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가 4.3 사건의 비극성을 드러내는 방법은 두 가지였다. <도령마루의 까마귀>처럼 그때의 현장으로 거슬러올라가 피해자의 목소리로 사건 현장을 재구성하는 경우와, <순이 삼촌>이나 <해룡이야기>처럼 4.3 사건을 이미 종료된 과거의 역사가 아니라 피해자에게 지속적으로 고통을 가하는 현재적 사건으로 증언하는 경우이다. 이때 기억은 과거 자체라기보다 현재와의 관계 속에서 재구성되는 오늘의 전사이다. (338p)
제주도 출신 작가 현기영의
<바람 타는 섬>을 읽고 그의 작품 중에 읽고 싶었던 <순이 삼촌>을 안타까운 과거를 떠올리며 봤다. 이 책에는 <순이 삼촌> 외에도 현기영 작가의 중단편집 총 10개가 포함되어 있다. 4.3 사건에 관련된 <순이 삼촌>, <도령마루의 까마귀>, <해룡 이야기>가 있고 나머지도 시대비판적이며 심리적인 묘사가 많은 소설이다.
제주도민들에게 4.3사건은 엄청난 재난이었지만
육지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공산주의자들의 반란 정도로 알려지고 4.3 사건에 대해 언급하는 것은 자제되었다. 이런 분위기를 깨고 현기영은 <순이 삼촌>을 통해 당시 토벌대가 주민들을 어떻게 다뤘는지 잘 보여주고 있다.
암울했던 시대에 작가는 소환되었고 책은 금서로 지정되었다.
안타까운 우리의 현대사다. 4.3 사건에 대해 다룬 한강의 <작별하지 않는다>도 읽어봐야겠다. 10개의 소설 모두를 정리하기 보다는 책에서 인용한 부분에 대한 짧은 생각을 덧붙여 포스팅한다.
https://bandiburi-life.tistory.com/2096
부정이란 그 규모가 크면 클수록 부정의 탈에서 벗어나는가? 그렇다. 도둑도 좀도둑이 훨씬 도둑답다. 그것이 대담해져서 명화적쯤 되면 이미 도둑의 탈은 벗겨지는 법. 부정이란 것도 좀스럽고 쩨쩨한 구석이 있어야 진짜 부정이지, 쥐가슴 태우며 훔쳐내는 쌀 한 톨, 실 한가닥은 부정이지만 환곡미 이백석 횡령은 이미 부정이 아니었다. 그건 백성들의 상상을 훨씬 능가해 버린 것, 손에 잡히지 않는 막연한 추상이었다. 그건 이미 부정이 아니라 지체 높은 권세였다. 큰 부정일수록 이렇게 모두 환골하고 탈태하여 나라 경영의 대종을 이루었던 것이다. - <소드방놀이> (28p)
2023년 대한민국의 현실은 오늘만의 문제가 아니라 과거에도 마찬가지였다. 권력을 가진 자들은 몇 백억을 횡령해도 법망을 피할 수 있지만 일반 시민들은 몇백 원 가지고도 법의 영향을 받는다. 어쩌면 이렇게 역사가 반복될까 싶다. 선진국 수준의 삶을 살고 있는 시대에 사법 시스템도 공정하게 모든 국민에게 적용되길 기대한다.
누가 뭐래도 그건 명백한 죄악이었다. 그런데도 그 죄악은 삼십 년 동안 여태 단 한 번도 고발되어 본 적이 없었다. 도대체가 그건 엄두도 안 나는 일이었다. 왜냐하면 당시의 군 지휘관이나 경찰 간부가 아직도 권력 주변에 머문 채 떨어져 나가지 않았으리라고 섬사람들은 믿고 있기 때문이었다. 섣불리 들고 나왔다간 빨갱이로 몰릴 것이 두려웠다. 고발할 용기는커녕 합동위령제 한번 떳떳이 지낼 뱃심조차 없었다. 하도 무섭게 당했던 그들인지라 지레 겁을 먹고 있는 것이었다. 그렇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고발이나 보복이 아니었다. 다만 합동위령제를 한번 떳떳하게 올리고 위령비를 세워 억울한 죽음들을 진혼 하자는 것이었다. - <순이 삼촌> (87p)
4.3 사건이 왜 알려지지 않았는지 잘 정리되어 있다. 군대와 경찰 조직 내에 4.3 사건의 주동자들이 여전히 남아 있기에 섣불리 나섰다가 과거의 악몽 같은 피해를 다시 당하는 것이 두려웠던 것이다. 우리 사회의 기득권 층에 있는 자들이 자신의 노력이 아닌 부모나 조부모의 조력을 받은 사람들이 많다고 본다. 그리고 그런 부모나 조부모는 친일이나 시대에 부역자들인 경우가 있다. 서글픈 우리의 자화상이다.
