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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습관

[532]신영복의 마지막 강의 담론②_인간 이해와 자기 성찰

by bandiburi 2022. 2. 20.

<담론>의 2부는 인간과 자기 자신에 대한 성찰입니다. 전반부 고전에 대한 내용과는 달리 우리가 알고 있는 지식을 꿰어서 전체를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 강의입니다. 이 강의를 실제 참석해서 들을 수 있었다면 하는 아쉬움이 큽니다. 

먼저, 조선시대를 관통해서 왕과 신하의 권력관계의 강약, 그리고 훈구와 신진세력 간의 갈등으로 인한 사화와 반정의 결과가 현재의 보수세력까지 이어져 있다는 설명에서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우리의 역사를 이렇게 부분을 배우면서도 전체를 조망할 수 있도록 시야를 넓힐 수 있도록 사제간에 생각의 토론이 활성화돼야 합니다. 오히려 중고등학교에서 한국사를 소홀히 여기는 것은 아닌지 우려됩니다. 

둘째, 한반도에 영향을 미쳤던 외세인 몽고와 일본의 영향력에 대한 평가 부분입니다. 몽고는 로마와 같이 현지 체제를 인정하고 인재를 다양하게 활용했기에 새로운 세상을 볼 수 있는 기회였지만 일본강점기는 문화와 언어를 말살하려는 폐쇄적 정책으로 국가가 후퇴하는 시기였다는 점입니다. 이런 분석을 처음 접했고 신선했습니다. 

셋째, 고려말 승려 신돈에 대한 평가입니다. 러시아의 라스푸틴과 같은 사람으로 부정적으로 알고 있었는데 저자의 평가는 긍정적이었습니다. 현재와 고려말의 공통점이 기득권 세력이 변화를 반대하고 어렵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공민왕은 사고무친인 신돈을 통해서 개혁을 추진했고 일부는 실현했습니다. 현재도 기득권을 가진 언론과 검찰, 금융, 전경련 등이 빈부격차를 줄이고, 모두가 잘 사는 나라를 만들고, 부동산에 대한 청년층의 부담을 경감하고자 하는 방향에 대해 딴지를 걸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현재는 충분히 만족스러우니까요. 그래서 신돈과 같이 개혁할 수 있는 인물이 필요한 대한민국입니다. 

넷째, 교육은 사회가 책임져야 합니다. 개인에게 교육 비용에 대한 부담을 지워 부모의 재력에 따라서 교육의 질이 달라지는 환경이 현주소입니다. 또한 교육의 성과도 개인이 차지하는 구조입니다. 그러다 보니 빈익빈 부익부가 교육에도 이어집니다. 악순환입니다. 학생 간에 경쟁을 부추기기보다는 협업을 장려하고 학생 자신의 어제 모습과 오늘의 모습이 변화되도록 하는 교육이 필요합니다. 영어 유치원부터 사립학교를 거쳐 외국 유학까지 형편이 되는 자들의 내가 먼저 살아야지의 마음은 이런 교육환경이 만들어낸 괴물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라가 책임지는 교육이 조만간 실현되기를 바랍니다. 

아래는 책에서 주옥같은 부분을 인용했습니다.



회화에서는 원근법이, 소설에서는 3인칭 서이 리얼리즘을 완성한다고 하지만 나는 반대로 1인칭 서술의 리얼리티를 극대화하려고 합니다. 적어도 인간 이해에 있어서 감옥은 대학이었습니다. 20년 세월은 사회학 교실, 역사학 교실, 그리고 최종적으로 '인간학'의 교실이었습니다. (205)

 

정치란 무엇인가? 적어도 정치권력이 민주적이지는 않았습니다. 국민을 위한, 국민의 정치는 아니었습니다. 정치란 대적對敵의 논리로 구축되어 있지만 내면에는 서로가 서로의 존재 조건이 되고 있는, 이를테면 권력 집단 간의 상생과 상극을 생리로 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회의를 금할 수 없었습니다. (217)

 

자기 검열은 검열관과 교도소 당국으로 대표되는 국가 권력에게 나의 무너지는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는 자존심이기도 했습니다. 힘들다, 괴롭다는 얘기는 단 한마디도 쓰지 않았습니다. 징역살이는 편지처럼 그렇게 반듯할 수는 없습니다. 편지가 반듯한 것은 엄격한 자기 검열을 거친 편지들이기 때문입니다. (225)

 

차이를 존중하고 다양성을 승인하는 것은 대히 중요합니다. 근대사회의 최고 수준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차이와 다양성은 그것을 존중하는 것으로 끝나서는 안 됩니다. 그것이 새로운 시작이어야 합니다. 나는 그 집 그림 앞에 앉아서 나 자신의 변화를 결심합니다. 창백한 관념성을 청산하고 건강한 노동 품성을 키워 가리라는 결심을 합니다. 차이는 자기 변화로 이어지는 또 하나의 출발이어야 합니다.

