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은 시대를 반영한다. 그래서 책의 제목도 <시대를 훔친 미술>로 정하지 않았을까. 한 권의 책에 르네상스의 도래부터 20세기 전반기까지의 미술에 대한 간략한 역사를 압축해서 담고 있다. 주옥같은 내용을 담고 있어 여섯 번에 나눠서 책의 내용을 정리했다. 이번에는 전쟁과 혁명의 시기에 예술가들이 어떤 작품을 만들었는지 들어가 본다. 기존의 질서에 대한 파괴가 시작된다.
1905년 가을 살롱전에서 발표한 파격적인 작품으로 '야수파'라는 별명을 얻은 마티스는 다음 해 <생의 기쁨>이라는 대작을 앙데팡당전에 선보였다. 전작인 <사치, 고요, 쾌락>과 마찬가지로 낙원이 테마였다. 표면적으로 보이는 그 모든 것들은 평화롭고 고요하며 감미로운 쾌락에 잠겨 있는 것 같지만, 어마어마한 전통의 파괴가 그림 안에서 자행되고 있다. 각 인물군들은 어떠한 내적인 연관성 없이 등장한다. (...) 인물들의 크기는 실제 비례와 상관없이 그려져 있어서 르네상스 이후에 지켜져 온 원근법적 공간감 역시 무참하게 무너졌다. (395)
스페인의 사창가 아비뇽에 있는 창녀들을 그린 이 그림은 현실에는 비너스는 없고 창녀만이 있다는 마네의 <올랭피아>를 주제적으로 계승한다. 여기 아비뇽의 처녀들은 대부분 '누워 있는 비너스'를 가장 에로틱한 경지로 끌어올린 앵그르의 작품에서 볼 수 있는 모든 자세를 취하고 있다. (...) 옆면 몸에 정면 눈이 그려진 왼편 첫 번째 아가씨는 이집트 부조를 참고한 것이었다. 또 오른편 두 아가씨의 얼굴들은 저 유명한 아프리카의 마스크였다. 서구 사회에서 통용되던 인간의 얼굴에서는 전혀 볼 수 없었던 이질적인 표정과 얼굴에 대한 해석이다. (397)
칸딘스키는 1912년 <예술에서의 정신적인 것에 대하여>에서 위대한 정신의 시대가 시작되고 있으며, 예술은 이 위대한 목표에 복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지금까지의 미술이 눈에 보이는 세계를 '재현'하는 것을 최대의 목표로 삼았다면 이제 예술가들이 지향해야 할 것은 눈에 보이는 것을 넘어서는 '내적 필연성'의 세계다. (401)
독일의 표현주의 운동을 이끌었던 프란츠 마르크가 1913년 봄에 발표한 <늑대들: 발칸전쟁>이라는 작품에는 당시 유럽의 화약고라고 불리던 발칸반도의 긴장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다. 오랫동안 오스만튀르크의 지배를 받던 발칸반도 국가들은 오스만튀르크가 쇠약해진 틈을 타서 저항하기 시작했다. 여기에 러시아, 오스트리아 등 강대국의 이해가 맞물리면서 국제 정세는 점차 긴장이 고조되어 갔다. 예술가들은 이러한 위태로운 분위기에 예민하게 반응했다. (411)
오랜 시간의 시민 혁명을 통해 국민들의 합의가 이뤄진 나라와 급격한 경제성장을 이룬 나라 간의 사회적 갈등을 해소하는 차이를 설명하고 있다. 이 부분은 미술의 세계를 떠나 우리나라의 현재를 생각해 본다. 다양한 사회적 갈등이 심화되고 있는 우리에게 대화와 타협을 통한 방향 제시가 필요하다. 시간이 소요되더라도 상대방의 의견을 듣고 나의 의견을 제시하며 최적의 절충안을 찾아가는 과정이 중요하다. 어렵게 얻어낸 민주화의 실천이다.
