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능 국어문제 지문에 박제가와 이덕무에 대한 내용과 함께 북학파가 나와 이에 대해 가족들과 얘기할 기회가 생겼습니다. 역사시간에 배웠던 것을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을 뿐이어서 제대로 알고 싶었습니다. 집에는 2013년에 아이들이 열심히 읽을 것이라 기대하며 구입했던 만화로 되어 있는 '서울대 선정 인문고전 50선'이 있는데 그중에 박제가의 <북학의>를 펼쳤습니다. 2015년 1월 1일에 읽은 소감을 책 표지 안쪽에 간략히 기록한 것이 있습니다. 하지만 기억 속에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습니다.
판사 출신인 문유석 작가가 쓴 <쾌락독서>에 있는 내용이 떠올랐습니다. '서울대 선정 인문고전 50선' 운운하는 것은 왠지 대입시험 중심의 교육을 하고 있는 것에 편승해서 책을 팔고자 하는 의도와 아이들에게 독서에 대해 접근하기 어렵게 하는 결과를 동시에 가지고 있습니다. 아무리 좋은 책이라도 자신이 관심이 있는 것을 읽고 싶을 때 읽어야 하고 주변 사람들에게 이야기해주면서 기억에 남는 것입니다.
'인문학 고전을 읽어야 성공한다' '대입을 위해 서울대 추천 인문고전 50선을 꼭 읽어야 한다'는 등의 조언 또는 겁주기를 볼 때문 의문은 더 커진다. <키케로의 의무론> <실천이성비판> <아함경> <우파니샤드> <율곡문선>... 잠시 서울대 교수님들 중 이 50선을 모두 읽은 분이 몇 분이나 될지 불경스러운 의문을 가져보았다. 나는 달랑 세 권 읽었더라
솔직히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딱 두 가지다. 어떤 책이든 자기가 즐기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것. 그리고 혼자만 읽지 말고 용기 내어 '책 수다'를 신나게 떨어야 더 많은 이들도 함께 읽게 된다는 것. 그걸 위해 기억 속의 책을 찾아간다.
<북학의>는 조선 정조 시대인 1778년에 실학자였던 박제가가 청나라에 사신으로 가는 채제공을 따라 연경을 다녀와서 폐쇄적인 조선 사회에 비해 많이 앞서있는 청나라의 문물을 상세히 기록한 개혁 보고서입니다.
당시 조선의 지배층은 당파싸움에 집중하고 있었고, 한족 중심의 명나라를 정복하고 청나라를 세운지 100년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여진족(만주족)을 오랑캐라고 멸시하며 조선이 명나라의 문화를 계승했다는 소중화 사상을 가지고 배타적이고 폐쇄적인 사회를 만들고 있었습니다.
정실부인에게서 태어난 적자와는 달리 서모에게서 태어난 서자는 과거시험에 응시할 수 없었습니다. 박제가는 유능하기는 했지만 출신을 중시하는 시대에 과거를 통해 등용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1776년에 즉위한 정조는 신분 차별 없이 인재를 등용하고자 했던 영조의 뜻을 이어받아 서자 출신인 박제가를 등용하고 중국 사신으로 발탁했습니다.
"사람이 태어나 열 살 무렵이면 두각을 나타내면서 점차 성장하는데, 마치 대나무가 처음 솟아날 때부터 1만 자 크기로 자랄 기세를 보이는 것과 같다. 이러한 때에 과거시험 문장을 가르쳐서, 몇 해를 골몰하게 만들면 이후에는 그 병을 고칠 길이 없다. 요행히도 과거에 급제하면 그날로 그때까지 배운 것을 버린다. 한 사람이 평생의 정기를 몽땅 과거시험에 소진하였건만 정작 나라에서는 그 사람을 쓸데가 없는 것이다."
박제가가 당시의 과거시험의 폐단에 대해 인식하고 있는 것이 200년이 지난 현재의 대입시험에 대해 제가 생각하는 바와 유사합니다. 저 외에도 많은 분들이 공감할 것입니다.
박제가는 청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본 중국의 모습은 눈이 번쩍 뜨이는 발전된 사회였습니다. 의복, 주택 및 농사방법 등 자신이 살아왔던 조선의 생활상과는 확연히 달랐습니다. 이런 앞선 기술과 도구를 사용하면 조선도 발전할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다양한 분야에 대해 세세하게 관찰하고 열심히 배워서 정리한 보고서가 <북학의>입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정조 왕이 1800년 8월에 갑자기 사망하면서 어린 순조의 즉위와 함께 농업을 부흥시키고 백성을 잘 살게 하려던 정조의 개혁정치는 무너져 버렸습니다. 박제가도 고문을 당하고 유배를 다녀온 후 사망하고 말았습니다.
