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의 관심사는 계산 체제를 받아들이는 ‘새로운 종류의 과학’이 세계와 동떨어져 있기보다는 세계 안에 있다는 것, 지배자이기보다는 공동 창조자가 된다는 것, ‘우리가 만드는 것’과 ‘(우리가 생각하기에) 우리가 무엇인지’를 연결하는 복잡한 역학 관계의 참여자가 된다는 것이 가지는 의미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어떻게 깊게 해 줄 수 있을 것인가의 문제였다. 계산 체제가 만들어내는 불확실성, 가능성, 그리고 위험들의 와중에서 시뮬레이션들-계산적이고 내러티브적인-은 언어와 코드, 전통적 인쇄 매체와 전자 텍스트성, 그리고 주체성과 계산의 얽힘을 탐색하고 이해할 수 있는 강력한 자원으로 기능할 수 있다. (364)
<나의 어머니는 컴퓨터였다 My Mother Was a Computer>는 이해하기 어려운 용어와 인물들의 말이 인용되어 읽기 힘든 책이었다. 책의 364페이지에 나온 위의 문장이 이 책을 제법 잘 설명하고 있다. 어떤가. 문장을 한참 들여다 보고 몇 번을 읽어야 50퍼센트 이상 문맥을 따라갈 수 있다.
중간에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읽은 이유는 때로는 먹기 어려운 딱딱한 음식을 먹어야 하듯이 이런 이해수준을 넘는 책도 읽어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다. 또한 번역자의 입장에서 얼마나 이해하고 한국 문화에 맞게 변환했을까 수고에 대한 감사함도 일부 있다.
소쉬르, 라캉, 데리다, 보르헤스 등의 등장하는 인물에 대한 배경지식이 없는 점과 아상블라주, 구조주의, 변증법, 수사, 함의, 담론, 은유, 상호매개, 징후, 기호, 계열적 벡터, 그라마톨로지 등의 용어에 대한 흐릿한 해석이 시종일관 독서의 흐름을 방해했다. 한마디로 읽기 어려운 이유였다. 그래도 이러한 전문가들의 토론용처럼 보이는 책을 읽으며 익숙하지 않은 분야에 대한 생각의 뿌리를 내렸다는 보람도 있었다.
소설 읽기가 환각과 비슷하다는 키틀러의 주장은 문학이 지닌 한 가지 주된 매력을 부각시킨다. 그것은 바로 독자들이 장면, 행동, 인물을 ‘환각처럼 떠올릴’ 수 있도록 하는 능력이다. 이 능력 덕분에 소설 속 인물들이 페이지에서 튀어나와 독자와 같은 물리적 공간에 있는 듯이 느껴질 만큼 생생하게 상상의 세계를 창조해낸다. (20)
소설을 읽는 즐거움을 잘 표현했다. 가끔 아내와 독서에 대해 얘기한다. 아내는 소설을 읽어도 깊이 빠져들기 힘들다고 한다. 하지만 나의 경우는 몇 페이지만 읽으면 바로 소설의 배경과 등장인물을 상상하며 다음 페이지가 기대된다.
소설뿐만 아니라 여러 분야의 책을 즐겨 읽는 이유도 저자의 생각에 나의 생각을 동기화시키려고 노력하고 저자와 함께 책의 내용을 탐색하기 때문이다.
벤야민이 보기에 번역가의 목적은 원천 텍스트에서 순수 언어의 메아리, 즉 반영을 발견해 부각시키고, 역사적으로 특정한 목표 언어 안에서 비슷한 공명을 활성화시켜 그것의 숨은 함축이 드러나도록 하는 것이다. “번역가의 임무는 자신의 언어로 다른 언어에 구속되어 있던 순수 언어를 풀어주는 것, 작품에 감금된 언어를 자신이 그 작품을 재창조하면서 해방시키는 것이다”. (175)
번역가의 역할을 다시 인식하게 만드는 문구다. 단순히 한 가지 언어를 다른 언어로 변환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다. 원저자의 의도를 이해하고 적당한 언어를 선택하며 번역자의 필터로 새롭게 창조하는 과정이다. 그래서 번역가의 역할은 아주 중요하다.
이 책에서도 다양한 용어를 어떻게 번역할지 고민했을 것이다. 한국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독자지만 이 책에서 선택된 한국어들이 책의 내용을 이해하는 데 어려움을 줬다. 조금 더 쉽게 다가올 수 있는 용어는 없었을까 생각하는 부분이다. 번역자의 필터로 원저자의 용어를 통과시키기 어려워 부득이하게 일상적으로 많이 쓰이지 않는 단어를 선택했다고 본다.