하지만 우리에겐 지혜와 인내력이 20세기초의 이탈리아와 독일과 유사한 수준이다. 대화와 타협보다 갈등을 조장하며 자신의 이익을 챙기기에 급급한 모습이다. 국민 개개인의 성숙한 시민의식이 필요하다. 그에 앞서 우리 사회 시스템을 유지하고 자원을 배분하는 정부와 정치인들의 역할이 크다.
영국과 프랑스는 시민혁명을 통한 긴 진통 끝에 사회적 갈등을 해소하면서 '혁명 없는 진보'라는 암묵적인 국민적 합의를 이루어 낸 곳들이다. 더디게 가더라도 끊임없이 대화와 타협이 정답임을 알고 있었다. 반면 19세기말까지 이탈리아는 위대한 르네상스 시대의 지나간 영광을 붙잡고 여전히 여러 크고 작은 도시 국가들로 분열된 '누더기 꼴'이었다. 프랑스와 오스트리아는 오랫동안 이탈리아를 차지하려고 으르렁거렸다. 복잡한 정세 속에서 1870년 이탈리아는 통일되었다. 1871년에 독일도 통일이 되었다. 그러나 후발국인 이탈리아와 독일은 급격한 경제성장 과정에서 야기된 여러 사회적 갈등을 해소하는 지혜와 인내력을 갖추고 있지 못했다. (413/416)
1차 세계대전에 대한 기념비적인 대작을 남긴 사람은 오토 딕스다. 종교적인 삼면 제단화 형식을 빌려서 그는 <전쟁>이라는 거대한 작품을 남겼다. 오토 딕스 역시 불타는 애국심으로 전쟁에 참여했었다. 그러나 참혹한 전쟁 체험은 그를 철저한 반전주의자로 돌려놓았다. 오랜 구상 끝에 완성된 이 작품은 종교화의 삼면 구성, 거칠고 극대화된 고통의 직설적인 표현이라는 점에서 그뤼네발트의 <이젠하임 제단화>를 연상시킨다. 그러나 본래 제단화에서 강조하는 고통을 극복한 성스러움이라는 종교적 메시지는 존재하지 않고, 지옥 같은 끔찍한 전쟁의 현장에 관람객을 데리고 갈 뿐이다. (419/422)
에곤 실레의 가족사를 읽으며 가슴이 뭉클했다. 결혼과 화목한 가정을 꿈꾸던 젊은 부부가 배 속에 아기를 품은 채 세상을 등져야 했다는 안타까운 현실이다. 에곤 실레가 자신의 소망을 <가족>이라는 그림에 담아 놓았다. 그림에 보이는 아기의 모습과 나체로 등장한 두 부부가 자신들의 미래를 예상하고 있다는 듯이 어두운 표정을 하고 있다.
몸이 약해서 입대를 거부당했던 에곤 실레도 스페인 독감을 피하지 못했다. 욕망으로 뒤틀린 육체와 영혼을 그리던 실레는 1914년 결혼으로 비교적 안정적인 삶을 찾은 듯했다. 아이를 감싼 젊은 엄마의 뒤를 든든하게 버티고 있는 실레 자신의 신중하면서도 평온한 얼굴은 결혼으로 얻은 평화와 새로 꾸게 된 꿈의 한 조각을 보여 준다. 스물여덟 살, 젊은 아빠의 희망과 기대는 무참히 꺾이고 만다. 1918년 10월 28일 임신 6개월의 아내 에디트가 사망하고, 사흘 뒤 에곤 실레 역시 목숨을 잃었다. 새로 태어날 아기를 기다리며 실레가 그린 그림 <가족>은 이루지 못한 꿈의 한 장면이 되고 말았다. (427)
19세기말 카자흐스탄 출신 러시아 역사화가 수리코프는 대형 역사화 <총기병 처형의 아침>에서 표트르대제의 개혁을 뒤돌아보면서 심각한 질문을 던진다. 모스크바의 붉은 광장 멀리, 1698년 9월 축축한 가을 아침, 표트르대제의 개혁에 반기를 들어 반란을 획책했던 총기병들의 처형이 집행되고 있다. 화가는 이 시선을 다양한 각도에서 조명한다. 죽음을 기다리는 군인들, 울부짖는 아이들과 가족들, 통절한 몸짓의 여인은 러시아 전통 의상을 입고 있는데, 이는 표트르 대제의 궁정에서 유행하는 서유럽식 드레스와 대조되는 것으로 반란군들의 보수적인 가치를 대변한다. 개혁의 필요성에 공감하지 못했던 대중 대부분은 표트르대제의 개혁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434)