동일한 청나라의 모습을 보면서도 100년 뒤인 1866년 고종때 홍순학이 청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온 뒤에 쓴 <연행가>에는 청나라 사람들이 지저분하고 괴상하고 분수에 넘치는 사치를 즐기는 모습으로 표현되어 당시 지배층의 고정관념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조선시대 남자들은 옛 의관제도를 따르고 있었지만 여자들 복장은 원나라의 영향으로 몽골식을 따르고 있었는데 이것도 모르면서 사대부들이 중국의 호복을 수치스럽게 여겼다면서 비판하고 있습니다.
배를 제작하고 활용하는 수준을 비교해 놓은 부분에서 양국의 기술 수준의 차이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조선은 돛단배와 나룻배를 사용하는데 치밀하지 못해 물이 새기도 하고, 작아서 물건을 많이 싣지 못하고, 사람이 앉아서 가기도 불편한 상태였습니다. 반면에 중국의 배는 크고 다층으로 견고하게 만들어져 곡물을 그대로 싣고, 사람이 식사나 잠을 잘 수도 있었습니다. 박제가의 눈에는 새로운 세상이었을 것입니다.
다른 나라의 배가 삼면이 바다인 조선의 땅에 접근할 때면 발전된 기술을 모방할 기회인데 오히려 불태워버리고 만다고 비판합니다. 외국인들을 무조건 배척하는 폐쇄적인 모습은 당시의 지배층이 자신들의 안위만을 생각하고 어떻게 백성들을 잘 살게 할 것인가에 관심이 없었음을 보여줍니다.
벽돌로 지은 집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당시 조선에서는 집을 지을 때 벽돌이 아닌 나무와 흙을 주로 사용하니 기울어지고 무너지기도 했습니다. 또한 오래가지 못해 자주 보수해야 하는 낭비가 발생했습니다. 반면 청나라는 벽돌을 만들어 이를 쌓아서 다양한 크기의 건축물을 짓고 있습니다. 박제가는 집을 짓는 게 가장 중요한 것이 벽돌이라고 합니다. 또한 집 짓는 기술도 배울 기회가 있어야 하는데 그런 기회가 없다는 점도 지적합니다.
지금은 당연하게 여겨지는 벽돌이 조선후기에는 왜 사용하지 않았을까 궁금해졌습니다. 백제의 무령왕릉 고분에도 벽돌을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지붕을 덮을 기와는 만들고 있었습니다. 유사한 방법으로 벽돌을 구워서 만들어 사용할 수도 있었습니다. 사농공상으로 직업의 귀천을 따지고 굶더라도 양반의 체면을 중시하는 시대에서 기술을 발전은 요원했을 것입니다.
벽돌 사용을 권장하기 위해서는 한 사람이 모든 과정을 다 하는 것은 비효율적이니 관청에서 후한 값으로 구매해야 한다고 합니다. 또한 초가집을 짓는 것보다 벽돌로 지은 집이 오래가므로 국가의 먼 미래를 내다보고 일을 추진해야 하는 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박제가가 이런 생각을 가진 것을 보면 당시 실학자들이 오늘날의 CEO 모임과 같이 기술을 통해 경제를 부흥시켜 나라의 발전을 도모하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한다는 구체적인 방법을 알고 있었습니다.
목축으로 나라를 부유하게 만들자고 합니다. 조선후기에 사람들은 돼지고기나 닭고기, 양고기보다는 소고기를 주로 먹으려고 했답니다. 제수용이나 일 년에 한두 번씩 고기 먹을 기회에 사용했다고 합니다. 몰랐던 부분이었습니다. 오늘날에는 돼지, 소, 닭, 오리, 심지어 양까지도 대량으로 사육하고 있습니다.
조선 후기에 소 이외에 말, 돼지, 닭, 오리 등 다양한 짐승을 사육함으로써 백성들에게 풍족하게 고기를 공급할 수 있고, 농사 수단이나 교통수단으로 또는 군사용으로 활용해 국가적인 이득을 취할 수 있었음에도 가축을 기르지 않아 관련된 기술이 전수되지 않아 점점 퇴보했다고 언급합니다. 반면에 청나라는 말, 노새, 나귀, 소, 양, 닭, 거위, 오리 등 다양한 가축을 넓은 곳에서 키우고 있고 새장에 비둘기, 종달새 같은 새를 애완용으로 키우고 있다고 전합니다.
