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자 : 에리히 프롬 Erich Fromm, 1900~1980
독일 프랑크푸르트 암마인의 유태인 가정에서 태어난 에리히 프롬은 정신분석학자이며 사회학자, 사상가이다. 프랑크푸르트 대학과 하이델베르크 대학을 졸업한 후, 1929년부터 1932년까지 프랑크푸르트 사회조사연구소의 강사로 있었다. 나치스가 대두하자 1934년 미국으로 망명, 귀화하여 이후 컬럼비아 대학과 베닌튼 대학을 거쳐 1952년 멕시코 국립대학 정신분석학 교수가 되었다. '근대인에 있어서의 자유의 의미와 추구에 사색활동의 전부를 바친 그는, 사회구조의 변혁과 인간의 심리적 해방을 연동시키는 '인간주의적 정신분석'을 추장, 신 프로이트 학파의 이론적 지도자로 활약하였다. 저서로는 <자유로부터의 도피>, <건전한 사회>, <혁명적 인간>, <사랑의 기술>, <소유냐 존재냐> 등이 있다.
● 소감
좋은 책은 독자에게 생각할 기회를 줍니다. 이 책 <소유냐 존재냐>는 김민식 피디가 큰 인상을 받았다고 하기에 읽게 되었습니다. 나 자신의 소비사회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가지고 무소유의 삶을 지향하고 있기에 이 책은 공감되는 부분이 많았습니다. 내가 막연하게 생각하고 있는 부분들을 체계적으로 에리히 프롬에 잘 정리해 주었다는 생각입니다. 물론 나 자신이 대사상가와 동등하다는 것이 아니라 크게 공감한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빈부격차가 커지고, 서울의 아파트값이 10억을 넘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지는 시대입니다. 우리의 걷는 속도는 여전히 시속 3~5km 수도권의 집값은 30km의 속도록 달려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신혼부부, 예비부부, 취준생들이 좌절하고 있는 시대입니다. 이럴 때일수록 자신의 생각을 가져야겠습니다.
에리히 프롬은 반 세기 전의 사상가이지만 그가 생각했던 것은 여전히 우리에게 시사점을 던져주고 있습니다. 2020년 설 연휴 중에 인도네시아 보르네오섬의 자연을 보여주는 프로를 봤습니다. 처음 보는 다양한 동물들의 서식처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자연을 있는 그대로 즉 '존재'로 보지 않고 '소유'하고자 욕망의 대상으로 보아 난개발로 인해 오랜 기간 동안 형성된 자연이 사라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우리는 생각해야 합니다. 소비를 부추기는 사회에서 늘 '왜'라는 질문을 던지고 대화하고 자신의 생각을 날카롭게 해야 합니다. 1976년에 출간된 이 책은 에리히 프롬이 말년에 지은 책으로 소설처럼 쉽게 읽혀지는 책은 아니었습니다. 20대에 읽었다면 더욱 어렵게 느껴졌을 것 같습니다.
역사, 종교, 경제 및 사회 등에 대한 배경지식이 있다면 제미있게 읽을 수 있는 책입니다. 스터디 교재로 활용해 토론 책으로 활용해도 좋겠습니다. 이미 40년 전의 내용이라서 경제사회학적으로 현재와 약간의 차이는 있겠지만 '소유양식'과 '존재양식'에 대한 통찰을 이해한 것만으로도 책을 읽은 보람이 느껴집니다.
특히 죽음에 대해 에피쿠르스가 한 말은 우리가 죽음에 대해 지나치게 두려움을 가지고 있구나라는 강한 공감이 되었습니다. 100%를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좋은 책은 도전할 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 책에서 발췌
9페이지) 프롬은 이 책에서 인간생존의 두 가지 양식, 즉 재산. 지식. 사회적 지위. 권력 등의 '소유'에 전념하는 '소유양식'과 자기 능력을 능동적으로 발휘하며 삶의 희열을 확신할 수 있는 '존재양식'을 구별하고 있다. (중략) 고도로 산업화된 현대사회에서는 '소유양식'이 자명한 전제가 되고 '존재양식'을 능가하는 점에 문제가 있음을 지적하고 있으며, 후반부에서는 이러한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한 새로운 사회상과 인간상을 제시하고 있다. (중략)
'소유'는 현대 산업사회에 있어서 기본적인 생존양식이며, 우리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으로 자기의 가치, 자기의 주체성, 혹은 자기의 존재를 증명하는 데 익숙해졌다. 이러한 관계는 물건뿐 아니라 인간, 지식.관념.신, 나아가서는 건강이나 질병에까지 미치고 있다. 그것은 주체와 객체를 '물건'으로 환원시켜 버리기 때문에 그 관계는 살아 있는 관계가 아니라 죽은 관계이다. 따라서 그것은 끝없는 생산과 끝없는 소비라는 악순환을 낳게 되고 우리는 만성의 기아상태에 빠진다.
