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범도 장군에 대한 정치적 논쟁이 한창인 시점에 일제강점기 시절을 배경으로 하는
현기영의 소설 <바람 타는 섬>을 아주 재미있게 읽었다. 1932년 일제 강점기가 시작된 지 20년이 넘은 시기에, 육지와 멀리 떨어진 제주도의 농어촌 지역의 잠녀들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진행된다.
역사를 배경으로 하는 소설은
늘 시공간을 넘어 당시를 이해하는 경험을 제공한다. 그래서 역사소설을 좋아한다. 소감을 세 가지로 요약해서 포스팅한다.
첫째, 나라를 잃은 자들의 무력함 그리고 가난
식민지배의 기간이 길어질수록 피식민국가의 국민들의 수동성은 증가한다. 일본인들이 주요한 지위를 차지하고 일본인 무산자들이 한반도에 와서 유산자들이 되었다. 한국인 노동자들은 돈을 벌기 위해 일자리를 찾아 일본으로 향했다. 일본 내에서 동일한 환경에서 일하더라도 임금차별이 있었고, 노동조합에 가입해도 일본인과 조선인은 협력하지 않았다.
자신이 채취한 어획물에 대해, 자신이 수확한 농산물에 대해 정당한 가격을 받지 못하고 착취를 당했다. 그리고 각종 세금의 명목으로 결국 농어민에게 남는 것은 거의 없었다. 그래도 항변하지 못하고 순응하는 무력함을 보인다. 왜 그럴까. 일본인들의 밑에서 부역하며 자신의 출세를 도모하는 한국인 밀정들이 곳곳에서 감시하기 때문이었다.
또한 소설에서 지속적으로 언급되는 내용이 1932년 제주도 주민들의 가난한 삶이다. 특히 먹거리에 대한 소개가 많이 등장한다. 먹거리가 풍족해서 몸에 좋은 것을 선택해 먹을 수 있는 시대에 때로는 독서를 통해 과거로 돌아가 현재에 대해 감사한 마음을 가져보는 것도 좋겠다.
"열 놈 먹고 남은 것이 잠녀 몫이다"란 말이 조금도 틀린 게 아니었다. 잠녀의 채취물 중 9할 이상이 수탈당했다. (74)
사실 시호는 예술적으로는 다다이스트였지만, 정치적으로는 아나키스트였다. 부르조아 위주의 예술적 사회적 전통의 거부 파괴를 표방한 다다주의 미술은 출발할 당시부터 "파괴도 역시 창조다"라는 아나키스트 바꾸닌의 슬로건을 채택했다고 한다. (110)
이 불평등조약에 거간 노릇하여 정치자금을 챙겼다는 자가 당시 외부협판으로 나중에 갑신정변을 일으켰던 김옥균이라고 하는데, 죽쒀서 개바라지하는 격으로 그가 일으킨 정변이 성공했더라도 필경은 왜적을 돕는 일이 되고 말지 않았을까? (123)
둘째, 일제 강점기가 20년이 넘었을 때 순응과 체념의 분위기
일본이 조선을 강제로 합병하고 10년, 20년이 지나면서 항일운동의 불씨는 점점 사라져 갔다. 마치 일본의 지배가 끝나지 않을 것 같은 현실과 타협하는 사람들이 늘어난다. 친일파였던 사람이 당시의 심정을 이렇게 변명했다. "해방이 될 줄 알았나"
순응과 체념의 분위기가 확산되었지만 항일 독립운동을 지속한 사람들이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 그들을 우리의 영웅으로 받아들인다. 끝이 보이지 않는 상황 속에서 일신의 위험을 감수하며 저항한다는 것은 본이 되는 일이다. <바람 타는 섬>에서 시중, 시호, 호일 등의 지식인들과 잠녀인 도아, 금춘, 여옥, 정심이 좋은 사례다.
1910년 일제에 강제로 합병당하는 현실에 분도했던 부모 세대도 1932년에 이르러서는 많은 수가 독립에 대한 기대를 체념한 사람이 많았다. 하지만 새로운 세대들이 꺼져가는 불씨가 되어 새로운 항일투쟁의 도화선이 된다. 그 결과가 1932년 제주도 잠녀들의 항일투쟁이다.
