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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강의

[강의] 전통과 현대 수묵_소산 박대성 화백의 그림과 삶에 대해_포스텍 문명시민강좌(230914)

by bandiburi 2023. 9. 14.

소산 박대성 화백 (직접 촬영)

'소산 박대성 화백'이 주인공인 포스텍 문명시민강좌에 참석했다. 내가 모르는 수묵화의 세계에 대해 알 수 있는 좋은 기회라는 생각으로 신청했다.
학창 시절에 미술시간마다 필요한 물품을 준비해 가야 하는 것이 싫었다. 그래서 미술 과목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고, 그림과는 멀어진 삶을 살아왔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관심의 폭이 넓어지고 예술 분야에 대해서도 호기심이 늘었다. 마침 수묵화의 대가라고 하는 소산 박대성 화백의 그림과 삶에 대한 진솔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저녁 7시부터 9시까지의 2시간이 아주 짧게 느껴질 정도로 화가의 그림은 웅장했고, 삶은 파란만장했다. 
강좌의 주요 내용을 요약해서 포스팅한다. 

1. 도입부
미국 뉴햄프셔에 있는 다트머스대학교 미술사학과 김성림 교수가 박대성 화백에 대해 30분 정도 소개했다. 그녀는 마침 안식년 기간이라 참석할 수 있었다. 뉴햄프셔(New Hampshire)의 위치는 미국 동부의 제일 위쪽인 메인(Maine)주 바로 아래에 있다 (아래 사진의 붉은색 부분). 메인주는 랍스터로 유명하다고 한다. 미국 동부는 뉴욕 외에는 가본 적이 없어 좋은 정보다. 

뉴햄프셔 지도(붉은색 부분)(출처: Wikimedia Commons)

뉴햄프셔에는 큰 바위 얼굴이 있다. 아래 사진을 보면 정말 사람 얼굴같다. 구글에서 old man of the mountain으로 검색하니 많이 검색된다. <큰 바위 얼굴>은 1850년에 나다니엘 호손이 쓴 단편소설의 제목이기도 하다. 호손은 <주홍글씨>의 작가이기도 하다.

큰바위 얼굴 (출처: picryl)

김용이 2009년에 다트머스 대학교 총장이 되며 아시아인 최초로 아이비리그 총장이 되었다고 한다. 
박대성 화백의 그림은 'Ink and soul', 'ink reimagined'라는 이름으로 미국에서 순회전시회를 가졌다. 박대성 화백의 작품을 전시장에 설치하는 장면을 사진으로 보여주었다. 관람객은 세팅된 결과만 보지만 작품 하나하나를 배치하고 설치하는 과정도 큰 일이라는 점을 알 수 있었다. 
한국의 수묵화를 영어로 하면 Korean Ink Painting이다. 구글로 검색하니 많은 작품이 등장한다. 
미국에서 순회전시회를 마치고 수많은 미디어에서 박대성 화백의 작품에 대한 기사를 다뤘다. 


2. 박대성 화백 강의(저자의 입장에서 정리)
나는 1945년에 태어났다. 그림을 선택한 이유는 6.25(한국전쟁) 때 몸이 불편해졌기 때문이다.(나중에 그의 왼쪽 팔이 없는 것을 알았다). 당시 5살에 그림을 시작해서 일생을 그리게 되었다. 말년에 김성림 교수 등을 통해 미국에도 알려지는 등 팔자가 좋은 건지 안 좋은 건지 모르겠다. 돌이켜 보면 쉼 없이 지금까지 왔다. 제일 중요한 것은 꾸준히 하는 것이다. 재주보다도 중요하다. 
내가 과거에는 채색을 많이 해서 그렸다. 당시에는 먹고 살기 위해 채색을 쓰기 시작했다. 그래야 사람들이 사줬다. 경주에 와서 산지 20여 년이 되었다.


여행과 교육 현실
1988년 홍콩을 경유해서 12일 비자를 받아 중국을 갔다. 백두산에 갔더니 이미 10일 지났다. 당시 교포를 만나 더 있을 수 있는 방법을 물어 공작증을 위조했다. 위조한 것이 틀키면 사형이라고 했지만 죽더라도 가야겠기에 위장해서 다녔다. 중국 우루무치에서부터 갈지자로 중국 곳곳을 다녀왔다. 중국 오지에서의 삶은 당시 우리나라가 가난했다고 하지만 훨씬 열악했다. 석 달 열흘 만에 심천에 도착해 홍콩으로 나왔다. 오지와 산지를 다 돌아다녔다. 이것이 오늘의 밑바탕이 되지 않았나 싶다. 
한국으로 돌아와서는 산을 다니며 우리 풍경을 그렸다. 산수를 그리기 위해서는 히말라야를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집트로 가서 육로와 택시로 중동으로, 에게해를 거쳐 갔다. 북경에서 시안을 거치고 티벳을 거쳐 히말라야를 갔다. 아침 일찍 출발해 도착하면 깜깜하다. 7-8년을 했다. 

