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블랜더 거실
독서습관

[682]시대를 훔친 미술 ③_미국독립과 프랑스혁명의 물결

by bandiburi 2023. 1. 15.

Charles 1 of England by van Dyck 1635 (출처: Wikimedia Commons)

  • 영국이 왕정에서 입헌정치 체제로 발전

마그나카르타, 권리청원, 관용법, 권리장전과 같은 용어를 배웠지만 역사적 배경지식이 없이 시험을 위해 암기했던 씁쓸한 기억이 떠오른다. 미술작품을 통해 역사를 이해하는 시간이다. 우리에게 전해지는 역사적 유산들은 동기가 있다. 왜 이런 일들이 발생했지라는 의문을 가지고 접근하면 수동적이 아닌 능동적인 배움이고 자신만의 이해의 지도가 만들어질 것이다. 영국이 왕 중심의 사회에서 시민 중심의 사회로 발전해 가는 과정을 잘 설명하고 있어 인용했다. 

16세기 이후 이탈리아가 열강들에게 무력하게 초토화되었던 것은 이탈리아식 도시 단위의 군주로서는 감당하기 힘들었던 전쟁 시스템이 도입되었기 때문이다. 군사적 힘의 독점화 과정은 절대왕정 체제를 만들어 내는 중요한 동력이 되었다. 예컨데 15세기의 헨리 5세는 6000명에서 7000명 되는 상비군을 보유하고 있었다면, 18세기의 루이 14세는 40만 명 규모를 유지했다. (190)

잉글랜드에서는 1215년 존 왕 때 마그나카르타를 통해서 왕들은 앞으로 귀족들과의 사전 협의 없이는 아무 일도 행하지 않겠노라고 약속했었다. 이 약속은 제임스 1세가 등장하기 전까지 거의 400년 동안 대체적으로 지켜졌다. 그러나 왕권신수설을 신봉하는 왕들이 대거 등장하면서 갈등은 본격화되었다. (191)

찰스 1세의 삶은 그렇지 못했다. 그는 무능했다. 신이 그에게 권력을 주셨는지는 모르겠지만, 능력은 주시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는 권리만 주장했지 국익을 창출하지 못했다. 엉뚱한 대외 정책으로 국고를 낭비한 탓에 이를 보충할 세금을 더 거두야 했다. 이때 소집된 의회에서 강제 과세 제한과 국민의 각종 자유권 보장을 요구하는 권리청원 Petition of Rights이 제출된다. 그런데 찰스 1세는 이를 묵살하고 국회를 해산했다. 이후 의회는 십일 년간 열리지 않는다. (...)
그러나 불과 몇 년 뒤인 1640년대에 스코틀랜드에서 시작된 반란은 청교도혁명으로 이어졌다. 이때 그를 잡아서 군사 법정에 세운 것은 가난한 귀족 출신 올리버 크롬웰이었다. 1649년 1월 찰스 1세는 체포돼 재판을 받고 '국민의 적'으로 처형당한다. 결국 1688년에는 명예혁명으로 메리 2세와 네덜란드 총독이었던 윌리엄 3세 부부가 영국의 공동왕으로 등극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의회가 요구하는 관용법 Tolerance Act(1689)를 발표했다. 네덜란드 출신다운 개방적인 태도를 지닌 이들은 영국 국교도 이외의 신교도에게도 신앙의 자유를 보장하는 관용법을 발표함으로써, 영국은 종교적인 갈등이라는 구시대의 문제를 청산했다. 1689년 같은 해 권리장전 Bill of Rights을 발표하여 의회 중심의 입헌정치 체제를 도입하여 시민사회로 넘어가는 초석을 마련했다. (194~195)


  • 로코코 미술의 특징, 감미롭고 세련된 여성 취향이 남성적인 바로크 미술과 차이

Madame de Pompadour by Maurice Quentin de La Tour 1755 (출처: Wikimedia Commons)