10) 이에 반해서 '존재'는 아무것에도 집착하지 않고 아무것에도 속박당하지 않고 변화를 두려워하지도 않고 끊임없디 성장하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의 고정된 형식이나 태도가 아니라 유동하는 과정이며, 타자와의 관계에서는 주고, 나누어 갖고, 관심을 함께 가지는 살아 있는 관계가 된다.
19) 그리고 그것은 상류계급 및 중류계급에만 해당되는 것이었지만 이들의 성취를 본 다른 계급의 사람들도 산업화가 지금의 속도로 존속하는 한, 새로운 자유가 마침내 모든 구성원에게 미치리라는 신념을 가질 수가 있었다.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는 '새로운' 사회와 '새로운' 인간을 목표로 하는 운동에서 재빨리 모습을 바꾸어 모든 사람의 부르주아적 생활을 이상으로 하고 미래의 남녀로서의 '보편화된 부르주아'를 이상으로 하는 운동이 되었다. (중략)
자기 생활의 독립된 주인이 된다는 꿈은 우리 모두가 관료제란 기계의 톱니 바퀴가 되어 사고도 감정도 기호도 정치와 산업 및 그것들이 지배하는 매스 커뮤니케이션에 의해 조작되고 있다는 사실에 우리가 눈뜨기 시작했을 때 끝나버린다.
20) 알베르트 슈바이처가 노벨 평화사(1952)을 수상하기 위해 오슬로를 방문했을 때, 그는 세계에 다음과 같이 호소했다. "과감히 현상에 직면하라.... 인간은 초인이 되었다... 그러나 초인간적인 힘을 지닌 이 초인은 초인간적인 이성의 수준에까지 이르지는 못했다. 그의 힘이 커짐에 따라 점점 그는 가련한 인간이 된다... 초인이 되면 될수록 자기 자신이 비인간적으로 된다는 사실에 우리는 각성해야만 한다."
21) 그러나 그 지식만으로도 아리스팁포스가 유일한 진짜 쾌락주의자였다는 것이 충분히 입증된다. 그에게 있어서는 욕망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그것을 충족시키고, 나아가서는 인생의 목적인 '쾌락'을 실현할 권리의 근거가 되고 있다.
22) 그들 사고의 기본적인 요소는 주고나적으로만 느껴지고 그 충족이 순간적 쾌락만을 가져다주는 요구(욕구)와, 인간 본성에 뿌리박고 있고 그 실현이 인간의 성장에 기여하며, 즉 '복리'를 가져오는 요구를 구별하는 일이다. (중략) 인생의 목적은 모든 인간적 욕망의 충족에 있다는 이론은 17세기 및 18세기의 철학자들에 의해 아리스팁포스 이래 처음으로 분명히 표명되었다. 그것은 '이익'이 '영혼을 위한 이익'이 아니고 물질적.금전적 이익을 의미하게 되었던 시대, 중류계급이 그 정치적 굴레뿐만 아니라 사랑과 연대의 모든 유대까지 벗어 던져버리고 단지 '자신만을 위하는 것'이 더욱 자기 자신답게 되는 것이라고 믿게 된 시대에 쉽사리 생겨날 수 있는 개념이었다.
23) 귀족들이 철학의 기반 없이 관습으로 삼아온 것이 시민계급의 관습과 이론이 되어버린 것이다. (중략)
한편에는 일관작업의 벨트 컨베이어와 관료제적인 일과가 있고, 다른 한편에는 텔레비전.자동차.섹스가 있어 이 모순된 조합을 가능케 하고 있다. 일에 대한 집념만으로는 완전히 게으름을 피우는 경우와 마찬가지로 사람들은 미치고 말 것이다. 이 조합이 있음으로써 그들은 살 수가 있다.
24) 고독하고, 불안하고, 억울하고, 파괴적이며, 남에게 의지하는 사람들, 그렇게 아끼려고 애쓰는 시간을 한편에서 낭비하며 기뻐하는 사람들이 바로 우리들이다.
