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강점기의 역사를 가진 우리에게 영국의 지배를 받는 버마(미얀마)의
1920년대 중반의 모습을 보여주는 소설 <버마시절>은 재미있게 읽었다. '버마'라는 이름이 1989년 군부에 의해 현재의 '미얀마'로 바뀌었다고 한다. 버마는 1886년 영국의 식민지령이 된다. 조지 오웰은 1922년부터 1927년까지 버마 식민지 경찰로 근무했고, 당시의 경험을 바탕으로 이 소설이 완성되었다.
소설은 식민지배의 환경 속에서
자신의 입신을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하는 카우크타다 지역의 치안판사 '우 포 킨'이라는 인물의 소개로 시작한다. 독립운동가들이 목숨을 걸고 나라의 독립을 위해 싸울 때 일본의 앞잡이가 되어 잘 먹고 잘 살던 친일파를 떠올리게 하는 인물이다. <버마 시절>은 버마와 나라 잃은 한반도의 모습을 지속적으로 떠올리게 한다.
소설 초반에는
익숙하지 않은 버마의 지명과 사람 이름, 문화, 복식, 역사에 익숙해지는 과정이 지루할 수도 있다. 카우크타다 지역에서 영국 제국주의를 유지하는 역할을 하는 영국인들이 등장한다. 경찰총경 웨스트필드, 목재회사 주재소장 래커스틴, 산림국장 대리인 맥스웰, 부국장 맥그리거, 동양인에 대한 편견이 심한 엘리스 그리고 주인공 플로리다.
왜냐하면 그녀는 플로리가 <원주민들>에 대해 이야기할 때 항상 그들에게 유리한 쪽으로 말하고, 또 버마의 관습과 버마인들의 특성을 끊임없이 찬양하고 있다는 점을 알아차렸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그는 원주민들을 영국인들과 비슷한 품격을 지닌 존재로 표현하기까지 했다. 바로 이것이 그녀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160)
영국을 떠나 식미지의 지배자 역할을 하는 영국인들의 삶은 소외된 인물들이다.
단순하고 반복되는 삶, 열악한 환경, 늘 보는 원주민들을 통해 지루함이 느껴진다. 조지 오웰은 자신의 경험을 통해 제국주의 식민지배의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피상적인 지식이 아니라 역사적 현장으로 독자를 끌고 들어가 간접 체험하게 한다.
제국주의의 본질에 대한 오웰의 태도는 플로리와 원주민 의사 베라스와미의 관계를 통해 구체적으로 제시되어 있다. 이들이 나누는 대화는 이 소설의 핵심 주제를 설정한다. 두 사람의 다정한 논쟁 이면에 숨겨진 아이러니는, 자신의 제국을 비난하고 인도 지배의 어리석음을 말하는 자는 식민주의자요, 제국주의를 옹호하는 자는 원주민이라는 사실이다. <백인종의 사명>이라는 논리가 오리엔탈리스트적 입장에서 <개발>이라는 논리로 대치되었음이 분명하게 드러나는 베라스와미의 친영국적 견해를 플로리는 단호하게 부인한다. (386)
우리는 우리 자신들의 수익을 위해 인도의 평화를 지키고 있소. 그러나 이 모든 법과 질서가 결국 무엇으로 귀결됩니까? 보다 많은 은행과 보다 많은 감옥 - 영국 지배에 의한 평화는 이런 것에 불과하오. (56)
철이 들면서 - 우리는 우리의 두뇌가 명석해지는 것을 막을 수 없으며,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사람들이 이미 그릇된 방향으로 삶을 살아가고 있을 때 두뇌가 뒤늦게 발달하여 자신들의 비참한 삶을 깨닫게 되는 것은 이들이 겪는 비극 중 하나이다 - 그는 영국인들과 그들의 제국에 대한 진실을 통찰했기 때문이다. 영국은 전제 정부이다. 분명히 자비롭긴 하지만 궁극적 목적은 약탈인 전제 정부이다. 그리고 플로리는 같은 사회 속에 살면서 <백인 나리>가 된 동양의 영국 사람들을 미워한 결과, 이제 그들에게서 어떠한 정당성도 찾을 수가 없었다. (92~93)
재미있는 점은 플로리와 인도계 의사인 베리스와미의 대화였다.
다른 영국인들과 달리 플로리는 제국주의 영국을 비판한다. 하지만 피지배자인 베리스와미는 도리어 영국의 지배를 옹호한다. 베리스와미는 일본의 강점기를 긍정적으로 보는 역사관을 가진 지식인들을 떠올리게 한다. 대부분의 영국인들이 지배자로서 원주민들 위에 군림하려고 하지만 플로리와 베리스와미는 서로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관계다.
