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두사호'에 대한 그림 이야기는 2014년 '세월호'를 떠올리게 한다. 위급한 순간에 리더들이 어떤 판단을 하냐에 따라 수많은 사람들의 생사가 결정된다. 메두사호의 기득권자들은 자신들을 앞세웠다. 세월호 선장과 똑같은 판박이다. 사회적 불평등이 심화될수록 권력이나 돈이 보이지 않는 계급이 되어 19세기와 같은 역할을 한다. 우리는 지금도 뉴스를 통해 이런 계급화가 더해지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
1816년 7월 2일 프랑스를 출발해서 세네갈로 향하던 해군함 메두사호가 난파했다. (...) 배가 난파한 위기의 순간, 리더의 행동은 무책임했고 부도덕했다. 총독과 귀빈들은 우선 구명보트 여섯 척에 옮겨 탔다. 나머지 선원 153명은 가로 20미터, 세로 7미터 크기의 뗏목을 만들어 나누어 탔다. (...) 고의였는지 우연이었는지 출발한 지 얼마 안 돼 구명보트와 뗏목을 연결한 밧줄이 풀렸다.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수단도 갖추지 못한 선원들은 망망대해에서 십이 일간 표류했다. (...)
제리코의 그림이 그려지던 시점은 샤를 10세의 능력하고 부패한 리더십에 모두 치를 떨던 참이었다. 선장이 총독 가족과 귀빈만 구명보트에 태우고, 선원들은 버리고 도망간 메두사호 사건은 국가 공동체 전체의 이익과 진보를 무시한 기득권 세력의 제밥그릇 차리기의 축소판으로 보였다. (273/277)
1821년 그리스에서 최초로 독립운동이 시작되었다. 1822년 그리스의 키오스 섬에서 오스만튀르크에 저항하는 시위가 발생하자 끔찍한 살육이 행해졌다. (...) 그리스 독립운동 지원은 20세기 스페인 내전 때처럼 유럽의 양심 있는 지식인들이 자유라는 대의명분 아래 함께했던 사건이다. (279)
풍자화가 오노레 도미에는 라블레의 17세기 소설 <가르강튀아와 팡타그뤼엘>의 주인공 이름을 따서 자기 작품에 제목을 붙였다. 가르강튀아는 볼살이 늘어져 서양배처럼 생겼다고 '배의 왕'이라고 놀림을 받은 루이 필리프를 닮았다. 가르강튀아의 특징은 많이 먹고 많이 싼다는 것. 그는 '세금 흡입가'로 등장해서 가난한 자들의 세금을 꿀꺽꿀꺽 끝도 없이 삼킨다. 세금이 빨려 올라가는 벨트 아래에는 그 아래 떨어진 떡고물을 줍는 사람들이 있다. (283)
이 그림은 우리가 편하게 볼 수 있는 그림이 아니었음에도, 이발소 그림이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대중적으로 인기를 끌었다. 그것은 밀레의 시선에 힘입은 것이었으리라. 존 버거가 온당하게 지적했던 것처럼 밀레는 농민들에 대한 절실한 희망을 품었음에도, 그들이 산업사회의 노동자계급으로 몰락할 운명임을 알고 있었다. 사라져 갈 것을 알기에 그들의 모습을 영원히 남기고자 하는 절실함은 더욱 강력해진다. (301)
산업화가 진행됨에 따라 필요한 노동력을 확보하기 위해 농민들의 노동자화가 진행된다. 더 나은 삶을 찾아 도시로의 이동은 결국 농촌에서의 수준보다 못한 빈곤한 노동자의 삶으로의 전환이다.