25) 소유에 대한 정렬은 틀림없이 계급투쟁을 가져올 것이다. 공산주의자는 그들의 체제가 계급을 폐지함으로써 계급투쟁을 종식시킨다고 말하고 있지만 그것은 허구이다. 왜냐하면 그들의 체제는 생활의 목적을 한없는 소비원리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26) 이 경제체제의 발전은 이제 "무엇이 인간을 위해 좋으냐?"하는 질문에 의해 결정되지 않고 "무엇이 체제의 성장을 위해 좋으냐?" 하는 질문에 의해 결정되게 되었다.
28) 매라로빅과 페스텔의 결론에 의하면 이러한 경제적 변혁은 "이를테면 새로운 윤리와 자연에 대한 새로운 태도와 같은 인간의 가치와 태도에 근본적인 변혁이 일어날" 경우에 비로소 가능하다는 것이다.
40) 테니슨의 꽃에 대한 관계는 소유- 물질의 소유가 아니고 지식의 소유 - 양식에 속한다. 바쇼 및 괴테의 꽃에 대한 관계는 존재양식에 속한다.
'존재'라는 말로 나는 어떤 것을 '소유'하지도 않고 또 '소유하려고 갈망하지도' 않으면서 즐거워하고 자기의 재능을 생산적으로 사용하며 세계와 '하나가 되는' 삶의 양식을 표현하고 있다.
41) 서구인들이 선과 같은 동양적 체계를 충분히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현대의 '인간'이 재산과 탐욕을 중심으로 하고 있지 않은 사회의 정신을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42) 그러나 능동성을 명사와 결부시켜 '소유하다'라는 말로 표현하는 것은 언어의 오용이다. 왜냐하면 과정과 능동성은 소유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다만 경험될 뿐이기 때문이다.
46) 이 사실은 '갖는다'는 말이 사유재산의 발달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발전되었으며, 재산의 기능성이 지배적인 사회, 즉 사용하기 위해 소유하는 사회에서는 그 말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시사해 주고 있다.
49) 존재가 영속적, 항구적 그리고 불변의 실체이며, 생성과는 반대라고 보는 입장은 파르메니데스, 플라톤 그리고 스콜라 학파의 '실재론자들'에 의해 표명되었는데, 이것은 사고(관념:idea)가 궁극적 실재라는 관념론적인 견해에 바탕을 두어야만 비로소 의미를 갖는다.
52) 현대의 소비자들은 다음과 같은 공식으로 자신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존재한다=내가 가지고 있는 것 및 내가 소비하는 것.'
54) 삶의 소유양식에 젖어 있는 학생들은 귀를 기울여 강의를 듣고, 그 말의 논리적 구조와 의미를 이해하며, 가능한 한 그 말을 모두 그들의 루스리프식 노트에 적는다- 후에 필기한 것을 암기하여 시험에 합격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그러나 그 내용이 그들 자신의 개인적인 사상체계의 일부가 되어 그것을 풍요롭게 하거나 확장시키진 못한다. (중략)
실제로 소유를 세계와 관계를 맺는 주요한 형태로 삼고 있는 사람에게는 쉽게 핀으로 고정(혹은 펜으로 고정)시킬 수 없는 관념은 두려운 것이다- 성장하고 변화하며, 따라서 지배할 수 없는 다른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학습의 과정은 세계에 대하여 존재양식으로 관계를 맺고 있는 학생들에게 있어서는 전혀 다른 특질을 가지고 있다. 우선 그들은 일련의 강의에, 설령 그것이 첫번째 강의라 할지라도 백지상태(tabula rasa)로 출석하지는 않는다. 그들은 그 강의가 다룰 문제를 미리 짐작하고 있기 때문에 그들의 머리 속에는 그들 나름의 어떤 의문과 문제가 있다. 그들은 그 제목에 대해서 충분히 생각했기 때문에 그것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58) 현대사회를 살고 있는 사람들이 기억할 필요가 있는 허다한 데이터를 고려한다면 노트 속에 어느 정도의 기록과 정보를 저장한다는 것은 불가피한 일이다. 그러나 기억하기를 기피하는 경향이 납득할만한 정도를 넘어서고 있다. 기억하기 위해 적어놓는 행위가 우리의 기억능력을 감퇴시킨다는 사실은 우리 자신을 돌아봄으로써 쉽게 또 가장 잘 관찰할 수 있다.
59) 무엇보다 이러한 사실은 읽고 쓰는 능력이란 결코 널리 선전되고 있는 것과 같이 바람직한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시사하고 있다.