차이는 공존의 대상이 아니라 감시의 대상이어야 하고, 학습의 교본이어야 하고, 변화의 시작이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유목주의입니다. 들뢰즈, 가타리의 노마디즘입니다. 이 유목주의가 바로 탈근대의 철학적 주제임은 잘 알려져 있습니다. 톨레랑스는 은폐된 패권 논리입니다. 관용과 톨레랑스는 결국 타자를 바깥에 세워 두는 것입니다. 타자가 언젠가 동화되어 오기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강자의 여유이기도 하지만 자기 변화로 이어지는 탈주와 노마디즘은 아닙니다. (231~232)

 

<장자> 편에서 생산에 필요한 사회의 평균노동시간을 '사필노'라고 줄여서 불렀습니다. 사필노보다 많은 시간을 들여서 생산하는 기업은 망합니다. 반대로 사필노보다 적은 시간으로 생산하는 기업은 특별잉여가치를 취득합니다. 모든 기업은 특별잉여가치라는 '당근'과 폐업이라는 '채찍' 사이에서 달리고 있는 경주마 같다고 했습니다. '성과 주체', '피로 사회', '그림자 추월'이 후기 근대사회의 실상입니다. 이러한 질주가 언제까지 가능한가에 대한 회의가 오늘의 불편한 진실입니다. (3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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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르조 아감벤 Giorgio Agamben의 '호모 사케르'Homo Sacer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호모 사케르'는 '벌거벗은 생명'이란 뜻으로 주권 권력이 죽여도 죄가 안 되는, 정치 외적 존재입니다. 제물입니다. 2차 대전 당시 아우슈비츠의 유대인이 그 전형이었습니다. (중략) 후기 근대가 되면서 호모 사케르가 다시 되살아나고 있습니다. 피로사회의 성과 주체가 벌이는 자기 착취를 선명하게 부각시키는 개념으로 되살아나고 있습니다. 사실은 주권 권력이 권력 외부로 추방하여 살해하는 호모 사케르는 역사적으로 사라진 적이 없다고 해야 합니다. 현대의 민주주의 국가에서도 바로 그런 구조가 작동합니다. (중략) 보이지 않는 자본권력 아래에서 그림자를 추월해야 하는 가망 없는 질주를 하고 있는 피로사회의 자기 착취자가 앓는 병이 우울증입니다. (367~368)



교육이란 사회가 책임져야 할 공공재입니다. 교육비도 개인이 부담하고 교육의 성과도 개인이 사유화하는 신자유주의 교육 환경과는 판이합니다. 경쟁은 옆 사람과의 경쟁이 아니라 '어제의 나 자신'과의 경쟁입니다. 이러한 교육 환경과 사회 환경이 반부패 지수 1위 국가를 만듭니다. (370)



<제국의 몰락>에서 엠마누엘 토드는 군사력에 기초한 미국의 단일 패권은 이미 기울기 시작했고 15년을 지탱하기 어렵다고 예견했습니다. 그것이 벌써 10년 전의 이야기입니다. (중략) 아리기는 <베이징의 애덤 스미스>에서 미국의 패권은 베트남 전쟁과 이라크 전쟁에서 실패하면서 이미 추락이 시작되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377)



권문세족의 전횡을 견제하기 위해서 전혀 사고무친한 신돈이라는 승려를 발탁합니다. 기득권 마피아들과는 전혀 인연이 없는 신인을 발탁한 것이지요. 당시의 기득권자들에게는 기대할 것이 없었을 뿐 아니라 이해관계가 유착된 세력들끼리의 결탁이 공고했기 때문입니다. 결국 그러한 기득권 세력의 벽에 좌절하게 됩니다만 공민왕과 신돈의 개혁은 엄청난 파장을 불러일으킵니다. 신돈은 미륵의 현신이라고 칭송될 정도였습니다. 전민변정도감을 설치하여 토지와 노비를 조사해서 부당하게 편입된 것들을 돌려주고 해방시켰습니다.