1931년 좌우를 넘어 항일운동을 했던 신간회간 해산되고 여러 이념으로 대립해서 갈등하는 모습이 시중, 호일, 시호가 자신의 신념을 주장하며 논쟁을 하는 장면에서 드러난다. 소통의 문을 닫고 자기주장만이 옳다고 주장하는 현재의 위정자들의 모습이 떠오른다.
(...) 아버지 세대는 체념이 아니라, 아예 투항해 버린 거야. 40대 이상의 유림층이 내보이는 투항주의가 우리들의 싸움에 얼마나 나쁜 영향을 끼치고 있나. 40대 이상은 죽어야 해. (112)
시중은 노래를 부르면서 생각했다. 저 씩씩한 합창 속에는, 우리 쌀을 왜놈들이 다 먹어조져 조밥도 제대로 못 먹고 배곯아야 하고 산의 금도, 바다의 고기도 왜놈들에게 빼앗기고, 면화를 키워도 솜옷 한벌 제대로 못 해 입는, 식민지 백성의 서러움과 분노가 깔려 있다. 왜정 20년이 흐른 지금, 조선 백성의 분노는 이제 다 타버린 제가 되어 다시 불씨를 일으키기 어렵다고 나이 든 축은 체념하여 체제에 순응하고 있지만 그러나 재 속에는 아직도 분노의 빨간 불씨가 숨겨져 있는 것이다. 칠판 뒤 벽지 안에 몰래 숨겨져 있는 저 태극기처럼! (316)
셋째, 잠녀들의 삶을 보다
소설에서 해녀를 잠녀라고 부른다. 저자가 제주도 출신이라서 다양한 제주방언이 대화속에 담겨 있는 점도 정겹다. 잠녀의 일생은 아래 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겠다. 그리고 나이가 들면서 다시 얕은 물가로 돌아오는 거다.
일제 강점기에 제주도 어촌마을에서 잠녀활동으로만 먹고살기 힘들어 일년 중에 반은 육지로 나가 잠녀활동을 한다. 주인공인 도아와 여옥 등을 따라 울산 부근으로 가서 해산물 채취하는 모습이 소개된다. 그곳에서도 일본인 상인에게 고용되어 착취당한다. 잠녀 활동 자체가 차가운 바다에서 숨을 참으며 대합 소라 전복 등을 채취하는 힘든 노동이다. 추워서 파란 입술로 배에 올라 몸을 녹이는 장면이 자주 소개된다.
시중과 같은 지식인들이 잠녀와 같이 배울 기회를 갖지 못한 사람들에게 한글을 가르치는 모습과 잠녀들이 한글로 고향에 편지를 보내는 부분이 감동적이었다. 한편으로는 무지한 상태에서 상황을 깨닫고 저항하는 항일운동의 씨앗을 뿌리는 장면처럼 보였다.
급진 이념을 따지기 이전에 도민은 원초적으로나 심정적으로나 공동체주의자였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한 토착적 공동체 이념에 신사상인 급진주의가 적극적으로 영향을 끼치기 시작한 것은 1920년대 후반부터인데, 한겨레신문에 지면을 빌어 연재했던 이 소설의 배경을 이루고 있는 1932년의 잠녀 항일투쟁이 바로 그 전형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394)
물가에서 물자구치며 헤엄을 배우던 계집아이들이 열두어 살쯤 되면 아기 잠녀가 되어 조그만 태왁을 안고 얕은 바다에서 물질을 시작하는데, 해마다 조금씩 깊은 물로 옮아가 열댓 살 넘으면 '중군' 소리를 듣고 스무 살쯤부터는 까마득히 먼바다, 심지어 육지 바다까지 진출하는 상군이 되었다. (354~355)
독서습관 780_바람 타는 섬_현기영_1989_창작과비평사(230916)
■ 저자: 현기영
1941년 제주 출생. 서울대 사대 영어과 졸업
197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단편 <아버지>가 당선되어 작품활동 시작
소설집으로 <순이 삼촌>(1979) <아스팔트>(1986),
장편으로 <변방에 우짖는 새>(1983), 수필집으로 <젊은 대지를 위해서>(1989)가 있음.
1986년 제5회 신동엽창작기금을 받음. 20년의 교직생활에서 떠나 현재 창작에 전념하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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