사람들이 모더니즘을 얘기하는데 설명이 안되어 물으니 뉴욕에 있단다. 가볼 수밖에 없다. 그림은 학벌이 통하지 않는다. 우리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내 마음이 부끄럽지않게 살았는가이다. 인간이란 마음을 잘 닦으면 잘 사는 거다. 삶은 바로 살아야 한다.

한국에서 내 그림의 위치를 모른다. 한국은 미성숙되어 있다. 한국화단에서 누가 최고 인기작가냐 할 때마다 늘 일등이었다. 하지만 일등을 해도 학벌이 안되니 문제였다. 이것이 한국의 문제다. 너무나 타락해서 국전이 없어지고 민전이 생겼다.

반면에 미국에서는 대접받게 됐다. 우리 한국인들의 재주는 기가 막힌다. 어디 가도 일등이다. 내려오는 환경이 있다. 나는 환경을 그려서. 한류는 시작에 불과하다. 미국에서 전람회 하면 외교관 부부가 동반으로 와서 사진 좀 찍자고 한다. 우리 문화가 대단하다. 현대사회는 교육이 잘못되어 있다. 한국화 전공이 대학에는 있는데 초중고에는 과목이 없다.

문화의 힘이 크다. 국악을 봐라. 우리는 글씨를 쓰다가 그림으로 변한 거다 심오함이 있다. 서양 재료는 독극물이 많다. 서구의 그림도구는 날카롭다.

손주들을 보면 뭔가를 많이 한다. 꼼짝 못 하게 바빠 스스로 생각할 여유가 없다. 흙을 만질 수 있는 아이로 키워야 한다. 흙은 인류의 모친이다. 흙을 가까이하면 건강하다. 나는 하루에 한 시간 맨발로 걸어 다닌다. 경주에 와서 건강을 많이 회복했다. 연세대병원장도 나의 건강을 보고 환경이 이렇게 중요한지 몰랐다고 한다. 

우리 자연이 참 좋다. 도시에서 뭐가 좋다고 있는가. 우리는 자연에서 살아야 한다. 나는 서울에서 팔당으로 그리고 경주로 10여 년마다 옮겨 살아왔다. 자연에서 얻어지는 게 많다. 

우리 병원은 너무 비싸다. 머리 좋다면 의사나 판검사가 되려고 한다. 돈도 좋지만 마음이 중요하다. 사기 치는 사람이 많다. 무간지옥에 갈 수 있다.


수상이력
1969부터 1978년 국전에서 8회 입선했다. 1979년 최초의 민전에서는 대상 없는 장려상을 공동수상했다. 24살에 국전에 입선하니 신문사에서 찾아오더라. 병신이 소발에 쥐 잡듯이 됐다고 하더라. 그래서 내리 8년 연속 입선했다.
중국멍(중국에 대한 꿈)이 있었다. 대만을 갔다. 세계 최대 박물관이 있었다. 다시 돌아오니 연속 낙선이다. 괘씸죄다. 주변에서 내지 말라는데 계속해서 작품을 냈다. 1979년 삼성 이병철이 국전을 능가하는 민전을 만들라고 해서 시작된 민전에서 첫해에 3명이 공동으로 장려상을 수상했다.


화풍의 변화

1987년부터 갑자기 화풍이 바뀌었다. 왜?
팔당에서 살고 있을 때였다. 밤에 누가 담을 뛰어넘어왔다. 중앙일보 세 사람이 창문을 두드렸다. 얘기를 나누니 당시 호암갤러리가 처음 생겼다. TBC를 회랑으로 만들었다. 서울대와 홍익대 사이에서 어부지리로 대박이라. 43살 때였다. 전시를 위한 조건이 있었다. 작품이 많이 팔려야 한다. 관객이 많아야 한다 등이었다. 호암갤러리를 10개월 만에 채워야 했다. 작은 그림으로는 어려워 광목에 커다란 그림으로 화풍을 바꿨다. 성공적으로 마친 후 이건희 씨가 소원을 들어주겠다고 해서 중국을 가고 싶다고 했다. 