지식인들은 무기력하지 않았고, 기탄없이 책임감 있는 논쟁을 벌였다. 논쟁 상대를 파멸시켜야 할 적으로서만 인식하게 되면, 피할 수 없는 결과를 초래한다. 논쟁 상대는 나의 결점을 비추어 주는 반면교사이기에 나의 주장을 분명히 하되 언제든지 서로 협상 테이블로 돌아올 수 있는 여지를 남기는 것이 논쟁의 '기술'일 터다. 그러나 러시아의 전제군주 차르들은 이 기술을 전혀 몰랐다. 최초의 저항운동인 데카브리스트의 난이 일어났을 때 차르 니콜라이 1세는 잔혹하게 대처해서 '매질하는 니콜라이'라는 공포스러운 별명을 얻기도 했다. (438)
1917년 벽두부터 배고픈 사람들이 거리로 뛰쳐나왔다. 차르를 아버지라고 생각하던 러시아 민중의 입에서 전제정치를 타도하자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시위대에 동감한 하급 경찰들과 군인들도 시위대를 향해 발포하지 않았다. 핀란드에서 돌아온 레닌이 이끄는 볼셰비키(다수파)가 권력을 장악했고, 전쟁을 종결했다. 전쟁의 의무에서 벗어난 볼셰비키는 혁명을 완수하는 데 전력을 다했다. (441)
타틀린의 <제3인터내셔널 기념탑>처럼, 이들이 제시한 예술적 프로젝트들은 후대 예술가들을 통해 반복적으로 재해석될 만큼 자유분방하고 신선했다. (...) 이 철골구조물 중앙에는 스테인리스와 유리로 된 세 개 구조물이 들어선다. 가장 하단의 건물은 정육면체 모양으로, 여기에는 인민의 뜻을 결집하는 입법부가 들어선다. 이 건물은 일 년에 한 번 회전하는데, 이는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은 채 다양한 의견을 듣고 평등을 실현하겠다는 의지를 담고 있다. 중간에는 입법부에서 결의된 내용을 실행하는 행정부가 들어서는 피라미드형 건물이 있다. 피라미드는 한 달에 한 번 회전한다. 상단에는 중요한 인포메이션 센터가 들어서 있다. 원통 모양 건물은 하루에 한 번 회전하면서 인민들의 의지가 제대로 실행되고 있는지를 알리는 소통의 중심지 역할을 한다. 에펠탑보다 무려 세 배나 크게 설계되었던 이 건물은 당시의 기술적 재정적 문제로 지어지지 못했지만, 러시아 아방가르드 작가의 유토피아적인 열망을 보여 주는 특징적인 작품으로 자리매김하며 후대 작가들에게도 큰 영향을 끼쳤다. (445)
추상화를 그리던 절대주의자 말레비치도 결국 구상으로 돌아왔다. 1932년 그는 <불길한 예감>을 그렸다. '노란 무바시카'라는 별명이 붙은 이 그림의 뒷면에 말레비치는 '1918년 쿤체보에서의 불길한 예감'이라고 썼다. 1932년에 그렸지만, 시점을 혁명 무렵인 1918년으로 기록한 것은 반사회주의 혐의를 받는 것을 피하려고 하였기 때문이다. (449)
https://bandiburi-life.tistory.com/17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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