르기도 하다. 한 프로에서 위의 문구와 비슷한 사례를 본 기억이 있다. 한 90대 할머니가 나와서 자신이 90세까지 살 줄 알았다면 60대 70대 나이에 뭐라도 새롭게 배우기 시작했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60세와 90세는 30년의 긴 세월이다. 과거에는 60이면 노인으로 인정해줬다. 환갑을 축하하며 마을 잔치를 벌였다. 90세까지는 마을 잔치를 하고도 30년을 더 살고 계신 거다. 잔치를 차려줬던 사람들이 먼저 사망했을 수도 있다. 우리의 앞일을 모르기에 현재를 즐겁게 사는 것이다. 적당한 스트레스만 받자. 수명에 도움이 된단다.
다음날, 이삿짐 트럭을 타고 언덕길을 내려가면서 나는 그 언덕에서의 삶이 내겐 봄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꽃시절이 모두 지나고 나면 봄빛이 사라졌음을 알게 된다. 천만 조각 흩날리고 낙화도 바닥나면 우리가 살았던 곳이 과연 어디였는지 깨닫게 된다. 청춘은 그렇게 한두 조각 꽃잎을 떨구면서 가버렸다. 이미 져버린 꽃을 다시 살릴 수만 있다면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다.
청춘을 지나는 것을 참 멋지게 표현했다. 내게서 청춘은 언제 작별을 한 것일까. 청춘이 있기는 했나. 군대가기 전이 노란 개나리가 흐드러지게 피어있고 진달래가 불같이 피어있는 봄처럼 차가우면서도 따사로운 햇살 같은 느낌의 청춘이었다. 군대 제대를 하면서 생각도 삶의 전선으로 뛰어들어갔다. 그리고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1930년대에도 나와 비슷한 인간들이 살고 있었다는 게 너무나 놀라웠다. 1930년대에도 나와 비슷한 고민을 했던 젊은이들이 있었다는 게.
인간의 수명이 100세 전후이기 때문에 역사가 필요한 것이리라. 실제로 성인으로서 건강하게 살아가는 시기로 보면 50년 전후다. 그 시기에 과거를 회상하고 현재를 음미하며 미래를 고민한다. 그러다 보면 세상과 작별할 시간이다. 태어나서 죽는 날까지의 과정은 인류 개개인에게 주어진 숙명이다. 나의 삶과 비슷한 삶을 살다 간 사람이 당연히 많았을 것이다. 그들이 말을 하지 않을 뿐이다. 우리가 새로운 세상을 고민하고 있지만 문명의 이기를 제외하면 과거의 철학적 질문은 현재도 이어진다.
여전히 삶이란 내게 정답표가 뜯겨나간 문제집과 비슷하다. 어떤 것인지 짐작할 수는 있지만, 그게 정말 맞는 것인지 확인할 방법이 없다.
이 부분도 멋진 표현이다. 아이들의 문제집을 이렇게 삶에 적용해서 맛깔나게 문장을 만들다니. 우리의 인생은 정답이 없기에 살만한 것이다. 정답이 있다면 모두가 그 모양대로 살고자 할 것이다. 획일적인 삶, 당신은 그런 삶을 살고 싶은가?
몽골의 시인인 이스 돌람의 시를 읽게 된 것은 그로부터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뒤의 일이다. 하지만 이스 돌람의 시 <만추>를 읽자마자 나는 질문으로 가득 찼던 그해 11월을 떠올렸다. 질문으로 가득 찬 삶이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지 깨닫게 됐다.
사실은 지금도 나는 뭔가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을 보면 이상하기만 하다. 그 모든 것들은 곧 사라질 텐데,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런 점에서 여전히 나는 사춘기. 앞쪽 게르를 향해 가만-히 살핀다.
김시습이 맞닥뜨린 어둠은 과연 어떤 것이었을까? 스물한 살 시절 감각산에서 글을 읽다가 수양대군이 나이 어린 단종에게서 정권을 탈취했다는 소식을 듣고 사흘이나 두문불출한 다음에 통곡하고 책들을 모두 불살랐다더니 그런 참담한 시대를 일컫는 것이었을까?
독서습관327_청춘의 문장들_김연수_2004_마음산책(210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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