61) 소유형의 사람들은 그드이 '가지고' 있는 것에 의존하는 반면, 존재형의 사람들은 그들이 '존재한다'는 사실, 살아 있다는 사실 그리고 억제를 버리고 반응할 용기만 가지면 어떤 새로운 것이 탄생하리라는 사실에 의존한다.
62) 그들이 결말을 알았을 때 그들은 마치 자신의 경험에서 그 결말을 찾아낸 것처럼 현실적인 전체 스토리를 '소유'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의 지식을 늘리지는 못한다. 소설 속의 인물을 이해하지 못하며, 따라서 인간성에 대한 자신의 통찰력을 심화시키지 못할 뿐 아니라 그에 대한 지식조차도 얻지 못하는 것이다.
63) 그들이 배우지 않는 것은 이러한 종류의 재산적 지식을 초월한 것이다. 그들은 철학자에게 질문하고 그들과 말하는 법을 배우지 않는다. 그들은 철학자 자신의 모순과 그들이 어떤 문제를 무시하거나 쟁점을 회피하고 있는 것을 알아차리는 법도 배우지 않는다.
65) '존재' 권위(being-authority)는 한 개인이 어떤 사회적 기능을 수행할 수 있는 능력에 바탕을 두고 있을 뿐 아니라 고도의 성장과 통합을 달성한 퍼서낼러티의 본질 그 자체에도 바탕을 두고 있다.
68) 인식은 우리의 일상적인 감각적 지각의 기만성을 깨닫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그 의미는 우리들이 보고 있는 물질적 현실세계의 모습이 '참으로 현실적인' 것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인데, 그 주된 의미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반은 깨어 있고 반은 꿈꾸고 있으며, 그들이 참되고 자명하다고 생각하는 것의 대부분이 그들이 살고 있는 사회의 암시적인 힘에 의해서 생긴 환상임을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69) 우리의 교육은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지식을 소유물로서 '갖도록' 훈련하는 데 애쓰고 있으며, 그 지식은 그들이 후일 갖게 될 재산, 혹은 사회적 위신의 양과 대체로 비례한다. 그들이 받는 것은 최소한 그들이 일을 하는 데 불편이 없을 만큼의 양이다.
71) 신념은 소유양식에 있어서는 확실성을 갖기를 원하는 사람들, 감히 스스로 찾아나서지 않으면서 인생에 대한 답을 원하는 사람들을 위한 하나의 지주이다.
73) 이러한 신념은 사실에 근거를 두고 있기 때문에 합리적이다. 그러나 이 사실들은 보통 행해지고 있는 실증주의적 심리학에 의해서 인식될 수 있거나 '증명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즉 살아 있는 인간인 나만이 그것들을 '기록' 할 수 있는 유일한 도구이다.
76) 대개의 경우 각자 상대방 속에서 변화의 원인을 찾으며 속았다는 느낌을 갖는다. 그들은 서로가 사랑할 때의 그들과 똑같은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지 못한다. 즉 사랑을 '소유'할 수 있다는 생각이 사랑하지 못하게끔 한 과오임을 알지 못한다. 이제 그들은 서로 사랑하는 대신에 그들이 가지고 있는 것, 즉 돈, 사회적 지위, 가정, 자식의 공동소유로 만족한다.
79) '수카(suka:장막)'는 방랑자들의 집이다. 그것은 천막에 해당하는 것으로 쉽게 지을 수 있고 쉽게 부술 수 있다. 탈무드에 정의되어 있듯이 그것은 살기 위한 '임시주거'이지 점유하는 '고정주거'가 아니다.
82) 오늘날의 일요일은 오락의 날이요, 소비의 날이며, 자기로부터 도피하는 날이다. 범세계적인 조화와 평화의 날로서, 또 인간 미래의 선행이 되는 인간적인 날로서 안식일을 회복할 때가 아닌가 하고 묻고 싶어진다.
85) 모든 것을 잃었으며, 그들에게 남겨진 것(집단으로서)은 오직 '존재'의 이상뿐이었다. 다시 말해서 알고, 배우고, 생각하고 그리고 메시아가 오기를 기다리는 일이었다. (중략)
그러나 대체로 그들은 부를 나쁘다거나 '존재'의 원리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비난하지는 않았다. (Louis Finkelstein의 <바리새인 The Pharisees>참조)
87) 실제로 초기 기독교는 가난한 사람들과 고통받는 사람들의 공동체였으며, 하나님의 구제계획에 따라 현행질서가 궁극적으로 소멸할 때가 왔다는 묵시록적 신념에 차 있었다.