바로크가 굵직하고 역동적인 남성적인 취향을 대변한다면, 로코코는 섬세하고 변덕스러운 여성 취향을 대변한다. 로코코 시대는 백일몽 같은 사랑 속을 헤매며, 감미롭고 세련된 파스텔톤으로 물들어 있었다. 만들기 쉽지 않은 밝은 파스텔색들은 귀족들의 우월감을 고취할 수 있는 값비싼 도구였다. 그 중심에는 감미로운 사랑의 분홍색이 있었다. 이런 유행을 만들어 낸 사람은 로코코 시대의 숨은 실력자 마담 퐁파두르(1721~1764)다. 루이 15세의 애첩이자 사교계의 여왕이었던 그녀는 살롱 문화를 주도하였다. (201)

로코코 시대의 궁정 그림들은 사랑의 달콤한 꿈에 젖어 있었다. 로코코 시대를 대표하는 작가 와토는 페트 갈랑트 Pete Calante라는 새로운 그림 유형을 만들어 냈다. 페트 갈랑트는 전원을 배경으로 벌어지는 우아한 축제를 그린 그림이라는 의미에서 흔히 '아연화'라고 번역되기도 한다. (203)


  • 남부 흑인들의 삶을 잘 보여주는 이스트먼 존슨의 그림

Negro Life at the South by Eastman Johnson 1858 (출처: flickr)

1852년 출간된 해리엇 스토의 <톰 아저씨의 오두막>은 흑인 노예의 인간적인 측면을 강조하였다. 이 작품을 읽고 사람들은 흑인 노예도 백인과 똑같은 감정을 느끼는 존재임을 비로소 이해하기 시작했다. 1858년 이스트먼 존슨이 그린 <남부 흑인들의 삶>은 남북전쟁 이전의 복잡 미묘한 상황을 다루고 있다. 그림 속에서는 흑인 노예들이 노래하고 서로 사랑을 속삭이며 평화로운 한때를 즐기는 것처럼 보인다. (...)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 장면은 매우 인위적임을 알 수 있다. (...) 흑인들이 거주하는 집은 허물어질 것 같은 반면, 옆에는 단단해 보이는 고급 주택이 있다. 이 흑인들의 평화는 흰색 드레스를 입은 백인 여자에게 감시되고 있다. (225)


  • 나폴레옹은 불가능은 없다고 했지만 영원한 권력은 없다. 민중은 평화와 빵을 원한다.

Napoleon 1 on his imperial thron by Ingres 1806 (출처: Wikimedia Commons)

1806년 앵그르가 그린 나폴레옹은 그 야망을 한껏 드러낸다. 오른손을 들고 왕좌에 정면으로 앉아 있는 모습은 얀 판에이크의 <겐트 제단화> 예수상을 연상시킨다. (...) 나폴레옹의 포즈는 피디아스가 만들었다고 전해지는 올림피아의 제우스신상도 연상시킨다. 예수건 제우스건 이 도상이 의미하는 바는 지금 나폴레옹이 취한 자세가 '왕 중의 왕'의 것이라는 점이다. (245)

빅토르 위고는 프랑스혁명기를 다룬 소설 <레 미제라블>에서 "민중이 내린 여러 평가 가운데 최후의 평가에 가장 진실된 척도가 존재한다."라고 말한다. 나폴레옹 역시 잠정적인 선택이었다. 대중은 누구의 편도 아니었다. 민중은 언제나 민주 자신들의 편이었다. 그들이 궁극적으로 선택하는 것은 평화와 빵을 주는 사람이다. 나폴레옹이 '불가능'이란 단어를 사전에서 없앤 것은 매우 잘못한 일이었다. (249)


  • 나폴레옹에 저항한 스페인 민중들의 모습이 고야의 두 작품에 잘 담겨 있다. 