중국에서 리커란(李可染 : 1907~1989) 작가를 만났다. 당시 그 어른은 72살이었다. 너무나 충격적인 그림을 그리셨다. 당시 병환 중이었다. 이역만리에서 당신을 만나기 위해 왔다고 해달라 요청했다. 마침내 15분 만나주겠다고 했다. 결국은 9시에 가서 식사시간을 고려해 12시가 되어 돌아왔다. 어떻게 하면 잘 그릴 수 있냐고 물었더니 리커란은 서예를 중심으로 하라고 조언했다. 시서화가 문인화의 삼절이라 했다. 일제강점기에 서예와 그림이 분리되었다. 리커란의 그림에는 시서화가 같이 있다. 그림과 글이 조화롭게 그리게 되었다. 
과거의 그림은 외눈박이다. 소화력을 키우려면 글씨를 써라. 10년 정도 하면 자신의 길을 찾을 수 있다. 꾸준히 하면 출세한다. 중국에서 행색은 거지처럼 보이지만 글씨 쓰는 것을 보면 고개가 절로 숙여진다.

박대성 화백과 김성림 교수가 그림을 배경으로 질의응답 중 (직접 촬영)


3. 질의응답
'작업실이 불편당이다. 불편함을 강조하고 있는데 불편과 예술활동의 관계가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설명한다. 팔이 하나 없는 것이 오늘의 나를 만들었다. 편리해서 전 세계가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다. 우리는 시간을 절약해야 한다. 서울 시절에 평창동에서 강남까지 오가는데 하루종일 걸렸다. 그래서 팔당으로 옮겼다. 중요한 것은 일상생활에서 편리보다 불편하려고 하고 절약해야 한다. 아이들에게도 본이 된다. 

모더니즘을 알기 위해 미국을 갔을 때였다. 중국분이 수채화를 그리는 수업이 있었는데 나는 먹의 농담으로 순식간에 그렸다. 이를 본 선생이 엑설런트 하다고 하며 잉크와 브러시가 어디에서 왔냐고 묻더라. 뭣도 모르는 것들이라 생각해서 바로 귀국했다. 
불국사에 가서 방을 구한 사연에 대한 이야기다. 주지에게 방을 하나 달라고 했더니 세 가밖에 없다고 하며 총무서에 확인해본다고 한다. 일이 이뤄지려면 참 묘하다. 총무서에 통화가 되어 일 년간 빌려주겠다고 했다. 결국은 내 그림으로 불국사를 전 세계에 선전하고 있다. 



오늘날 쓴다는 개념이 없어졌다. 글씨는 그림과 같은 것이다. 서법이 있다. 서법이 일상에 자유로움을 준다. 

성산일출봉 그림에 대한 질문에 대해. 성산일출봉 앞에 갈대가 있고 앞에 허름한 집이 한 채 있어 하룻밤 빌렸다. 바람이 워낙 세게 불어서 갈대가 바닥에 처박힐 정도였다. 시대를 알리기 위해 옆에 아파트도 그대로 그렸다. 

박대성 화백을 일상에 대한 질문에 대해. 화백은 새벽 4시에서 5시경 일어나 묵주기도를 드리고 냉수마찰을 한다. 그리고 글을 쓰시고 그림을 그린다. 오직 그림에만 관심을 둔다. 

글씨를 하려면 무엇부터 해야 하냐는 질문에 대해. 향현회라는 제자 모임이 있다. 글씨에 대해 매주 토요일 오전 10시에 경주 유림회관에서 가르친다. 기초는 영자팔법(永字八法)이다. 익숙해지면 사물로 옮겨가서 필법을 따라서 쓰면 저절로 그림이 그려진다.

사진을 보고 그린 것과 눈으로 보는 것이 다르다. 화백은 사진을 찍지 않고 실제를 보고 그린다. 현장에 갈 때 스케치를 많이 한다. 다른 작가들은 사진을 많이 사용한다. 스케치해온 것을 조합해서 그린다. 실경은 아니다. 주관적인 생각을 많이 불어넣는다. 

수묵화는 단숨에 그린다. 하지만 서양화는 여러 번 칠한다. 차이가 크다. 

왜 자연이 중요한가. 사막을 7, 8년 돌아다녀도 마음 한 구석 둘 곳이 없다. 우리 자연은 아름답고 풍요롭다. 사계절이 있다. 환경의 변화가 있다. 그런 면에서 우리는 축복받은 나라다. 계절을 민감하게 관찰한 결과다. 자기 몸을 관리할 줄 알아야 한다. 약국 병원이 너무도 많다. 자연 속에서 병을 호전된다는 것을 생각해 봐야 한다

솔거박물관에 기증도 많이 했다. 사람은 열려 있어야 한다. 신라시대 세계 4대 수도가 있었다. 로마, 이스탄불, 서안, 경주다. 오늘날 경주만 소도시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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