브르통은 농촌 여성을 주인공으로 한 그림을 여러 점 그렸다. 프랑스 남자들은 어디서 무엇을 하기에 이토록 아름다운 여자들만이 나와서 밭일을 하고 있다는 말인가? 답은 간단하다. 도시가 남성이라면 농촌은 여성이라는 도식이 숨어 있기 때문이다. 프랑스 시민사회의 근간이 되는 계몽주의 철학은 남성과 여성의 관계에 대한 이분법적인 사고에 머물러 있었다. 도시와 농촌, 문명과 자연, 이성과 감성의 대립이라는 이분법적 이해가 그대로 남성과 여성에게 적용된 것이다. (304)
1888년 고흐는 밀레의 <씨 뿌리는 사람>을 자기식으로 변형해서 여러 점을 그린다. 생각을 어느 정도 정하고 나서 그림을 시작한다기보다 그림을 그리면서 생각을 하는 스타일이었던 고흐는 여러 작품을 반복해 그리면서 자기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깊게 생각했다. 아카데미풍 그림과 반대되는 자기 그림의 핵심은 노동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관습적인 동작을 많이 그렸던 옛 거장들과 네덜란드 거장들조차 피하고 싶어 하던 바로 그 움직임, 바로 '진실한 노동'을 그리고 싶어 했다. (307)
이렇게 화가들이 인간적인 가치를 찾아서 농촌으로 갈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도시 하층민들의 삶이 너무도 비참했기 때문이다. 도시 노동자들의 비참함은 차마 눈물 없이는 말할 수 없었던 것이 당시 실정이었다. 마르크스의 <자본론>은 경제학 서적인 동시에 1840년대 영국 공장 지역의 열악한 노동환경에 대한 눈물 젖은 보고서이기도 하다. 더군다나 영국보다 산업화가 늦었던 프랑스에서는 근대화된 노동에 종사하는 노동자의 모습은 좀처럼 그림에 등장하지 않았다. (309)
멘첼의 그림에서도 기계에 종속된 노동자들의 비참한 삶이 그대로 묘사되어 있다. 오른편 하단에는 어린 소녀가 가져온 도시락을 먹고 있는 노동자들이 그려져 있다. 이 식사 장면을 보면 고흐의 그림처럼 온 가족이 모여서 도란도란 감자 먹는 일이 대단한 축복이라고 느껴질 지경이다. 기계는 잠도 자지 않고, 쉬지도 않고 말 그대로 '기계적으로' 일했다. 인간이 기계의 리듬에 맞추는 수밖에 없었다. (313)
이탈리아 작가 볼페도는 파단 평원에서 일어난 공장 노동자들의 파업에서 영감을 받아 1901년 <제4계급>이라는 대형 작품을 완성했다. 밀레와 고흐가 그린 농민들은 집단이 아니다. 그러나 제4계급이라고 불리는 임금 노동자들은 처음부터 대형 공장에 소속된 집단일 수밖에 없다. 볼페도는 카라바조식의 명암 대조법을 효과적으로 사용해서 이들의 행군에 역사적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315)
1844년 윌리엄 터너가 그린 그림의 제목은 '비, 증기 그리고 속도'다. 이전 시대에는 미술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던 단어들의 나열이다. (...) <비, 증기 그리고 속도>에서 터너가 그리고 싶었던 것은 기차의 구체적인 모습이라기보다는 기차의 '속도'와 '증기'라는 근대적인 현상이었다. 근대화, 문명화의 상징이 '비'라는 자연적 악조건을 뚫고 달린다. 이것은 새로운 혁명, 산업혁명의 결과물이다. 터너는 산업혁명이 먼저 일어났던 나라, 영국 출신의 화가다. (319)
산업혁명의 시대를 경험한 세대의 변화를 알 수 있다. 지금은 훨씬 진화되었다고 자부하는 인공지능의 시대다. 인류의 삶이 훨씬 더 나아져야 하지만 여전히 가난한 자들이 있고, 굶어 죽는 사람이 있는 사회를 살고 있다. 글로벌 지역 간 불평등과 국가 내의 불평등은 해소되지 않고 있다. 미국식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를 답습한 대한민국은 폐단마저도 따라가고 있다. 하지만 경제규모나 영향력 측면에서 열위한 우리가 가야 할 길은 미국의 길이 아니라 독일과 같은 유럽식 사회민주주의가 아닐까 생각한다.
앞으로 저출산 고령화 문제는 사회 발전의 발목을 잡을 것이 명확하다. 이미 정해진 미래를 어떻게 슬기롭게 준비해 갈 것이냐가 인공지능 시대에 모두의 복지를 증진하는 살기 좋은 나라로 가는 길이다.