같은 섬 동포 갑죽 벗기기를 흉년에 송깃대 벗기듯 하던 것들이 새 나라 경관 노릇을 하고 있으니 오죽헐 거여? 일본기로 태극기를 맹그는 거나 일본 순사 출신을 대한민국 경찰로 맹그는 거나 매한가지가 아니냔 말이어! - <도령마루의 까마귀> (101p)
일제 강점기의 순사가 경찰이 되고 당시에 독립운동가들을 잡아들이던 사람들이 군대의 요직에 앉았다. 늘 비판받는 부분이지만 여전히 그들의 후손은 잘 살고, 나라를 위해 헌신한 자들의 자손은 궁핍한 삶을 살고 있는 경우가 많다. 바로잡아야 할 우리의 역사현실이다.
이 난세엔 아이는 자라서는 안된다. 나이 먹어서도 안되어. 젊은 나이가 죄요 원수인지라 반드시 총 맞거나 죽창 맞아 죽는 날이 오는 법이다. -<도령마루의 까마귀> (105p)
4.3 사건이 젊은 사람들에게 얼마나 큰 위협요인이었는지 알 수 있다. 차라리 자라서는 안된다고 할 정도다.
고아원 밥이 부족해서 노상 배곯는 줄 잘 아는 할아버지는 집에서 쪄 가져온 고구마를 먹이고, 나무 판 돈에서 몇 푼을 손에 쥐여주곤 했다. 그러면서 "널랑 크거든 꼭 군인이나 순경이 돼라, 이?"하고 다짐을 주는 것이었다. -<해룡 이야기>(158p)
군인이나 순경의 권세나 영향력이 얼마나 컸는지 할아버지의 말이 설명해 준다. 지금의 검찰 권력보다 크지 않았을까.
육지 중앙정부가 돌보지 않던 머나먼 벽지, 귀양을 떠난 적객들이 수륙 이천리를 가며 천신만고 끝에 도착하던 유배지. 목민에는 뜻이 전혀 없고 오로지 국마를 살찌우는 목마에만 신경 썼던 역대 육지 목사들. 가뭄이 들어 목장의 초지가 마르면 지체 없이 말을 보리밭으로 몰아 백성의 일 년 양식을 먹어치우게 하던 마정. 백성을 위한 행정은 없고 말을 위한 행정만이 있던 천더기의 땅. 저주받은 땅, 천형의 땅을 버리고 싶었다. 찌든 가난과 심한 우울증밖에는 가르쳐준 것이 없는 고향, 그것은 비상하려는 그의 두 발을 잡아끌어당기는 깊은 함정이었다. -<해룡 이야기> (159p)
제주도가 어떤 대우를 받았는지, 그리고 제주도에 부임한 관리들이 백성을 위한 목민이 아닌 자기 이익을 위한 행정을 했던 것을 보여준다. 얼마나 살기 힘든 섬인지 잘 요약했다.
피해자일 뿐인 어머니에 대한 이 가당찮은 반감은, 실은 마땅히 가해자한테로 향해야 할 분노가 차단된 데서 생긴 엉뚱한 부작용임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해룡 이야기> (163p)
백해무익한 중독성의 기호물로서 요새 신문은 결코 술담배에 뒤지지 않는다. 저속한 주간지 스타일의 선정주의로 전락한 지 오랜 일간지들, 여론을 선도하고 우둔한 독자를 준열히 꾸짖어야 할 언론이 오히려 독자의 천박한 기호에 영합하여 갖은 교언영색을 쓰며 구걸하는 꼴이라니! - <아내와 개오동> (184p)
2023년 언론의 모습이 이와 동일하다. 객관적인 사회 비판이 아니라 권력과 부를 가진 자들의 대변지가 되었다. 사회를 발전하기 위한 건전한 비판과 대안제시가 부재하다. 일부 인터넷 언론이 그 역할을 하고 있다.
기자로부터 이념과 명분을 빼버리니까 결국 홀가분한 봉급자만이 남았다. - <아내와 개오동> (192p)
1948년 제주도에서 벌어진 4.3 사건은 공식 역사에서 오랫동안 '공산폭동'으로 왜곡되었다. 엄청난 희생자를 양산하고 긴 세월을 이어오던 섬 공동체를 일거에 파괴시킨 4.3사건의 진실은 반공 이데올로기로 철저하게 은폐되어 왔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사건 이후 제주도는 '붉은 섬'으로 낙인찍혀 레드콤플렉스에 시달려야 했다. 제주도 사람들에게 4.3사건은 "수많은 사람들의 떼죽음과 행방불명, 되새기고 싶지 않은 온갖 고통과 오욕의 체험, 사건 종결 후에도 따라다닌 정치적 핍박과 소외, 그로부터 입게 된 크나큰 심리적 상처"(김영범 <기억 투쟁으로서의 4.3 문화운동 서설>)였다. (337p)
독서습관 788_순이 삼촌_현기영_2019_창비(231003)
■ 저자: 현기영
1941년 제주에서 태어나 서울대 영어교육과를 졸업했다. 197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단편 <아버지>가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한 이래, 제주도 현대사의 비극과 자연 속의 인간의 삶을 깊이 있게 성찰하는 성가작을 선보여왔다. 소설집으로 <순이 삼촌>(1979) <아스팔트>(1986) <마지막 테우리>(1994), 장편 <변방에 우짖는 새>(1983) <바람 타는 섬>(1989) <지상에 숟가락 하나>(1999) <누란>(2009), 수필집 <바다와 술잔>(2002) <젊은 대지를 위하여>(2004)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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