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시킨의 작품세계를 알고 싶어 1836년에 출간된 <대위의 딸>을 읽었다. 러시아 니콜라이 1세(1796~1855) 시대인 1799년에 태어난 푸시킨은 결투를 벌이다 총상을 입고 1837년 젊은 나이에 사망한 작가다. 당시에는 명예를 위해 결투를 하는 것이 귀족으로서 용기 있는 행동이었겠지만 현재의 입장에서 보면 그의 삶이 불꽃처럼 타오르다 갑자기 꺼진 것 같아 안타깝다.
러시아 지명이나 인명이 반복되어 나옴에도 머릿속에서 구분하기가 어려운 소설이다. 배경은 예카테리나 2세 치하의 18세기 후반, 특히 푸가초프의 난(1773~1775)이 한창이던 러시아다. 주인공 그리뇨프는 귀족 장교로 아버지의 지시에 따라 지방의 요새로 간다. 도중에 그리뇨프의 고집으로 눈보라 속에 고립되어 어려움에 처했을 때 부랑자인 푸가초프의 길 안내로 모면한다. 고마움의 표현으로 술을 사고, 토끼털 옷을 주게 되는데 이 사건이 주인공 그리뇨프의 장교생활에 큰 영향을 준다.
자신도 모르게 베푼 선행이 나중에 그리뇨프의 삶에 돌아온 상황을 알고 아래와 같이 그의 놀람을 작가는 표현했다.
나는 깜짝 놀랐다. 그러고 보니 푸가초프와 그때 길 안내자가 놀랄 만큼 닮아 있었다. 나는 푸가초프와 길 안내자가 동일인임을 확신했다. 그러자 나에게 베푼 호의의 이유가 이해되었다. 나는 이 기이하게 얽힌 인연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부랑자에게 선물한 작은 털외투가 올가미에서 나를 구하다니. 더구나 여인숙을 빈들거리며 돌아다니던 술주정뱅이가 요새를 포위하고 나라를 뒤흔들다니!
푸가초프가 봉기를 일으켜 자신의 요새를 점령하고 사령관이던 대위가 교수형에 처해졌지만 그는 가까스로 살아나게 되고, 반란을 일으킨 농민들로 인해 위험에 처했을 때도, 시바브린의 교활함에 위기에 처한 마샤와의 사랑도 푸가초프의 도움으로 회복하게 된다. 푸시킨 자신이 당시의 농노제와 전제정치에 반대하는 입장이었다고 하니, 푸가초프 농민반란에 대한 지지와 귀족으로서의 황제나 여제에 대한 헌신으로 적극적으로 지지하지 못하는 한계가 드러난다.
이 소설을 통해 푸시킨이 귀족가문 출신이라는 점을 알게 되었고, 18세기 러시아사에 대한 이해를 확장하는 계기기 되었다. 푸가초프의 농민 반란이 <대위의 딸>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어 귀족 중심의 농노제 하에서 궁핍한 생활을 하던 농민들이 왜 푸가초프란 인물을 중심으로 반란에 동참했는지 궁금하다. 글 속에서 조금씩 보이는 18세기의 러시아 귀족들의 삶과 장교들의 삶을 엿볼 수 있었다.
또한 그리뇨프 가문에서 평생을 종으로 살아온 사벨리치가 젊은 장교 그리뇨프를 수행하면서 보여주는 헌신이 <대위의 딸>의 재미를 더한다. 그가 없었다면 주인공 그리뇨프는 존재하기 어려웠다. 그리고 악역으로 등장하는 시바브린은 사랑하는 여인 마샤를 두고 주인공과 경쟁을 하고, 푸가초프의 반란군에 점령당했을 때는 귀족임에도 감쪽같이 까자크인들처럼 행세하며 반란군에 가담하는 박쥐와 같은 모습을 보인다. 모든 소설에는 악역이 있어 긴장감을 주는데 시바브린과 같이 실제로 귀족이면서 반란에 가담한 사람이 있었다고 한다.
"서약한 사람에게 충성을 다해 근무하도록 해라. 상관들의 말을 잘 듣되 호의를 얻어내려고 애쓰지는 마라. 근무에 지나치게 욕심을 부리지도 말고 핑계를 대며 게을리하지도 마라. 그리고 외투는 새것일 때부터 아끼고 명예는 젊어서부터 소중히 하라는 속담을 기억해두어라." 라고 부임지로 떠나기 전에 아버지가 당부한다. 당시의 귀족 장교들에게 요구되던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
'21년 연초에 언론을 자주 등장하고 있는 유명 운동선수나 연예인들의 학폭 논란이다. 자신의 미래가 어떻게 펼쳐질지, 시대가 어떻게 변화될지 모르는 청소년기에 가해자로 피해자들에게 상처를 준 것이 세월이 흐른 뒤에 부메랑이 되어 돌아온 것이다. '명예는 젊어서부터 소중히 하라'는 말이 청소년들에게 하고 싶은 적절한 조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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