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동료애와 봉사 정신을 가지고 중증 환자들에게 귀를 기울이고 그들에게 다가가야 함을 다짐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스스로 선택한 적 없는 길을 가고 있으며 우리 모두가 결국엔 가야 할 길을 가고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22페이지)
우리는 불안과 두려움, 그리고 희망이 공존하는 생의 마지막 단계에 대해 좀 더 배울 수 있도록 환자에게 우리의 스승이 되어줄 것을 부탁했다. 부디 이 책을 통해 사람들이 '가망 벗는' 환자들을 회피하는 대신 그들에게 좀 더 가까이 다가가고, 마지막 시간에 그들을 도울 수 있기를 바란다. (25)
죽음을 앞둔 중증 환자들에 대한 세미나를 통해 그들의 심리가 부정, 분노, 협상, 우울, 수용의 단계로 진행된다는 것을 밝혀낸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의 명저인 <죽음과 죽어감>을 읽었다. 다양한 질병으로 시한부 판정을 받고 죽음으로 달려가는 환자들과 인터뷰를 하며 이들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세상에 알렸다. 이전까지만 해도 의사, 간호사, 목사 및 가족들이 중증 환자의 마음을 읽지 않고 단순 치료에 집중했다.
환자는 부정부터 수용의 단계를 거치며 자신과 주변과의 단절의 과정을 거친다. 그 과정에서 주변의 도움이 필요하다. 환자의 말을 들어주고, 그들의 필요를 읽고, 옆에 있어주는 것이 중요하다. 환자들은 남겨질 배우자와 자녀를 걱정한다. 자신을 인간적으로 가치 없는 존재로 취급하는 의사와 간호사에 대해 불만이 크다. 저자가 중증 환자들과 인터뷰를 통해 밝혀낸 진실은 이후 호스피스 활동의 계기가 되었다.
그러니까 선생님이 말하고 싶으신 건, 그 사람이 뭔가 가치 있는 존재일 수 있고, 가치 있는 일을 할 수만 있다면 그 삶은 살 만한 가치가 있는 삶이라는 거군요. (184)
나는 질병이 한 가족을 완전히 파괴하거나 가족들의 즐거움을 완전히 앗아가지 않는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 환자에게나 가족에게나 이롭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어쩌면 환자가 더는 존재하지 않을 때의 한 가정의 모습을 향해 서서히 적응하고 변화하는 과정일 수도 있다. (271~272)
우리 사회도 노년층이 급격히 증가하며 결혼식장이나 산부인과보다 요양원과 장례식장이 훨씬 늘어나고 있다. 부모와 자식이 원거리에서 사는 삶이 일상이 되었기에 노인들의 질병은 곧 자녀의 돌봄이 되기보다 병원이나 요양원의 역할이 되었다. 하지만 요양원에서 노인 환자를 대하는 수준은 천차만별이다. 대부분이 수익사업이다 보니 인간적인 대우보다 생산성을 앞세워 환자에 대한 인간적인 돌봄이 소홀하기 쉽다.
죽음을 앞둔 중증 환자들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요양원에서 기계적인 돌봄 속에 죽음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다. 익숙한 환경에서 사랑하는 가족들의 돌봄 속에서 임종을 맞이하는 것이다. 무리하게 산소호흡기를 부착하며 연명하는 것은 인간적인 자존감도 없이 가치 없는 존재로 전락할 뿐이다. 이 책에서 소개된 여러 인터뷰를 보면 모든 환자들에게 인간적 존엄과 삶의 끝까지 가치 있는 존재로 남고자 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런 측면에서 요양원보다는 호스피스 시설의 도움을 받아 가족과 함께 죽음을 맞을 수 있는 편이 좋다고 생각된다. 무엇을 위해 사는가라는 실존적인 질문에서 먼저 가는 자들을 편안하게 보내주고 세상에 자신의 가치를 유지하다가 마지막 길을 편안하게 가는 것이다.