그러나 공민왕과 신돈의 개혁은 실패합니다. 특히 신돈은 패자에게 가해지는 모든 모멸을 다 뒤집어씁니다. 물론 신돈의 개인적인 탐욕이 원인이기도 합니다. 사가로 나와서 처첩을 두고 치부했다는 이유로 척살당합니다. 신돈의 업적 중에 성균관 중수도 들어갑니다. 이색이 성균관 대제학이 되고 성균관을 중심으로 한 이색 스쿨에서 조선 건국의 엘리트들이 모입니다. 정몽주, 정도전, 권근, 이숭인 등 개혁 세력이 결집하면서 이색 스쿨은 '개혁의 사관학교'로 불립니다. (383)




몽고와의 충돌은 조선 건국으로 지양(Aufheben) 되었음에 비하여 일본과의 충돌은 그렇지 못합니다. 그러나 최근 보수정권의 등장과 함께 한국현대사학회 중심의 뉴라이트에서는 일본과의 충돌이 성공적이었다고 주장합니다. '식민지 근대화론'이 그것입니다. 근대화 논의가 간단하지 않음은 물론입니다. 그러나 양자의 차이에서 결정적인 것은 몽고와의 충돌은 '非A'라는 지양의 과정이었음에 반하여 일본과의 충돌은 非A가 아니라 아예 B나 C로 전락했다는 것입니다. 역사의 단절이라 해야 합니다. 국가가 망하고 언어, 전통, 문화가 단절되는 것이었습니다. (385)



1623년 인조반정 이후로 노론 세력들은 지금까지 지배 권력으로 군림하고 있습니다. 조선 후기, 일제강점기, 그리고 해방 이후 군사정권에 이어 오늘에 이르기까지 막강한 보수 구조를 완성해 놓고 있습니다. 물론 배후에 외세의 압도적 지원을 업고 있는 것 역시 그때와 다르지 않습니다. (392~393)  * 조선시대 보수와 개혁파의 갈등 설명 잘 되어 있음(385~393)




내가 구속되고 아버님이 가장 먼저 넣어 주신 책이 <난중일기>였습니다. 읽은 분은 아시겠지만 재미있는 책은 아닙니다. 근년에 <충무공전서> 등 충무공 관련 자료들이 많이 출간되었습니다. <난중일기 외전>까지 나왔습니다. <난중일기>에는 일기가 없는 날이 많습니다. 그날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해전이 있었던 날입니다. 일기는 없지만 그날에 있었던 전투에 관한 장계가 있습니다. '당포에서 왜선 격파하고 나서 올린 장계'가 그것입니다. (394)



양명학의 핵심은 '心卽理'입니다. "마음이 진리"라는 것입니다. 주체성의 선언입니다. 주자학에서는 性卽理였습니다. 성이라는 것은 하늘로부터 받는 것입니다. 그러나 심은 객관적으로 주어진 천명, 천성, 천리가 아니라 인간의 주체적인 실천이 진리를 담보한다는 주장입니다. (400)



다음으로 '자기의 이유'에 관한 것입니다. 네덜란드의 의사이며 작가인 반 에덴 Frederik van Eeden의 동화 <어린 요한>의 버섯 이야기입니다. 아버지가 어린 아들을 데리고 산책을 나갑니다. 산책로 길섶에 버섯 군락지가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그 버섯 중의 하나를 지팡이로 가리키면서 "얘야, 이건 독버섯이야!" 하고 가르쳐 줍니다. 독버섯이라고 지목된 벗서이 충격을 받고 쓰러집니다. 옆에 있던 친구가 그를 위로합니다. 그가 베푼 친절과 우정을 들어 절대로 독버섯이 아님을 역설합니다.

그러나 그에게 위로가 되지 못합니다. 정확하게 자기를 지목하여 독버섯이라고 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위로하다 위로하다 최후로 친구가 하는 말이 "그건 사람들이 하는 말이야!"였습니다. 아마 이 말이 동화의 마지막 구절이라고 기억됩니다. 내가 여러분에게 하고 싶은 말이 바로 이것입니다. '독버섯'은 사람들의 '식탁의 논리'입니다. 버섯을 식용으로 하는 사람들의 논리입니다. 버섯은 모름지기 '버섯의 이유'로 판단해야 합니다. '자기의 이유', 이것은 우리가 지켜야 할 '자부심'이기도 합니다. '자기의 이유'를 가지고 있는 한 아무리 멀고 힘든 여정이라 하더라도 결코 좌절하지 않습니다. '자기의 이유'를 줄이면 '자유'가 되기 때문입니다. (425~426)

독서습관532_인간 이해와 자기 성찰_신영복의 마지막 강의 담론②_신영복_2015_돌베개(220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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