오늘날에는 몰록들이 지상에서 사물을 운용하고, 엘로이들은 어리석게도 몰록들이 좋다고 말해주는 운영체제(혹은 다른 기술)로 우르르 몰려가고 있다고 스티븐슨은 시사한다. 문제가 되는 것은 자부심, 전문 기술, 그리고 가장 중요하게는 제어력이다. 기술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불가피하게 기술을 이해하는 사람들의 뜻에 따르도록 되어 있다. 이 말이 암시하는 것은 유닉스를 선택하는 사람은 비록 그것이 기술적으로 더 어렵다 해도 엘로이의 범주에서 벗어나 진정한 힘이 있는 몰록의 지위로 오를 수 있다는 것이다. (194)
몰록과 엘로이에 대한 비유는 깊이 마음에 와닿았다. 2005년의 책이라서 마이크로소프트의 운영체제와 유닉스의 오픈 운영체제를 비교했다. 기술적으로 감추고 사용자의 편리성만을 강조하며 독점체제를 유지하는 마이크로소프트는 일종의 몰록이다. 윈도우 운영체제 사용자들은 기술적으로 끌려가는 엘로이가 될 수밖에 없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다양한 영역의 전문가들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 저자는 전문가의 도움을 받더라도 제어력을 잃지 않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래야만 엘로이의 위치를 벗어나 힘을 가진 몰록의 지위로 올라갈 수 있다. 하지만 우리의 현실은 하나의 일에 집중할 것을 요구받는다. 그것이 전문 기술이 불필요하고, 자부심도 가질 수 없는 일이라도 자본의 힘에 굴복하기 쉽다. 점차 엘로이의 삶으로 추락한다. 그래서 우리는 몰록의 지위를 향해 깨어있어야 하는 이유다.
그녀(조안 디디온Jaon Didion)가 강조하듯이, “우리는 살기 위해서 스스로에게 이야기한다”. 이러한 설명은 내러티브가 문자 그대로 세계를 이해할 수 있게 만드는 설명적 힘을 가지고 있음을 증명한다. 내러티브를 구성하는 생명체가 왜 진화상으로 유리해지는지 쉽게 알 수 있다. 내러티브에 내재한 가정들이 없었더라면, 호모 사피엔스가 이룬 성취는 대부분 일어날 수 없었을 것이다. (298)
개인의 삶은 내러티브의 연속이다. 하지만 기록되지 않으면 그 서사는 바람처럼 사라진다. 일기를 쓰고, 블로그를 작성하고, 책으로 출판하는 이유도 세상에 대해 이해한 자신만의 내러티브를 남기는 방식이다. 개인이 성취한 결과물은 기록된 내러티브로 남는다.
분산 인지 환경에서 출현하는 혼종적 주체성은 짐 캠벨(Jim Campbell)의 설치미술 작품 <나는 한 번도 성경을 읽은 적이 없다(I Have Never Read the Bible)>에서 유희적으로 발제된다.
이 설치 작품을 만들기 위하여 캠벨은 배경에 모차르트의 레퀴엠을 깔고 자신의 목소리로 알파벳 스물여섯 자를 발음하여 녹음했다. 그런 다음 성경의 영어 번역본을 스캔하여 이를 이진 코드로 변환했다. 컴퓨터 프로그램을 이용하여 문자를 발음하는 그의 목소리와, 코딩 문자열로 컴퓨터 안에 있는 이에 상응하는 부호를 연결했다. 이러한 코딩 배열이 완성되고 나자, 또 다른 프로그램을 신시사이저와 함께 이용하여 발음된 문자들을 성경에 나오는 순서대로 재생했다.
그 결과 성경을 처음부터 끝까지 한 문자 한 문자씩 ‘읽게’ 되었다. 하루 종일 실행시켜서 설치 작품을 완료시키는 데 37일이 걸리는 프로세스였다. (318~319)
■ 저자: N. 캐서린 헤일스 N. Katherine Hayles (1943.12.16~)
1943년 미주리 출생. 로체스터 공대에서 화학으로 학사를 마치고 캘리포니아 공대에서 화학 석사 학위를 취득한 후, 영문학으로 진로를 바꾸어 1977년 로체스터 대학에서 영문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듀크대 영문학 교수로 재직하면서 과학과 문학, 기술 간의 관계를 다루는 포스트휴먼 이론에 대한 학제적 연구를 진행해 왔다.
많은 상을 받은 저서 <우리는 어떻게 포스트휴먼이 되었는가(How We Became Posthuman)>는 사이버네틱스에서부터 포스트휴머니즘이 발전해 온 과정을 추적하고, 그 문화적, 문학적 의미를 탐색하면서 포스트휴머니즘을 정의한 최초의 저서이며, 포스트휴먼 연구의 초석을 닦은 저작이다.
헤일스의 연구는 디지털 문학을 새롭게 떠오르는 문학 연구 영역으로 정립하는 데 큰 영향력을 발휘했으며, 코드와 언어가 겹쳐지고 분기하는 방식과 현대의 인쇄본 책이 구성과 생산, 배급에서 디지털 실천의 영향을 받는 양상을 포함하여, 책과 컴퓨터 코드의 관계를 이해하는 데 앞장서는 연구를 이끌어 왔다.
최근 연구는 인간 인지에 대한 디지털 매체의 영향을 탐구하는 쪽으로 나아가고 있으며, 인지 방식의 변화에 관한 글들로 유럽, 북미 전역에서 국제적인 관심과 활발한 토론을 이끌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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