88) 예수의 재림이 실현되지 않자 예수의 죽음과 부활은 복음서에서 새로운 긴 시대의 시작을 이루는 것으로 해석되었고, 콘스탄티누스 대제 이후는 예수의 중재적인 역할을 교황의 교회로 옮기려는 시도가 이루어졌다. 마침내 모든 실질적인 목적을 위해 교회가 - 이론적으로 그렇지 않았지만 사실에 있어서는 - 새로운 영겁의 시대에 있어서 예수의 대리역을 하게 되었다.
89) 악마는 물질적 소비와 자연 및 인간에 대한 힘의 대표자이다. 예수는 '존재'의 대표자요, 소유하지 않는 것이 '존재'의 전제가 된다는 사상의 대표자이다.
92) ~ 아퀴나스까지도 사유재산 제도는 그것이 모든 사람들의 복리를 달성한다는 목적에 잘 이바지할 경우에만 정당화된다고 결론짓고 있다. (중략)
에크하르트는 삶의 소유양식과 존재양식의 차이점을 어떤 교사도 능가할 수 없는 통찰력과 명석함을 갖고 서술하고 분석했다. 독일의 도미니크 수도회의 주요 인물이었던 에크하르트는 박식한 신학자였고, 독일 신비주의의 가장 위대한 대표자이자 가장 심오하고 가장 철저한 사상가였다.
96) 지식은 도그마의 특질을 띠어서는 안 된다. 도그마는 우리를 노예로 만들기 때문이다. 이것들은 모두 소유양식에 속한다. 존재양식에 있어서는 지식은 사고의 통찰적 능동성 - 확실성을 찾아내기 위해 결코 멈추어 서는 일이 없는 - 일 뿐이다.
97) 무엇보다도 우선 우리는 우리가 가진 물건과 행위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 이 말은 아무것도 소유하지 말아야 하고 아무 일도 하지 말아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이 말은 우리가 갖고 있는 것, 소유물에게, 심지어 신에게도 얽매이거나 속박당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99) "사람은 자기가 무엇을 '해야' 하느냐보다도 자기가 무엇'인'가를 생각해야 한다."
100) 소유양식을 타파하는 것이 모든 진정한 능동성의 조건이다. 에크하르트의 윤리체계에 있어서 최고의 미덕은 생산적인 내적 능동성의 상태이며, 그 전제는 모든 형태의 자아 속박과 갈망을 극복하는 일이다.
106) 오늘날에 와서는 보존보다는 소비가 강조되고 있으며, 구입은 '쓰고는 내버리는' 구입이 되었다. 산 물건이 자동차건 옷이건 소품이건 잠시 쓴 뒤에는 싫증이 나서 '낡은 것'을 처분하고 최신형을 사기를 열망한다.
108) 그것이 '능동성을 주는' 것일수록 그 자극성은 오래 유지되고 강도와 내용의 변화가 필요없게 된다.
113) 생존의 소유양식은 주체와 객체 사이의 살아 있는 생산적 과정에 의해서 확립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객체와 주체를 모두 '물건'으로 만들어버린다. 그 관계는 죽은 관계이며 살아 있는 관계가 아니다.
114) 그러나 교화, 보수, 징벌, 적당한 이데올로기 등의 복잡한 과정을 통해 이 과제는 대체로 아주 잘 해결되므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 자신의 의지대로 살고 있다고 믿고 있으며, 그들의 의지 자체가 조정되고 조작된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
115) 섹스를 억제하기 위한 이제까지의 노력이 섹스 자체만을 대상으로 한 것이라고 하면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섹스를 비방하는 이유는 성에 있지 않고 인간의 의지를 꺽는 데 있다. 이른바 수많은 원시사회에서는 섹스의 금기를 찾아볼 수 없다.
116) '어린이의 성장과정과 아동기 이후의 인간의 성장과정에 대한 타율적인 방해가 정신적 병리, 특히 파괴성의 가장 깊은 근원이다.'
117) 소유양식에서는 행복은 타인에 대한 우위 속에, 자기의 힘 속에 그리고 궁극적으론 정복하고 빼앗고 죽일 수 있는 자신의 능력 속에 있다. 존재양식에서는 행복은 사랑, 공유 그리고 주는 행위 속에 있다.
120) 프로이트의 발견에 의하면 이 시기는 가끔 사람의 발달과정을 줄곧 지배하며 그 경우에는 '항문애적 성격'의 발달을 가져온다고 한다. 즉 삶의 에너지를 주로 감정, 몸짓, 말, 정력뿐만 아니라 돈과 물건을 소유하고 절약하며 축적하는 데 쏟는 성격이다.
