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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습관

[532]신영복의 마지막 강의 담론_고전을 통한 세계 인식

by bandiburi 2022. 2. 20.

유시민 씨의 '알릴레오 북스' 유튜브를 통해 신영복 교수의 <담론>을 소개하는 콘텐츠를 들었습니다. 이미 신영복 교수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등 몇 권의 책을 읽었기에 그의 영화 같은 인생의 굴곡을 알고 있습니다. 김재동 씨가 출연해 신 교수의 마지막 강의를 들었다는 점과 당시에 있었던 에피소드를 친근하게 풀어주는 것이 재미이었습니다.

이전에 도서관에서 대출했다가 읽지 못하고 반납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이번에는 주말을 맞아 <담론>의 전반부 고전을 통한 세계 인식 부분을 읽었습니다. 논어, 맹자, 주역, 노자, 장자, 묵자 등 중국 고전을 생각하면 한자와 어렵다는 선입견이 있습니다. 하지만 저자가 20년 동안 수감생활을 하면서 고전을 읽고 자신의 것으로 소화해서 강의를 통해 풀어내는 이야기는 재미있습니다. 시중에 나와 있는 인문고전 시리즈와는 달리 충분히 삭힌 맛이 납니다. 공감하게 됩니다.

특히 자본주의와 자본축적 부분을 설명할 때 로봇과 같은 자동화 설비를 통해 노동의 비율이 줄어드는 것이 가치를 높여주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점에 놀랐습니다. 생산성 향상을 통해 그 기업이 상품의 값을 동일하게 받는다면, 노동이 줄어든 만큼 상품의 실질 가치는 하락했음에도 가격을 감소하지 않아 기업은 이익을 보게 되어 부의 편중이 심화됩니다. 이때 늘어난 기업의 이익이 노동자들에게 균일하게 수입의 증가로 이어진다면 구매력이 증가하고 노동시간이 줄어들어 삶의 질이 향상됩니다. 하지만 자본주의자들은 그것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우리 주변의 재벌기업의 가족경영 현황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담론>은 신영복 교수의 마지막 강의를 책으로 옮긴 것으로 마치 강의실에서 그의 목소리를 듣는 것 같습니다. 이 시대의 원로로서 후배들을 위해 많은 조언을 하셨으면 좋았을텐데라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매 페이지가 주옥같은 말씀입니다. 아래는 책에서 깨닫게 된 내용을 발췌했습니다.  

여기 저기 우연의 점들을 찍어 나가다 그것이 서로 연결되어 선이 되고 인연이 됩니다. 그리고 인연들이 모여 면(面)이 되고 장(場)이 됩니다. 들뢰즈는 장을 배치(agencement)라고 합니다. (15)

 

예를 들어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는 중세 기사의 전형을 보여주지 않습니다. 중세 기사는 당시 모든 여인들의 연인이었습니다. 그러나 돈키호테는 희극화된 중세 기사의 몰락상입니다. 온당한 중세 기사의 모습과는 거리가 멉니다. 중세를 희극화하고 근대를 예찬하는 반중세 친근대 논리가 그 속에 도사리고 있습니다. 역사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역사는 결코 과거사를 정직하게 재현하는 것이 아닙니다. (24~25)

 

그러나 영상서사 양식의 가장 결정적인 문제는 바로 이 주체가 세계 인식에 있어서 소외된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바다'라는 단어를 만나면 우리는 언젠가 찾아갔던 그 바다를 불러옵니다. 인식 주체가 그 '바다'에 참여합니다. 그러나 바다 영상 앞에서 인식 주체가 할 일은 없습니다. 펼쳐진 영상 세계를 다만 카피할 뿐입니다. 세계 인식에 있어서 그 인식 주체가 소외된다는 사실은 인식 그 자체를 포기하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28)

 

이론과 실천은 함께 가는 것입니다. 좌와 우도 다르지 않습니다. 현실을 바꾸어 가는 것이 역사의 기본인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주어진 조건 속에서 크게 억압을 느끼지 않고 나름대로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그러한 조건을 바꾸려는 생각이 없습니다. 주어진 조건이 그들의 기득권을 보장해 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어진 조건과 체제가 억압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그것을 변화시키려고 합니다. 문제는 이처럼 이상과 현실이 각각 다른 사회적 집단에 의해서 담보되기 때문에, 이상과 현실은 서로 충돌하고 다투는 형식이 됩니다. (44)
우리가 공부하는 이유는 이 두 가지 능력, 즉 문사철의 추상력과 시서화의 상상력을 유연하게 구사하고 적절히 조화할 수 있는 능력을 기르기 위해서입니다. 옛날 사람들도 문사철과 시서화를 함께 연마했습니다. 이성 훈련과 감성 훈련을 아울려 연마하게 했습니다. (53)

