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십자군 전쟁의 영향과 고딕 미술을 이해할 수 있었다.
<난생처음 한번 공부하는 미술이야기 4권> 2부를 포스팅한다. 후반부를 읽으며 십자군 전쟁이 미친 영향과 고딕 미술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혔다. 책을 읽으며 얻은 지식을 가족들에게 설명해주고 공유했다. 새로운 지식이 머리에 정리되고 누군가와 나눌 수 있다는 것은 소소한 기쁨이다. 잘난 척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함께 나누고 싶은 마음이 절로 들기 때문이다. 그만큼 이 책은 잘 정리되었고 독자들에게 세계의 미술과 역사에 대한 이해를 돕는다.
십자군 전쟁은 교황의 야망에 의해 시작되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며 다양한 계층의 욕망이 반영되었다. 그리고 급기야 기독교인이 기독교인을 살인하는 지경에 이른다. 사람에 의해 벌어지는 모든 사건에는 동기가 있다. 개인적인 욕망이 동기가 되면 명분은 사라진다. 십자군 전쟁의 시작은 좋은 명분이 있었지만, 점차 욕망이 명분을 집어삼켰다. 긍정적인 영향도 미쳤다. 이슬람의 선진 문화를 습득하고 지중해를 중심으로 무역이 발달하며 베네치아와 피사와 같은 새로운 도시가 성장했다. 성전에서 패하면서 교황의 권위는 약해지고 왕권이 강화된다.
이 대규모 원정의 직접적인 계기는 비잔티움 제국 황제의 구원 요청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이슬람의 강자로 부상하던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에서 패한 비잔티움 제국은 그들이 콘스탄티노플까지 몰려올지도 모른다는 불안에 떨었거든요. 구원 요청을 받은 로마 교황은 비잔티움 제국을 돕는 것이 자신이 동로마 교회보다 우위라는 점을 확실히 할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습니다. (...) 교황 우르바누스 2세가 클레르몽 종교 회의에서 십자군 전쟁을 일으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장면을 묘사한 그림입니다. (200)
당시 이슬람은 세계 최고 수준의 수학과 천문학, 지리학과 의학 지식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에 더해 고대 그리스의 철학이나 과학 지식도 잘 보존돼 있었고요. (204)
교황은 자신의 권력을 극대화하기 위해 십자군 원정을 제안했습니다. 여기에 참가한 영주들은 십자군 전쟁을 통해 새로운 영토를 얻어서 나라를 세우고 싶어 했고요. 함께 나선 농노들 역시 이 기회에 속박에서 벗어나 자유를 얻고자 했습니다. 이처럼 다채로운 욕망이 뒤엉킨 가운데 상인 계층의 이윤 추구는 단연 노골적이었습니다. 이들은 십자군 전쟁을 새로운 장사의 기회로 보았어요. 1202년에 출정한 4차 십자군은 그 욕망이 가장 숨김없이 드러난 원정이었습니다. 이때 십자군이 콘스탄티노플에 쳐들어가서 같은 기독교도를 잔인하게 학살했거든요. (224~225)
십자군 원정이 실패했다는 게 명백해지자 교황의 권위는 크게 실추됐어요. (...) 이렇게 교황의 권위가 약해지자 종교로 똘똘 뭉쳤던 유럽 사회의 결속력은 느슨해졌습니다. (...) 십자군 원정을 계기로 지중해 무역이 살아나면서 유럽의 도시들이 상업적 부흥을 맞이하죠. 앞서 설명했듯 이탈리아 반도에 위치한 베네치아와 피사가 십자군을 통해 성장한 대표적인 도시입니다. (236)
- 고딕이란 르네상스 시대에 유럽 양식을 고트족의 양식이라고 부른 용어다.
저자의 설명을 들으며 고딕양식을 대표하는 특징을 가진 건물 여행을 떠났다. 약 9년 전에 이탈리아를 가족들과 방문한 적이 있다. 당시에는 10일이란 한정된 시간에 로마, 나폴리, 피렌체, 베네치아, 피사를 둘러보느라 주마간산 식으로 둘러봤다. 이 책을 보며 당시에 들렸던 건물을 다시 보게 된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처럼 피사에 들려서도 대성당과 세례당, 기울어진 석탑을 외부에서 보면서도 큰 감흥이 없었다. 다만 유명한 도시를 방문했다는 기억과 사진뿐이다. 책을 통해 미술을 보는 안목을 키웠기 때문이다.