농사에 대한 기술을 익혀야 합니다. 중국에서는 거름으로 사용하기 위해 똥을 황금처럼 여기며 주워모아 농사에 활용하고 있고, 같은 폭에 밭의 이랑도 우리는 두 개를 만들 때 중국은 세 개를 만들고, 동물과 다양한 농사용 연장을 사용하여 사람의 노동력에만 의존하는 조선에 비해 효율적으로 농사를 짓고 있어 같은 땅에서도 농산물이 훨씬 많이 생산된다고 하였습니다.
중국의 풍요로운 의식주 생활을 보면서 박제가는 우리 농부들은 한 해에 무명옷 한 벌조차 얻어 입기 힘들고, 침구 대신 멍석을 깔고 살고 있고, 가죽신이니 버선도 모르고, 입을 것과 먹을 것이 넉넉하지 않고, 재화가 제대로 유통되지 못하고 낭비되고, 학문은 과거제도에 짓눌려 있는 것은 능력보다는 문벌을 중시하는 제도로 딱 막혀 있기 때문이라고 비판합니다. 그러니 백성들이 견문을 넓힐 기회가 없고 능력 있는 사람들이 나라를 위해 기여할 기회를 박탈당하니 문화가 퇴보하고 부정부패와 매점매석이 성행한다고 합니다.
박제가가 <북학의>에서 소개한 10여 가지의 농기구는 200년이 지난 최근까지도 농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기구들이었습니다. 지금은 농업도 기계화가 되어 대부분이 사용되진 않습니다. 그래도 박제가가 제안한 것들이 당대에는 기득권 층에 의해 환영받지 못했지만 우리 사회에 큰 영향을 준 것은 분명합니다.
수원화성에 대한 부분이 뒷부분에 소개되었는데, 중국에 다녀온 실학자들의 제안대로 벽돌로 지은 성입니다. 정조가 아버지인 사도세자를 기리기 위해 지었다는 화성으로 중국에서 배워 온 벽돌 축조 방법과 각종 과학 도구 등을 이용해 설계에서부터 건축, 기록, 정리까지 실학자들이 맡아서 완성했다고 합니다.
당시에 사신들이 청에 다녀온 후 조선 문화의 후진성을 깨닫고, 청나라의 문물도 오랜 전통의 한족 문화라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만주족의 문화는 전통 한족의 문화를 흡수하고 통합했으니, 청이 곧 '전통중국, 즉 중화'라고 인정한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냉철한 현실이었음에도 당시 지배계층에는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박지원이 1780년 6월에 중국을 다녀와서 기록한 <열하일기>는 1778년 박제가가 중국을 다녀와서 기록한 <북학의>와 한 사람이 보고 들은 것처럼 유사합니다. 두 사람 모두 중국의 선진 문물에 대한 수용으로 백성들의 실생활에 도움을 줘야 한다는 이용후생 정신으로 비슷한 눈높이의 글을 남긴 것입니다.
1636년 병자호란으로 인조의 왕실은 강화도 및 남한산성으로 피신해야 했고, 삼전도의 굴욕을 맛봐야 했습니다. 이에 조선의 많은 백성과 신하들이 굴욕적 외교라며 북벌론을 주장했습니다. 임진왜란을 경험한 광해군은 청과 친선 교류를 맺어 국익을 추구하는 쪽으로 중립적인 외교정책을 전개했는데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신하들이 '인조반정'을 일으켜 왕위를 인조에게 위임했습니다. 인조는 북벌을 추진했지만 17세기 말 강성해진 청나라와의 전쟁은 불가능했습니다. 이는 박제가가 다녀온 청나라와 조선의 현실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북학의>를 통해 조선후기 당쟁으로 세월을 허비하고, 실리보다 명분만을 추구하는 지배층의 태도로 인해 백성들의 삶이 힘들어지고 나라는 점점 위태로워지는 것도 함께 볼 수 있었습니다. 박제가와 같은 실학자들의 바람대로 당시에 개혁이 있었다면 역사는 달라졌겠지요. 그렇게 강성해 보였던 청나라도 서양 열강의 침략에 속수무책으로 당한 것을 보면 조선의 국력은 미미했던 것입니다. 이런 역사는 다시 반복되지 않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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