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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습관

[1031]화씨 451_책을 태우는 방화수에서 독서의 힘을 발견한 몬태그가 주인공인 문명 비판 소설

by bandiburi 2025. 4. 1.

레이 브래드버리의 소설 『화씨451』은 제목이 특이하다.
무슨 내용을 담고 있기에 온도를 제목으로 삼았지? 궁금했다. 
화씨 451도는 책이 타기 시작하는 온도라고 한다. 

주인공 몬태그를 통해 인간의 생각이 획일적으로 통제되는 사회를 비판한다. 
생각을 통제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일방적인 주입식 환경이고 벽면 텔레비전이 도구다.
또 다른 방법은 사람들에게 책을 읽는 활동을 금지시키는 것이다. 
그래서 방화수가 있고, 그들은 책이 있는 집을 찾아가 책과 함께 집, 심지어 사람까지도 태워버린다. 

우리의 교육 현실과 스마트폰으로 관계가 단절되고 함께 있지만 혼자 있는 현대 사회에 대한 비판을 함께 볼 수 있다. 
1950년대 출간된 디스토피아적 사회에 대한 문명 비판서인 이 소설은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다는 점을 발견한다. 
작가의 탁월한 선견지명이다. 

책에서 남기고 싶은 문장과 함께 생각을 아래에 포스팅했다.


클라리세는 뜰에 떨어져 있는 밤톨들을 만지작거렸다. "세상이 참 이상하지 않아요? 사람들과 같이 있다는 건 물론 좋지요. 그렇지만 그저 떼거리로 모여 있기만 하면 뭐해요? 아무 말도 나누지 않고 그냥 모여 있기만 해도 사회적이라고 할 수 있어요? 텔레비전 수업 한 시간, 야구나 배구나 달리가 같은 체육 한 시간, 그리곤 멋대로 정리한 교과서를 일방적으로 주입시키는 역사 수업 한 시간,  그리고 운동 한 시간, 그런데 우리는 아무런 질문도 하지 않아요. 대개는 침묵한 채 고분고분 받아들이기만 해요. 이미 정해진 해답을 따라가기만 할 뿐이죠. (...)" (54~55)

1953년에 최초발행된 이 소설에서 현재의 대한민국 교육에 대한 비판을 듣는다. 질문도 없고, 의견도 없고, 수동적으로 잘 받아 적고 암기해서 성적이란 결과만 좋으면 우수한 인재로 평가받는다. 산업화 시대의 인재 기준이 여전히 교육 현장에서 적용되고 있다. 더구나 스마트폰이란 파괴적인 기기는 함께 있지만 혼자 있는 시대를 완성했다. 

몬태그는 건너편 벽에 붙어 있는, 100만 권은 됨직한 금서들의 목록을 쳐다보았다. 지난 몇 년 동안 그 책들은 그의 점화기에서 나온 불꽃들에 의해 한줌의 재로 변해 가고 있다. (61)

진시황의 '분서갱유'와 같은 일이 벌어진다. 사람들의 독서를 금지한다. 일방적으로 주어지는 단편적인 정보만을 지식인 것처럼 수용하는 인간으로 만든다. 책을 통해 의문을 가지고 생각하는 인간을 원하지 않는 사회다. 인류의 문명이 발달할수록 대다수는 인터넷과 스마트폰을 지식의 확장이 아닌, 육체적이나 정신적으로 퇴화하는 경향을 보인다. 일부는 그런 환경을 조장해서 경제적 이득을 취한다. 