121) 프로이트에 있어서는 소유하는 것에만 전념하는 인물은 신경증적이며 정신적으로 병든 인물이다. 따라서 대부분의 구성원이 항문애적 성격을 가지고 있는 사회는 병든 사회이다.
123) 생존적인 소유는 '존재'와 충돌하지 않는다. 성격학적인 소유는 필연적으로 충돌한다. '정당'하고 '성스러운' 사람들일지라도 그가 인간인 한, 생존적인 의미에서 틀림없이 소유하기를 바란다.
124) 이 통찰에 찬 지식은 나 자신의, 혹은 타인의 정신구조를 이해하고 기술하는 데 크게 도움이 된다. 그러나 총체로서의 나, 나의 전개성, 나의 지문처럼 나만이 가지고 있는 나의 본질은 설사 감정이입에 의하더라도 결코 완전히 이해되지 않는다!
125) 존재양식에는 그 전제조건으로서 독립, 자유, 비판적 이성의 존재가 있다. 그 기본적 특징은 능동적이라는 것인데, 그것은 분주하다는 외면적 능동성의 의미가 아니라 자기의 인간적인 힘을 생산적으로 사용한다는 내면적 능동성의 의미이다.
127) 그들은 재산이라는 목발을 버리고서도 그들 자신이 가지고 있는 본래의 힘으로 혼자 걸을 수 있다는 것을 모른다. 그들을 주저하게 하는 것은 그들이 혼자 힘으로는 걸을 수 없으리라는 환상, 그들이 갖고 있는 물건에 의해 지탱되지 않으면 그들은 쓰러져버릴 것이라는 환상이다.
129) 소외되지 않은 능동성은 무엇인가를 생산하는 과정이며, 무엇인가를 생산하여 그 생산물과의 관계를 유지하는 과정이다. 이것은 또 내 능동성은 나의 힘의 현현이며 나와 능동성과 능동성의 결과는 일체라는 의미도 내포하고 있다. 나는 이 소외되지 않은 능동성을 '생산적 능동성'이라고 부른다.
130) 생산적인 사람들은 그들이 접하는 것이 무엇이든지 그것에 활기를 불어넣는다. 그들은 자신의 능력을 낳으며 다른 사람들이나 사물에 생명을 부여한다.
133) 그의 <윤리학Ethics>에서 스피노자는 능동성과 수동성(행하는 것과 겪는 일)을 정신작용의 두 가지 기본적 면으로서 구분한다. '행하는 것'의 첫째 기준은 행위가 인간성의 결과로서 나온다는 것이다.
134) 내가 아는 한, 스피노자는 정신적 건강과 질환이 각각 올바른 삶과 그릇된 삶의 결과라고 주장한 최초의 근대 사상가이다.
135) ~그러나 '실제로는' 탐욕과 야심 따위는 정신이상의 형태인 것이다. 보통은 사람들이 이것들을 '병'이라고 생각지 않지만" (중략) 주로 돈이나 소유나 명성에 대한 탐욕에 의해 움직이는 사람들을 정상적이고 잘 순응하고 있는 사람들이라고 보는 오늘날의 신조와는 대조적으로 스피노자는 그들을 매우 수동적이라고 근본적으로 병든 사람이라고 보고 있는 것이다.
136) 오히려 역사는 자기의 목적을 추구하는 인간의 능동성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성스러운 가족>)
141) 우리 인간에게느 존재하고 싶다는 욕망이 날 때부터 깊이 뿌리박혀 있다. 그것은 우리의 능력을 표현하고 능동성을 갖고 타인과 관계를 맺고 이기심의 감방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욕망이다.
142) (4)학습행동. 많은 연구가 보여주는 바에 의하면 아동과 청년이 나태해지는 것은 학습자료가 그들의 진정한 관심을 불러일으키지 못하고 무미건조하게 제공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만일 강제와 지루한 것이 없어지고 학습자료가 생생한 방식으로 제공된다면 놀랄만한 능동성과 창의가 동원되리라는 것이다.
145) 그들의 자녀들이 '원하는 모든 것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는 어른들의 기대와는 정반대로 그들은 생기 없는 고립된 생활에 반항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원하는 모든 것을 갖고 있지 않으며 그들이 갖고 있지 않은 것을 원하고 있기 때문이다.