1881년 젊은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는 '산업혁명 특강'이라고 이름 붙인 옥스퍼드 대학 강의에서 이 시대를 프랑스 정치혁명과 영국 산업혁명으로 특징지어지는 '이중 혁명의 시대'라고 규정한다. 과학기술 발전에 따른 생산력 증대는 '영웅 정치'에서 '경제 정치'로의 진입을 가속화했다. (321)
인상주의 대표 작가 모네가 1873년에 그린 <아르장퇴유 근처의 양귀비 들판>이라는 그림은 마치 빅토르 위고가 썼던 편지 한 대목을 그대로 묘사한 것처럼 보인다. 붉은 양귀비는 그저 붉은색 점들에 지나지 않고 양산을 든 모네의 아내와 아들 장은 유령처럼 흐릿하다. 빠르게 지나가는 차창 밖의 모든 것은 공간감을 잃어버린 흐릿하고 평평한 흔적이 되었다. 모네는 빛과 대기의 미묘한 변화 속에 있는 자연의 한순간, 힐끗 쳐다본 것 같은 한때의 '인상'을 그려내고자 했다. 인상주의자들이 추구했던 시각의 즉흥성은 이런 변화하는 시각상에 상응한 것으로, 근대적 시각 혁명을 이루어 냈다. (326)
르누아르의 파리는 끊이지 않고 파티가 이어지는 장밋빛 도시였다. 그의 화폭에서는 장미꽃도, 복숭아도, 소녀도 모두 풍성한 관능에 젖어 있다. 여인들은 정치적인 혼란기 동안 숨겨 놓았던 치명적인 아름다움과 매력을 뽐내기 시작했고 꽃들도 하나둘 향기를 뿜어 댔다. 인상주의가 탄생한 순간은 정치적 시위의 도시 파리 위에 사랑과 문화의 도시 파리가 새로 올려지는 순간이기도 했다. (331)
1853년부터 1869년까지 나폴레옹 3세의 명으로 오스만 남작의 주도 아래 대대적인 도시 개발이 이루어졌다. 몽마르트르, 베르빌 같은 외곽 지역이 포함되면서 파리는 더욱 광대한 도시가 되었다. 개선문을 중심으로 방사선으로 뻗어 나가는 지금 파리의 모습이 이때 60퍼센트 정도 갖추어진 셈이다. 혁명군들이 숨어들어 바리케이트를 치던 미로 같은 옛 골목길은 대부분 사라졌다. (333)
세기말의 사람들은 세상이 몰락하리라 예감하며 아름다움에 탐닉하는 유미주의자들이었다. 아름다운 파리 시내를 말쑥한 신사복 차림에 세련된 교양과 섬세한 감수성으로 무장한 댄디들이 활보하고 있었다. 그중에 아르튀르 랭보, 오스카 와일드, 카를 위스망스가 있었다. 우리는 그들을 데카당스라고 부른다. 이들 덕에 아름다움은 지상 최고의 가치로 등극했다. 아름다움의 가치 상승은 물질적 가치를 우선시하는 산업화에 대한 반발이었다.(335)
에펠탑이 완공된 해에 조르주 쇠라는 우뚝 솟은 에펠탑을 그렸다. 에펠탑은 파리 전역에서 볼 수 있는, 도시의 근대적 발전을 상징하는 존재였다. 쇠라는 인상주의의 근대적 시각 혁명을 가장 첨예하게 과학화했다고 평가받는 신인상주의 화가다. 새로운 시대의 상징인 에펠탑의 위력이 빛을 발하는 때는 밤이었다. 에펠탑에는 전기 조명이 설치되었다. (337)
드가의 모자 가게 시리즈는 사실 진지한 사회적 관계의 탐구이기도 하다. 작은 모자 가계라 하더라도 생산자, 판매자, 구매자라는 사회적 관계가 설정되어 있다. 생산자와 판매자가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그들이 만들어 파는 값비싼 모자를 살 돈을 벌기는 힘들었다. 다만 욕망할 뿐이었다. (341)
에밀 졸라가 묘사한 것처럼 이 시대는 '필요의 경제'에서 '욕망의 경제'로 이행하고 있었다. 상품은 관능적인 유혹을 담아서 자신을 드러냈고 쇼핑은 그 유혹을 기꺼이 즐기고 희롱하며 화답하는 과정이 되었다. 백화점의 등장과 함께 쇼핑은 부르주어 여성들의 새로운 여가 활동으로 자리 잡았다. (343)