"간밤에 나는 지난 10년 동안 내가 불사르느라 뿌렸던 등유를 생각했어. 그리고 불태운 책들에 대해서도. 그리고 처음으로 깨달았지. 불에 타 없어진 하나하나의 책들마다 제각기 한 사람씩의 이야기가 있다는 사실을. 그게 누구든지 한 권의 책을 채우기 위해 그 모든 것들을 생각해 낸 거야. 책 한 쪽 한 쪽을 알맹이 있는 글로 채우기 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을 쏟았는지 알 수 없지. 전에는 결코 이런 생각을 해 보지 못했어." (89)

주인공 몬태그는 방화수로 일하며 책을 소유한 집을 방문해서 불태우는 일을 해왔다. 그 과정에서 왜 사람들은 위험을 무릅쓰고 책을 소유하고 읽는지 의문을 가졌다. 책을 한 권씩 몰래 가지고 가서 보관했다. 그는 마침내 깨달았다. 맹목적인 방화수로서의 삶이 아니라 스스로 생각하고 비판하는 존재가 되었다. 책이란 것이 저자의 깊이 있는 고뇌의 결실이라는 사실을 보게 되었다. 몬태그의 심적 갈등과 변화를 볼 수 있다.  

"여기저기에서 그런 일은 일어나게 마련이지. 클라리세 매클런 말이지? 그 애 가족에 대한 보고서가 있어. 하나하나 신중하게 검토했지. 유전이나 환경은 참 재밌는 거야. 그 기묘한 특권은 그저 몇 년만 지나면 벗어 던질 수 있는 그런 게 아니라고. 집안 환경은 학교에서 배우는 많은 것들을 깡그리 없애 버릴 수도 있어. 그래서 유치원 연령을 해마다 낮춰서 지금은 강보에 싸인 아기를 낚아챌 정도까지 이른 거야. (...) (101)

교육이 얼마나 중요한지 보여주는 문장이다. 아무리 학교를 통해서 지도자가 국민을 우민화하려고 하더라도 부모가 주체적인 사고를 하며 자녀를 가르친다면 효과가 없다. 그래서 소설에서는 더 낮은 연령부터 시작해서 영향력을 행사하려고 한다. 몬태그에게 실질적인 변화를 가져온 것은 클라리세라는 십 대 소녀의 질문이었다. 클라리세는 집안에서 부모와 삼촌의 영향을 받아 주체적인 사고를 할 수 있었다. 

몬태그, 평화라고. 경품 대회를 열어. 그래서 대중 가요 가사나 수도 이름, 또는 아이오와에서 작년에 옥수수를 어떻게 재배했는 지를 잘 외우는 사람한테 상을 주는 거야. 사람들한테 해석이 필요 없는 정보를 잔뜩 집어넣거나 속이 꽉 찼다고 느끼도록 '사실'들을 주입시켜야 돼. 새로 얻은 정보 때문에 '훌륭해'졌다고 느끼도록 말이야. 그리고 나면 사람들은 자기가 생각을 하고 있다고 느끼게 되고, 움직이지 않고도 운동감을 느끼게 될 테지. 그리고 행복해지는 거야. 그렇게 주입된 '사실'들은 절대 변하지 않으니까. 사람들을 얽어매려고 철학이나 사회학이니 하는 따위의 불안한 물건들을 주면 안돼. 그런 것들은 우울한 생각만 낳을 뿐이야. (102~103)

소설 속 정부는 국민들을 우민화하기 위해 책을 불태우고, 자신들이 주는 정보만을 받아들이길 원한다. 인간의 약점을 저자는 보여주고 싶었던 것일까. TV 외에도 넷플릭스, 유튜브와 같은 동영상 콘텐츠들이 사람들의 시간을 잡아먹는다. 그만큼 주도적으로 생각할 시간을 잃어버렸다. 소설 속 디스토피아적 사회와 같이 현대 사회가 변해가는 것을 늘 경계해야 한다. 

세상 사람들은 모두 열심히 일하는데 우리만 진탕 놀고 즐기는 걸까? 그래서 우리들이 다른 나라 사람들한테 그토록 미움을 받는 걸까? 정말 그렇다고들 얘기하는 걸 들었어. 왜 그런지 알아? 난 모르겠어. 그건 확실해. 하지만 책을 읽으면 뭔가 알 수 있을지도 몰라. 이 캄캄한 동굴 같은 신세를 좀 벗어날지도 몰라. 너나없이 똑같이 이런 광기 어린 삶을 살아가는 운명에서 벗어나게 해 줄지도 몰라. 난 저 벽면에서 밤낮없이 떠들고 노는 바보 같은 자식들 얘기는 듣지 않겠어. (121)

다수가 우민화 환경에서 만족하며 즐길 때, 책에 대해 호기심을 가지고 현실을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이를 극복해서 더 나아가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책을 읽으며 캄캄한 현실로부터의 탈출을 원한다. 