플로리의 모습은 제국주의라는 정치 이데올로기에 동조하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절연하지도 못한 채 그 주변을 맴돌 수밖에 없는 인간들의 전형이다. 이처럼 플로리와 같은 무력한 존재는 오웰의 정치 소설에서 흔히 <오웰적Orwellian> 주인공이라 불리는 전형적인 형태의 인물들이다. (...) 고독한 아웃사이더인 플로리나 <1984>에서 체제에 반기를 드는 반역자 스미스와 같은 인물들의 소외를 의미하기도 한다. (389)
플로리는 영국의 식민지배에 대해 비판적이지만 그 속에서 자신의 역할을 수행하는 소극적인 인물이다.
그래서 다른 영국인들과 클럽에서 의견이 충돌하지만 강하게 밀어붙이지 못하고 갈등을 회피하는 쪽을 선택한다.
소설 중반에 래커스틴의 조카인 엘리자베스가 부모를 잃고 파리에서 살다 버마로 온다. 30대 중반인 플로리와 젊은 엘리자베스와의 이어질 듯 단절되는 관계는 후반부의 재미를 준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우 포 킨의 계략으로 엘리자베스의 버림을 받은 플로리는 결국 사랑하는 개 플로와 함께 자살하며 소설은 마무리된다.
우 포 킨은 현세의 인간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했다. 이제 다음 세계를 준비하는 일만 남았다. - 간단히 말해 탑을 쌓는 일이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의 계획은 좌절되었다. 궁정을 다녀오고 사흘 후, 그는 죄를 사하는 탑의 벽돌을 한 장도 쌓지 못한 채 뇌졸중에 걸려 말 한마디 못하고 죽어 버렸다. (381)
행복은 돈에 있는 게 아니에요. 지금 돈이 더 있다고 해서 뭘 더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 우 포 킨의 아내 마 킨의 말(21)
권력과 물질을 추구하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살던 우 포 킨은 모든 것을 얻었다고 하는 시기에 돌연 뇌졸중으로 사망한다.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질문을 던지는 부분이다.
독서습관 784_버마시절_조지 오웰_2010_열린책들(230923)
■ 저자: 조지 오웰
20세기 영문학에서 <정치적 글쓰기>로 독특한 문학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조지 오웰. 본명은 에릭 아서 블레어로 1903년 6월 25일 인도 벵골 지방의 모티하리에서 태어났다. 영국 행정부 소속 공무원인 아버지를 남겨 두고 어머니와 함께 영국으로 돌아온 오웰은 국왕 장학생으로 명문 이튼스쿨에 입학한다. 졸업 후 그는 버마(미얀마)로 건너가 (인도 제국주의 경찰)이 되지만 제국주의의 억압과 허구성에 환멸을 느끼고 영국으로 돌아와 사직서를 제출한다.
그의 작품인 수필 <코끼리를 쏘다>, <교수형> 등에는 그 시절의 경험과 식민주의를 바라보는 그의 심경이 잘 묘사되어 있다. 특히 첫 번째 소설 <버마 시절>은 이후 작가의 길로 들어선 오웰 자신의 <버마 시절>에 뿌리를 둔 작품이며, 이 시기를 속죄하는 마음으로 그는 영국의 빈민가에서 생활하면서 노동자 계층 가운데서도 가장 빈곤한 이들의 고통을 몸소 체험하며 자신의 사회주의적 정치관을 정립하게 된다.
이러한 그의 정치 문학 사상이 더욱 극명해지는 계기는 그가 <파시스트에 대항해 싸우기 위해> 참전한 스페인 내전이었다. 그는 이 전쟁을 통해 <민주적 사회주의>가 실현되리라고 낙관하지만 현실은 그것과 다르게 가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나치즘, 파시즘, 스탈린주의로 일컫는 <전체주의>의 실상을 뚜렷이 인식하고, 그것이 진실을 왜곡하고 인간의 본성을 위협하는 것을 보며 깊은 회의에 빠진다. 이를 계기로 오웰은 정치적 색채가 비관적으로 바뀌고, 이후 나온 <동물 농장>과 그의 마지막 소설 <1984>년에 이러한 비관적 사상을 그대로 반영한다.
다시 영국으로 돌아온 오웰은 BBC 방송국에서 대담 진행자, 뉴스 해설 집필자로 활동하기도 하고 각종 문학잡지들에 수필, 서평, 소설 등을 발표한다. 하지만 참전 당시 입은 총상과 지병인 폐렴의 악화로 <1984>년을 탈고한 뒤 병원에 입원하고 폐결핵 양성 판정을 받고, 1950년 1월 21일 마흔일곱의 나이로 생을 마감한다.
'독서습관' 카테고리의 다른 글
[786]구스타프 클림트_56년 생애와 작품들에 대한 배경과 이해를 돕는 책 (0) | 2023.10.01 |
---|---|
[785] 보헤미안의 파리_창조적 영혼을 위한 파리 감성 여행 (0) | 2023.09.25 |
[781]행복은 자전거를 타고 온다_에너지소비량과 운송수단의 증가와 불평등의 관계 (0) | 2023.09.17 |
[780]바람 타는 섬_1932년 제주도 잠녀 항일투쟁 이야기 (0) | 2023.09.16 |
[779]내가 읽다가 늙었습니다_고독한 독서인 박홍규와의 대화 (0) | 2023.09.15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