148) 이런 고찰은 인간에게는 두 가지 경향이 있음을 지적하고 있는 것 같다. 하나는 '갖는' - 소유하는 - 경향이며, 그 강도의 근거는 궁극적으로는 생존에 대한 욕망이라는 생물학적 요인에 있다. 다른 하나는 '존재' - 나누어 갖고, 주고, 희생을 치르는 - 경향이며, 그 강도의 근거는 인간생존의 독특한 조건과 다른 사람과 일체가 됨으로써 자기의 고립을 극복하려는 생래의 요구에 있다.
153) 입센은 그의 작품 <페르 귄트Peer Gynt>에서 이 자기중심적 인물을 멋지게 묘사하고 있다. 주인공은 '자기 자신'의 일만으로 머리가 가득 차 있다. 그는 극단적인 자기중심주의에 의해서 '자기'는 '욕망의 덩어리'이므로 '자기자신'이라고 믿고 있다. 임종에 이르러서 그는 자기의 소유중심의 생활 때문에 자기 자신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자기는 알맹이가 없는 양파와 같은 존재였다는 것을, 한 번도 자기 자신이 아니었던 미완성의 인간임을 시인한다.
가지고 있는 것을 잃어버릴지도 모른다는 위험으로부터 생기는 걱정과 불안은 '존재양식'에는 없다.
157) 국민들 간의 조화로운 관계가 지속되는 상태로서의 평화는 소유구조가 존재구조로 대치되었을 때 비로소 가능하다.
158) 존재양식에서는 사적 소유(사유재산)에는 거의 정서적인 중요성이 없다. 왜냐하면 나는 무엇을 즐기기 위해서, 혹은 사용하기 위해서도 그것을 소유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164) 타락하지 않기 위해서는 우리는 '인간성의 전형(model of human nature)'에 접근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즉 우리는 완전히 자유롭고 합리적이고 능동적이어야 한다.
166) 사람들이 법을 존중하는 것은 두려움 때문만은 아니라 자기의 불복종에 대한 죄의식 때문이다. 죄의식은 권위 그 자체만이 부여할 수 있는 용서에 의해서 극복될 수가 있다. (중략)
그러나 사회는 영웅들로 이루어져 있는 것은 아니다. 식탁이 소수에게만 마련되고 다수는 소수의 목적에 봉사하면서 찌꺼기로 만족해야 하는 한, 불복종은 죄라는 의식을 양성해야만 했다. 국가와 교회는 함께 그것을 양성했고, 양자는 모두 자체의 계급조직을 지켜야만 했기 때문에 협력했다. 국가는 불복종과 죄를 융합시키는 이데올로기를 얻기 위해 종교를 필요로 했다. 또한 교회는 국가가 복종의 미덕을 갖도록 훈련시킨 신자들을 필요로 했다. 양자 모두 가족제도를 이용했는데, 그 기능은 아이가 그 독자적 의지를 처음 보이는 순간부터 복종을 가르치는 것이었다.
167) 즉 죄는 비합리적인 권위에 대한 불복종이 아니라 인간의 '복리'를 침해하는 것이다.
168) 즉 남자와 여자가 서로를 완전히 대했지만 그들은 부끄러워하지 않았고 부끄러워할 수도 없었다. 그 이유는 그들은 서로를 타인으로, 분리된 개인으로 경험하지 않고 '하나'로 경험했기 때문이다.
169) 카톨릭 신학에서는 서로 완전히 분리되고 격리되어 사랑에 의한 어떠한 중개도 존재하지 않는 이 상태가 바로 '지옥'이라고 정의되고 있다.
173) 진정으로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려면 오직 한 가지 방법 - 불타, 예수, 스토아 학파의 철학자들, 마이스터 에크하르트가 가르친 방법 - 밖에 없다. 그 방법은 '생명에 집착하지 않는 것, 생명을 소유물로 경험하지 않는 것'이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얼핏 삶의 정지에 대한 두려움처럼 보이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죽음을 우리와 관계가 없다고 에피쿠로스는 말했다. "왜냐하면 죽음은 우리가 존재하는 동안은 우리 곁에 없으며, 죽임이 닥쳐왔을 때는 이미 우리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174) 어떻게 죽을 것인가에 대한 가르침은 실제로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가르침과 똑같은 것이다. 모든 형태의 소유에 대한 갈망, 특히 자아의 속박을 버리면 버릴수록 죽음에 대한 공포는 더욱 약해진다. 잃어버릴 것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중략)
존재양식은 지금, 여기에만 존재한다. 소유양식은 다만 시간 속에서만, 즉 과거, 현재, 미래 속에만 존재한다.