책에서 고딕 성당의 시각적 특징과 함께 그레고리안 성가에 대해 설명한다. 웅장하긴 하지만 최근의 음악과는 동떨어진 종교음악으로 치부되는 면이 없지 않다. 하지만 돌로 이루어진 성당 내부에서 울려퍼지는 성가 소리를 듣는 중세 사람들을 상상해보면 다른 느낌이다. 그 웅장하고 장엄한 소리를 듣고 그들은 천국에 대한 소망으로 현실의 고난에 위로를 받았을 것이다.
고딕 성당의 신비로움은 높이와 스테인드글라스 같은 시각 효과에서만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고딕 성당의 진정한 매력을 꼽을 때 청각 효과를 빼놓을 수 없죠. (...) 중세에는 교회 내에서 악기를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악기는 이교도를 연상시켜 사악한 기운을 부른다고 생각했거든요. 대신 사람의 목소리만으로 찬송을 했습니다. (...) 이러한 성가 양식을 그레고리안 성가라고 합니다. 이 양식을 7세기 초반 교황인 그레고리우스 1세가 정리했기 때문에 그의 이름을 따서 부르죠. (251~252)
쉬제르의 적절한 벤치마킹으로 탄생한 생드니 대성당은 앞서 설명했듯 왕권이 강한 일드프랑스 전역으로 퍼져 나갔습니다. 그에 더해 일드프랑스 옆, 대주교들이 관할하는 지역 역시 왕권이 강하게 미치는 곳이었습니다. 대주교를 왕이 직접 임명했기 때문이죠. (...) 프랑스 왕권이 강해지고 왕의 직할지가 넓어질수록 고딕 양식이 넓게 퍼진 겁니다. (277)
사실 고딕이라는 용어는 고트족의 양식을 뜻합니다. 별로 좋은 뜻은 아니죠. 고트족은 로마를 멸망시킨 야만족의 상징이었기 때문에 고딕은 야만적이라는 단어와 동의어로 볼 수 있거든요. 중세 건축을 지칭하는 말로 고딕이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한 사람은 바자리라는 16세기 이탈리아의 비평가로 알려져 있습니다. (281)
고딕 건축에서는 첨두아치와 늑골 궁륭, 공중 부벽이 천장의 무게를 지탱했습니다. 자연히 로마네스크 양식에서 사용했던 두꺼운 벽은 필요 없어졌죠. 덕분에 창문이 점점 더 커지고 많아졌고 이 창들은 스테인드글라스로 장식되었습니다. (313)
전자처럼 넓은 판에 필요한 문양으로 구멍을 낸 형태는 널빤지 위에 모양을 뚫은 것 같다고 해서 '플레이트 트레이서리 plate tracery'라고 부릅니다. 한편 후자처럼 철사같이 가느다란 틀만 남긴 경우는 '바 트레이서리 bar tracery'라고 해요. (316)
어떤 방식을 쓰든지 당시에는 만들 수 있는 유리의 크기가 그다지 크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작은 유리 조각을 납 테두리 사이에 끼워 이어 나간 다음 철제 프레임 속에 넣어 고정시켰습니다. (325)
많은 사람들이 가장 아름다운 고딕 성당으로 꼽는 것이 바로 이곳 생트 샤펠입니다. 내부 천장 높이만 30미터에 이르는 이 성당은 프랑스 왕 루이 9세의 명령으로 지어졌습니다. 이곳에 가보면 왜 스테인드글라스를 빛으로 만든 성경이라고 부르는지 알 수 있습니다. 15개의 창 안에 천 개가 넘는 성경 이야기가 담겨 있거든요. 정확하게는 무려 1113개의 에피소드입니다. 창세기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까지 기독교의 역사를 전부 묘사했습니다. (327~329)
역사적으로 11세기 후반부터 유럽 곳곳에 진리를 탐구하는 대학들이 생겨났습니다. 그중 최초는 이탈리아의 볼로냐 대학이었죠. 볼로냐 대학의 설립은 1088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1158년에는 신성로마제국 황제에게 정식 대학으로 인정받지요. (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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