 

<주역>은 시詩, 서書와 함께 삼경三經에 듭니다. <사기> <태사공자서>太史公自序를 보면, 시는 풍風에 장長하다고 했습니다. 또 서는 선왕의 행적을 기록한 것이기 때문에, 정政 즉 정치에 장하다고 했습니다. 장하다는 것은 '뛰어나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역易은 무엇에 장할까요? 변變에 장하다고 합니다. 음양, 오행, 사시를 논한 것이기 때문에 변화를 읽는 데 장하다고 합니다. 린 Richard J. Lynn은 <주역>을 'The Classic of Change'로 번역했습니다. '변화의 고전'이라고 했습니다. (59)

 

공자 제자 중에 대상인인 자공子貢이 있습니다. 공자의 14년간의 망명도 자공의 상권이 미치는 곳을 벗어나지 않았다고 합니다. 자공은 자로子路나 안회顔回처럼 공자를 끝까지 수행하지 못했기 때문에 다른 제자들이 공자 삼년상을 마치고 돌아갈 때 움막을 철거하지 않고 계속 시묘살이를 합니다. 그리고 이후에 사재를 털어서 학단을 유지합니다. 이 학단의 집단적 연구 성과가 <논어>로 나타났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안회 같은 뛰어난 제자를 갖기보다는 자공 같은 부자 제자를 두어야 대학자가 된다고 합니다. 일찍이 사마천이 그렇게 이야기했습니다. (77)

 

이처럼 우리의 왜소한 만남은 도시의 과밀 때문이라는 주장이 있을 수 있습니다. 물리적 과밀성이 물론 상당 부분 이유가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논의를 그렇게 끝낼 수는 없습니다. 한 걸은 더 나아가 '도시'는 누가 만들었나를 물어야 합니다. 도시는 자본주의가 만들었습니다. 자본주의의 역사적 존재 형태가 도시입니다. 그리고 그 본질은 상품교환 관계입니다. 얼굴 없는 생산과 얼굴 없는 소비가 상품교환이라는 형식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 자본주의 사회의 인간관계입니다. 얼굴 없는 인간관계, 만남이 없는 인간관계란 사실 관계 없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얼마든지 유해 식품이 만들어질 수 있는 구조입니다. (109~110)
그럼에도 불구하고 맹자는 성선설을 주장합니다. 반대로 순자는 성악설을 주장합니다. 둘 다 춘추전국시대의 참상을 뛰어넘기 위한 개념입니다. 맹자는 인간의 선한 본성을 확충함으로써 그 시대를 극복하려고 하고, 순자 역시 인간의 악한 본성을 직시하고 그것을 적절히 규제함으로써 춘추전국시대를 뛰어넘으려고 했습니다. 성선설과 성악설은 다 같이 목적론적 개념입니다. (114)

 

내가 <노자>의 상선약수를 예로 들어 하방연대를 역설해 온 지가 오랩니다. '물'이 하방연대의 많은 부분을 설명해 줍니다. 선리만물善利萬物의 주체가 바로 생산자인 기층 민중입니다. 부쟁不爭의 의미는 객관적인 조건과 주체적인 역량을 잘 판단해서 기회주의적이거나 모험주의적인 그런 실천 방법을 경계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가장 과학적인 방법으로 실천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134)

 

자본주의의 역사는 자본축적의 역사입니다. 자본축적은 자본주의의 강제 법칙입니다. 자본축적은 필연적으로 기계의 채용으로 나타납니다. '자본의 유기적 구성'이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OCC(Organic Composition of Capital)가 그것입니다. 이것은 노동과 기계의 비율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자본축적이 진행될수록 이 유기적 구성이 고도화됩니다. 노동에 비해서 고정자본의 비율이 점점 높아집니다.