인상주의 시대는 동시에 극렬한 제국주의 시대이기도 했다. 이 당시 유럽이 누린 풍요는 사실상 식민지 수탈을 통해서 가능했다. 식민지 획득을 위한 제국주의의 탐욕스러운 팽창은 전 유럽에 긴장을 야기했다. 전쟁은 서서히 준비되고 있었다. 참 좋았던 그들의 벨 에포크는 그렇게 지나가고 있었다.(346)
남자라면 눈치챘을 것이다. 이 눈빛은 '원조'를 요청하고, '교제'를 허락한다. 남자들은 이 어리고 불쌍한 것의 '후원자'가 될 수 있다. 후원자를 얻는다는 것은 소녀의 타락을 의미함에도, 이런 그림들은 당대 도덕에서 얼마든지 용인될 수 있었다. 그뢰즈의 소녀나 부그로의 소녀를 타락했다고 비난할 수도 있지만, 이 소녀들은 바로 당시의 남성들이 생각하고 싶어 하는 그런 존재였다. 남자들이 허락한 틀 안에서, 남성들의 보호 아래서는 여자들은 언제든지 그림의 주인공이 되어 찬미받을 수 있었다. (351)
'팜파탈'이라는 용어를 처음 접했다. 수동적이고 남성에 의해 삶의 방향이 결정되는 시대에서 스스로 의사결정을 하는 시대로의 전환에서 팜파탈이 새롭게 조명되었다고 생각한다.
마침내 19세기 말 나쁜 여자들의 전성시대가 도래했다. 이 시대는 실제적인 삶의 아름다움에 최고의 가치를 부여해서 장식미술이 발달했던 벨 에포크였던 동시에 세기말의 허무감에 사로잡힌 데카당스의 시대였다. 이때 아름다움은 악과 손을 잡았다. 아름다우면서도 위험한 여자들, 팜파탈들이 세상을 지배했다. 아담과 이혼 후 악마들과 어울린 아담의 음탕한 전처 릴리스, 헤롯 앞에서 유혹의 춤을 추고 그 대가로 세례요한의 목을 요구한 살로메, 퀴즈를 내고 정답을 모른다는 이유로 수많은 남자 여행객들을 죽여 버린 스핑크스, 적장 홀로페르네스를 죽이고 민족을 구한 유디트까지 남성 작가들은 역사를 들추어서 팜파탈의 원형을 찾아내는 데 열중했다. (355)
유디트는 유대의 논개다. 아시리아의 군대가 유대 민족을 침입해 왔을 때, 과부였던 유디트는 술과 고기를 들고 하녀와 함께 단신으로 적진을 찾는다. 그리고 그날 밤 유디트는 적장 홀로페르네스와 하룻밤을 보낸 뒤, 취해 잠든 적장의 목을 베어 옴으로써 민족을 위기에서 구한다. 그러나 19세기 퇴폐적인 탐미주의자들은 그녀의 애국심보다 하룻밤 정사에 주목하면서 유디트를 남자를 유혹하고 파멸시키는 팜파탈의 전형으로 이해했다. (363)
16세기부터 시작된 유럽의 확장 정책은 기독교 문명의 보급이라는 허울 아래 이루어졌다. 사실 야만을 없앤다는 명목으로 한 일들이 더 야만적이었다. 미술사학자 곰브리치도 이들이 "탐욕에 눈이 어두워 거짓과 계략을 일삼는 잔인한 강도떼에 지나지 않았다. 가장 슬픈 사실은 자신들이 크리스천이라고 말하는 것뿐 아니라 이교도에게 가한 모든 잔혹한 행위가 크리스트교를 위한 거라고 주장하는 데 있었다."라고 말한다. (372~373)
1867년 6월 19일 아침 멕시코에서 합스부르크 가문 출신 막시밀리안 황제와 충복 두 명이 총살당했다. 막시밀리안은 프랑스의 나폴레옹 3세가 옹립한 괴뢰정부의 수장이었다. 당시 프랑스는 세계 2위의 해외 자본 투자국으로 군림하고 있었으며, 멕시코는 프랑스에 거액의 채무를 지고 있었다. 멕시코 정부가 채무이행을 하지 못하자, 나폴레옹 3세는 이를 빌미로 침범하여 자기 입맛에 맞는 정권을 세웠다. 대륙을 무정부와 가난의 손아귀에서 구해 낸다는 명분으로 멕시코와는 전혀 상관없는 오스트리아의 왕자 막시밀리안을 멕시코의 왕으로 앉힌 것이다. 1861년 당선된 후아레스 대통령이 엄연히 있었음에도 말이다. (373~374)