The Second of May 1808 by Goya (출처: Wikimedia Commons)
The Third of May 1808 by Goya (출처: Wikimedia Commons)

고야의 두 그림에서 주인공은 스페인 민중이다. <1808년 5월 2일 맘루크군의 공격>에서는 맘루크군의 공격이 일방적이지 않았음을, 민중의 필사적 저항과 응전이 있었음을 보여 준다. 화면 한가운데는 스페인 사람의 칼에 이슬람 복장을 한 맘루크 병사가 죽임을 당하고 있다. 그러나 결국 <1808년 5월 3일 마드리드 방어군의 처형>에서 보여 주는 것처럼 이 저항은 참혹하게 진압되었다. 전투용 랜턴의 강력한 빛에 비춰진 한 남자가 양팔을 벌린 자세는 십자가에서 순교한 예수를 연상시킨다. 스페인에 대한 나폴레옹의 통치는 이런 희생 위에 세워진 것이다. 이 작품들은 물론 1814년 스페인에서 나폴레옹 세력을 몰아낸 후에 발표된 것들이다. (255)

나폴레옹전쟁 당시 모스크바에 타오르던 방화의 불길과 더불어 러시아인들의 민족주의도 타올랐다. 이런 고양된 분위기 속에서 소위 '1812년의 아이들'이라고 불린 애국주의적이며 민주주의적인 성향의 새로운 시대가 등장했다. 
'러시아 국민문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푸시킨(1799~1837)은 청소년기에 나폴레옹전쟁을 겪었고, 평생 조국인 러시아의 모국어인 러시아어에 대한 사랑을 작품으로 표현했다. 문학뿐만 아니라 회화, 음악 등 러시아 모든 문화의 방향에 전환이 일어났다. 푸시킨의 뒤를 이어 문학에서는 고골, 오스트롭스키, 톨스토이, 도스토옙스키가 등장했고, 미술에서는 이동파가 등장했으며, 음악에서도 국민 음악파가 등장했다. 1882년 초연된 차이콥스키의 <1812년 서곡>은 러시아와 프랑스의 전쟁을 주제로 한 곡이다. (260~261)

The Abbey in the Oakwood by Caspar David Friedrich 1810 (출처: Wikimedia Commons)

프랑스 신고전주의의 안티테제로 등장한 독일 낭만주의는 처음부터 민족주의적 성격이 강할 수밖에 없었다. 독일 낭만주의가 가장 잘 표현된 장르는 풍경화였다. (...) 신고전주의는 교훈적이고 영웅적인 행위를 묘사하는 역사화, 신화화, 초상화가 가장 중요한 장르로 부각되었다. 반면에 자유주의 운동이 조직화되지 않은 상태에서 자유를 찾는 개인은 자연을 매개로 자신을 표현했다. 자연에 대한 이러한 해석은 독일 지역 작가들의 개신교적인 성향과도 연관이 있다. (262~263)

The Sea of Ice by Caspar David Friedrich 1824 (출처: flickr)

오스트리아 재상 메테르니히가 주도한 빈회의 참석자들은 프랑스혁명과 나폴레옹 등장 이전으로 역사의 시곗바늘을 돌리고자 했다. (...) 1848년 베를린의 3월혁명으로 메테르니히가 실각할 때까지 삼십여 년간 유지된 빈체제로 자유주의 운동은 전 유럽에서 후퇴하기 시작했다.
나폴레옹에 의해 해체된 신성로마제국, 즉 독일의 처리 문제는 조금 복잡했다. 나폴레옹전쟁은 분명 독일 국민국가의 필요성을 제기했다. 국왕이 중심이 아닌, 국민이 중심이 되는 근대적인 국민국가 건설이라는 과제가 수면 위로 오른 것이다. (...) 빈체제에 참여했던 영국, 러시아, 오스트리아, 프랑스 등 유럽 어느 나라도 독일 통일을 원하지 않았다. (267)

https://bandiburi-life.tistory.com/1770

 

시대를 훔친 미술 ④_노동자와 농민 그리고 제국주의

'메두사호'에 대한 그림 이야기는 2014년 '세월호'를 떠올리게 한다. 위급한 순간에 리더들이 어떤 판단을 하냐에 따라 수많은 사람들의 생사가 결정된다. 메두사호의 기득권자들은 자신들을 앞

bandiburi-life.tistory.com

 

 

728x90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