생산 과정에서 기계의 비율이 높아지면 자연히 노동이 배제됩니다. 한 사람이 10만 명을 먹여 살리는 환상을 보여주면서 꿈의 신기술이 예찬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현재와 같은 구조라면 한 사람만 고용되고 10만 명이 해고됩니다. 그 한 사람의 노동을 로봇이 수행한다면 그리고 그 로봇이 시장에서 물건을 구입하지 않는다면 자본주의 경제 시스템은 정지됩니다. (140)

 

기계가 가치를 창출한다는 생각은 잘못입니다. 기계에 대한 환상과 신화는 시장논리가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과거 노동을 재투입하고 현재의 가치를 재분배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 기계, 기술입니다. 하지만 개별 기업 단위로 볼 땐 그것이 곧 이윤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가치 창출로 인식됩니다. (145)

 

사람의 정체성은 노동을 통해서 만들어집니다. '노동'이란 표현이 어색하다면 '삶'이라고 하는 것이 좋습니다. 자기가 영위하는 삶에 의해서 자기가 형성되고 표현됩니다. 그러나 도시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소비와 소유와 패션이 그 사람의 유력한 표지가 되고 있습니다. 도시라는 복잡하고 바쁜 공간에서는 지나가는 겉모습만 보입니다. 집, 자동차, 의상 등 명품으로 자기를 표현합니다. (중략) 우리 시대의 도시 미학은 명품과 패션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고통과 방황이 얼마나 큰 것을 안겨 주는가에 대해서 우리 시대는 무지합니다. (148)
오늘날 우리 현실을 생각해 보면 법가의 원칙이 관철되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여러분도 모르지 않으리라고 봅니다. 대부 이상은 예로 처벌하고 서민들은 형으로 처벌하는 것이 우리의 사법 현실입니다. 정치인이나 경제사범은 그 처벌도 경미하고 또 받은 형도 얼마 후면 사면됩니다. 내가 교도소에서 자주 보기도 했습니다만 입소해도 금방 아픕니다. 병동에 잠시 있다가 형 집행정지로 석방됩니다. 휠체어로 법정에 출두합니다. 이러한 사법 현실도 문제이지만 더욱 무심한 것은 우리의 사회의식입니다. 정치 경제 사범은 '불법행위자'입니다. 반면에 절도, 강도와 같은 일반 사범은 '범죄인'이 됩니다. 엄청난 인식의 차이입니다. 한쪽은 그 사람의 행위만이 불법임에 반하여 다른 쪽은 인간 자체가 범죄인이 됩니다. (177)

 

분서갱유도 이사의 작품(?)이라고 합니다. 분서갱유가 진나라의 잔혹사로 거론됩니다만 과학 서적은 분서하지 않았습니다. 과거 성왕들의 치세를 칭송하는 서책이 대상이었다고 합니다. 지방분권을 옹호하고 중앙집권 체제에 반대하는 반혁명적 서적을 태운 것입니다. 역법, 종수, 의학 서적들은 분서하지 않았습니다. 분서 대상도 국가 소유의 서책이 아니라 민간 소유의 서책이었습니다. 당시에 민간이 소유한 책은 얼마 안 됩니다. 그리고 갱유도 그렇습니다. 유자들을 묻었다고 하지만 유자가 아니었을 뿐 아니라 그 수도 460명 정도였습니다. (중략) 분서갱유는 통일 국가의 기틀을 공고히 하고 지방분권의 봉건적 질서로 복귀하려는 반혁명의 소지를 없애는 정책이었습니다. (188)

 

간디가 열거하는 '나라를 망치는 7가지 사회악'이 있습니다. 
원칙 없는 정치   Politics without principle
노동 없는 부      Wealth without work
양심 없는 쾌락   Pleasure without conscience
인격 없는 교육   Knowledge without character
도덕 없는 경제   Commerce without morality
인간성 없는 과학 Science without humanity
희생 없는 신앙   Worship without sacrifice

독서습관532_신영복의 마지막 강의 담론①_신영복_2015_돌베개(220220)


■ 저자: 신영복(1941.8.23~2016.1.15)

1941년 경남 밀양에서 태어나 서울대학교 경제학과 및 동 대학원 경제학과를 졸업했다. 숙명여자대학교 경제학과 강사를 거쳐 육군사관학교 경제학과 교관으로 있던 중 1968년 통일혁명당 사건으로 구속되어 무기징역형을 선고받았다. 복역한 지 20년 20일 만인 1988년 8월 15일 특별가석방으로 출소했다. 1989년부터 성공회대학교에서 강의했으며, 2006년 정년퇴임 후 석좌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2015년 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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