위험을 파히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대신 위험에 처했을 때 두려워하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하게 하소서
고통이 사라지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대신 그 고통을 이겨낼 강인한 마음을 갖게 해달라고 기도하게 하소서
삶의 전장에서 함께 싸울 동지를 찾는 대신 나 자신이 힘을 지니게 해달라고 기도하게 하소서
불안한 마음으로 구원을 갈구하는 대신 내 힘으로 자유를 쟁취할 인내심을 갖게 하소서
오직 성공에서만 당신의 자비를 느끼는 겁쟁이가 되는 대신 실패에서도 당신의 손길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이 되게 하소서 - 라빈드라나트 타고르, <열매 줍기> (30)
환자가 나를 쳐다보았고 그 순간 나는 두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첫째, 환자가 비록 의사소통을 할 수는 없지만 자신의 주변 상황을 완전히 파악하고 있다는 것, 둘째, 비록 주위의 자극에 반응하지 않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함부로 환자를 식물인간으로 취급해서는 안 된다는 잊을 수 없는 교훈이었다. (277)
죽어가는 환자의 포괄적 간호(total care)로 유명한 의사 중 한 사람인 시슬리 손더스가 처음에는 간호사로 출발해서 지금은 시한부 환자를 위해 특별히 설계한 병원에서 시한부 환자를 돌보고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396)
어쩌면 그보다 더 중요할 수도 있는 또 한 가지 측면이 있다면, 그것은 그들이 하는 얘기가 누군가에게 중요할 수도 있고 의미심장할 수도 있다는 느낌이다. 이제는 지상에서 누구에게도 쓸모없다고 생각하고 있던 터에, 환자들은 누군가를 위해 봉사하는 듯한 느낌을 갖는다. (414)
■ 저자: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 Elizabeth Kubler - Ross(1926~2004)
인간의 죽음에 대한 연구에 일생을 바쳐 미국 시사 주간지 <타임>이 '20세기 100대 사상가' 중 한 명으로 선정한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는 1926년 스위스 취리히에서 세쌍둥이 중 첫째로 태어났다. 자신과 똑같은 모습의 다른 두 자매를 바라보면 일찍부터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을 시작한 그녀는 '진정한 나는 누구인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존재인가?'라는 질문을 평생 놓지 않았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열아홉의 나이로 자원봉사 활동에 나선 엘리자베스는 폴란드 마이데넥 유대인 수용소에서 인생을 바칠 소명을 발견한다. 그곳에서 죽음을 맞이해야 했던 사람들이 지옥 같은 수용소 벽에 수없이 그려놓은, 환생을 상징하는 나비들을 보고 삶과 죽음의 의미에 대해 새로운 눈을 뜨게 된 것이다. 취리히 대학에서 정신의학을 공부한 그녀는 미국인 의사와 결혼하면서 뉴욕으로 이주한다. 이후 뉴욕, 시카고 등지의 병원에서 죽음을 앞둔 환자들의 정신과 진료와 상담을 맡는데, 의료진이 환자의 심박 수, 심전도, 폐 기능 등에만 관심을 가질 뿐 환자를 한 사람의 인간으로 대하지 않는 것에 충격을 받는다. 그녀는 앞장서서 의사와 간호사, 의대생들이 죽음을 앞둔 환자들의 마음속 이야기를 들어주는 세미나를 열고, 세계 최초로 호스피스 운동을 의료계에 불러일으킨다. 그리고 죽어가는 이들과의 수많은 대화를 통해 '어떻게 죽느냐?'라는 문제가 삶을 의미 있게 완성하는 중요한 과제라는 깨달음에 이른다. 그녀가 시한부 환자 5백여 명을 인터뷰하며 그들의 이야기를 담아 써낸 <죽음과 죽어감 (On Death and Dying)>은 전 세계 25개국 이상의 언어로 번역될 만큼 큰 주목을 받았고, 그녀는 '죽음' 분야의 최고 전문가가 된다. 이후 20여 권의 중요한 저서들을 발표하며 전 세계의 학술 세미나와 워크숍들로부터 가장 많은 부름을 받는 정신의학자가 된 그녀는 역사상 가장 많은 학술상을 받은 여성으로 기록된다.
그녀는 죽음에 관한 최초의 학문적 정리를 남겼을 뿐만 아니라, 삶에 대해서도 비할 바 없이 귀한 가르침을 이야기했다. 그리고 죽음에 이르는 순간까지 그 가르침을 전하며 살았다. 그녀는 2004년 8월 24일 눈을 감았다.
'독서습관' 카테고리의 다른 글
[653]기탄잘리_타고르의 아름다운 시와 삶의 이야기 (0) | 2022.11.14 |
---|---|
독서652_무심한 듯 씩씩하게_좌충우돌의 20대 그리고 두 아이의 엄마가 된 작가 이야기_김필영_2021_을유문화사(221114) (1) | 2022.11.14 |
독서650_역행자_돈 시간 운명으로부터 완전한 자유를 얻는 7단계_자청_2022_웅진지식하우스(221111) (1) | 2022.11.10 |
독서649_식스웨이크 Six Wakes_클론으로 행성간 우주 여행 상상_무르 래퍼티_2019_아작(221109) (0) | 2022.11.09 |
독서648_루시퍼 이펙트_무엇이 선한 사람을 악하게 만드는가_필립 짐바르도_2010_웅진지식하우스(221107) (0) | 2022.11.07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