176) 산업사회에서는 시간이 최고의 지배자가 된다. 현재의 생산양식은 모든 행위가 정확하게 '시간대로' 진행되기를 요구한다.
182) 한 사회의 사회 경제적 구조는 그 구성원이 '해야만' 하는 일을 '하고 싶어' 하게끔 그들의 사회적 성격을 형성한다. 그와 동시에 사회적 성격은 사회의 사회경제적 구조에 영향을 미치고 사회구조에 더 확고한 안정성을 부여하는 시멘트로서 작용하든가, 아니면 특별한 경우에는 사회구조를 때려부수는 데 도움이 되는 다이너마이트로서 작용한다.
184) 문제는 '종교냐 아니냐'가 아니라 '어떤 종류의 종교냐' - 인간의 발달과 특히 인간적인 힘의 결실을 촉진하는 종교냐, 아니면 인간의 성장을 마비시키는 종교냐 - 이다.
193) 지금 말한 것이 모두 진실이라면 어째서 유럽인과 미국인은 현대에 어울리지 않는 기독교를 깨끗이 포기하지 않는가? 여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예를 들면 사람들이 규율을 잃고, 나아가서는 사회적 결합을 방해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 종교적 이데올로기가 필요하다. 그런데 더 중요한 이유가 있다. 즉 위대한 박애자인 동시에 자기를 희생하는 신으로서의 그리스도를 굳게 믿는 사람들은 이 신앙을 소외된 형태의 경험으로 바꾸어 '자기들을 대신하여' 사랑해 주는 예수로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197) 기독교라는 가면을 앞에 쓰고 '산업종교'라는 새로운 '비밀' 종교가 일어났다. 그것은 현대사회의 성격구조에 뿌리를 두고 있지만 '종교'로서는 인정을 받고 있지 않다. 산업종교는 진정한 기독교와는 완전히 모순된다. 그것은 인간에게 인간 자신이 만든 경제와 기계의 노예가 되기를 강요한다.
199) 시장적 성격의 목적은 퍼서낼리티 시장의 모든 조건 아래에서 바람직한 인물이 되기 위한 완전한 순응이다. 시장적 성격의 퍼서낼리티는(19세기 사람들이 가지고 있었던 것처럼) 집착할 만한 자아조차 전형 '가질'수 없다. 다시 말하면 자기 자신의 고유한, 변하지 않는 자아를 소유할 수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당신이 원하는 바로 그 사람이오" 하고 이야기할 수 있도록 끊임없이 자신을 변형시킨다.
210) 마르크스는 이렇게 썼다. "사유재산은 우리를 너무나도 어리석고 편협한 인간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어떤 대상이 우리의 것이 되는 것은 단지 우리가 그것을 소유할 때, 그것이 우리의 자본으로서 존재할 때, 혹은 그것을 직접 먹고, 마시고, 입고, 그 속에 사는 등, 요컨대 어떤 방법으로 '이용할' 수 있을 때뿐이다...~"
211) "당신의 '존재'가 희미하면 희미할수록, 그리고 당신이 당신의 생명을 적게 표현하면 표현할수록 - 당신은 그만큼 더 '소유'하게 되고, 당신의 생명은 그만큼 더 소외된다. 생명과 인간성에 있어서 경제학자가 당신으로부터 빼앗아간 모든 것을 그는 돈과 부의 형태로 되돌려준다."
216) 프로테스탄트 신학자인 슈바이처는 도미니크 수도사인 에크하르트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임무는 세상사와 동떨어진 정신적인 자기중심주의의 분위기 속에 틀어박히는 일이 아니라, 능동적인 생활을 하면서 사회의 정신적 완성에 기여하기 위해 힘쓰는 일이라고 주장한다.
236) 이러한 논법이 무시하고 있는 가장 중요한 사실은 소비자의 욕구는 생산자에 의해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품종간의 경쟁은 있지만 광고가 낳는 전체적인 효과는 소비에 대한 갈망을 자극하는 것이다. 이러한 기본적인 영향을 미치려는 점에 있어서는 모든 회사가 광고를 통해 상부상조하고 있다.
239) '존재에 바탕을 둔 사회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모든 사람들이 시민으로서 그들의 경제적 기능에 능동적으로 참여하여야 한다. 따라서 생존의 소유양식으로부터의 해방은 산업적 정치적 참여민주주의를 완전히 실현함으로써만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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