제국주의적 서양이 동양에 대한 지배를 합리화하고 옹호하는 사고 방식은 오리엔탈리즘이라는 용어를 만들어 냈다. <문화와 제국주의>를 쓴 에드워드 사이드에 따르면 오리엔탈리즘은 "서구 제국주의 세력의 대외 팽창에서, 비서양을 왜곡하여 그 침략을 합리화한 모든 문화적 표현"을 일컫는 말이다. (375)
1889년 파리에서 열린 만국박람회에서 고갱은 원주민들을 마치 동물원의 동물처럼 전시해 놓은 '원주민 마을'에 크게 영감을 받아 타히티로 떠나기로 결심한다. 고갱은 서구 회화의 전통과 의도적으로 단절해 새로운 영감의 원천을 찾아 나선다. (...) 그러나 그곳은 고갱이 꿈꾸던 낙원이 아니었다. 호주로 가느 배들이 잠시 들렀다 가는 조그만 식민지 항구였다. 1892년에 그린 <타 메테테>는 고갱이 본 식민지 풍경을 그대로 담고 있다. 백인들의 식민지 건설은 그들이 주장했던 것처럼 타히티 원주민의 삶을 '개선'하기만 한 것이 아니었다. 반대로 식민지는 서구의 저질 문화에 오히려 그 순수성이 훼손되고 오염되었다. (381)
서구 중심의 세계관을 가졌던 화가들의 한계는 제국주의 국가의 국민이라는 점이다. 그들에게 새로운 대륙과 새로운 인종은 탐구의 대상이자 열등한 대상이었다. 호텐토트의 비너스라는 여인의 기구한 삶의 여정은 마음을 무겁게 했다. 동일한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면서 인간으로 취급하지 않고 희귀한 짐승처럼 대한 영국과 프랑스에서 있었던 일이 실화인가 의심스럽다. 21세에 자신의 가족을 떠나 영국으로 다시 프랑스로 팔려가서 전시되었다. 그곳에서 박제되어 200년 가까이 타지에서 머무르던 여인이 남아프리카공화국으로 돌아갔다. 처음 듣는 실화에 경악할 뿐이다.
고갱이 타히티로 떠나던 해에 고갱과 같은 이유로 그는 이집트로 떠나서 약 십 년을 그 속에서 보낸다. 당시 세기말의 분위기는 서구의 문명이 언젠가는 끝장나리라는 불안감과 함께 새로운 갱생의 발판이 필요하다고 모두가 느끼던 시점이었다. (...) 에밀 베르나르는 인상주의와 그 이후에 뒤따르는 여러 혼란스러운 시도를 극복하기 위해서 신고전주의로의 회귀를 꿈꾸었다. 그리고 그 시작은 서구 문명의 기원인 이집트가 되리라고 예상했다. 그러나 에밀 베르나르가 목도한 이집트의 카이로 역시 고갱의 타히티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이집트의 지배자가 오스만튀르크에서 영국으로 바뀌었을 뿐이었다. (385)
이러 유의 이야기 중 가장 끔직한 것은 바로 '호텐토트의 비너스'라고 불린 여인의 이야기다. 세라 바트만은 남아프리카 코이코이족의 딸로 태어나 유아세례를 받았으니 백인들과 똑같은 하느님의 딸이다. 그러나 그녀는 1810년 21세의 나이로 돈을 벌게 해 준다는 꾐에 넘어가 영국으로 오게 된다. 남다른 신체적 특성을 지녔던 그녀는 당시 유행하던 프리크쇼 freakshow에서 전시되어 구경거리가 되고 말았다. 여성으로서의 수치심 따위는 전혀 고려되지 않았다. 1815년 영국에서 노예해방운동이 일자 그녀는 이번에는 파리로 팔려 갔다. 그곳에서 26세 나이로 죽기까지 그녀는 구경거리로 살아야 했다. 그녀가 죽은 후의 이야기는 더 기막히다. (...) 죽어서도 그녀는 박제되어 파리의 인류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었다. (388)
https://bandiburi-life.tistory.com/17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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