(...) 벽면 텔리비전이 이 세상을 어떻게 비틀어 뭉개버렸지? 예수는 이제 한낱 오락 프로그램의 어릿광대로 전락했소. 그 요란한 의상을 멋대로 입혔다 벗겼다 해 놓은 모습을 보면 하느님조차 자신의 아들을 알아볼지 의심스럽소. 이젠 박하사탕이나 다름없어졌지. 상업 광고 제품이나 마찬가지로 모든 숭배자들이 절대적으로 바라는 달콤한 은총을 노골적으로 언급하고 있으니. (134)

몬태크의 아내 밀드레드는 벽면 텔레비전을 통해 전달되는 정보를 세상의 모든 것인 듯 적극적으로 받아들인다. 그녀는 책을 읽지 않는 사람들에게서 나타날 수 있는 전형적인 무비판적 삶을 사는 사람이다. 

우리가 필요한 건 뭐든지 있고, 행복해지기 위해서 무엇 하나 모자란 게 없는 세상인데 우린 행복하지 않아요. 뭔가가 빠져 있어요. 주위를 둘러보았습니다. 제가 확실하게 알 수 있었던 단 한 가지는 그 동안에 사라진 거라곤 지난 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제가 불태워 없앤 책들, 책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책에 뭔가 해답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134)

몬태크가 사는 시대는 모자람이 없는 세상이지만 그렇다고 행복하지 않다. 왜 그럴까 또다시 질문이다. 결국 불태워 없애버린 책들이 원인이라는 깨달았다. 책은 여전히 막강한 힘을 가진다. 그 힘을 아는 사람은 책을 읽고 실력을 키운다. 행복을 느낀다. 

이제 알겠소? 왜 책들이 증오와 공포의 대상이 되어버렸는지? 책들은 있는 그대로의 삶의 모습을, 숨구멍을 통해서 생생하게 보여지는 삶의 이야기들을 전해 준다오. 그런데 골치 아픈 걸 싫어하는 사람들은 그저 달덩이처럼 둥글고 반반하기만 한 밀랍 얼굴을 바라는 거야. 숨구멍도 없고, 잔털도 없고, 표정도 없지. 꽃들이 빗물과 토양의 자양분을 흡수해서 살지 않고 다른 꽃에 기생해서만 살려고 하는 세상, 그게 바로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의 참모습이오. (137)

역시 책이 없는 삶을 지향하는 현재의 생명력이 없는 삶의 모습에 대한 비판이다. 책을 통해 있는 그대로의 삶의 모습과 생생한 이야기를 듣어야 한다. 자연으로부터 멀어진 삶은 허상과 같다.  

(...) 그러면 그 다음엔 가만히 앉아서 하릴없이 오락이나 즐기거나 거실에 앉아 토론 없이 일방적으로 벽면 텔레비전의 말에만 귀를 기울이고 있지. 왜 그걸까 벽면 텔레비전은 '현실'이기 때문이지. 그런 즉각적, 말초적이고 다양한 차원을 지녔소. 당신이 생각할 것은 모두 벽면이 제공해 주지. 거기서 말하는 게 모두 옳은 것 같아 보이고, 모두 옳아야만 할 것 같고. 그것은 너무나도 깔끔하고 즉각적으로 결론을 내려 주니까 당신의 마음은 미처 생각해 보고 반박할 여유도 갖지 못하오. (138)

벽면 텔레비전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질문은 없다. 일방적으로 텔레비전 방송에 귀 기울이고 받아들이도록 한다. 콘텐츠는 말초적이고 즉각적으로 도파민을 분비해서 만족감을 준다. 하지만 이런 도파민은 부작용도 크다. 

"나는 열흘이면 아흐레 정도는 아이들을 학교에다 맡겨 놓고 살아요. 그러니까 한 달이며 사흘 정도는 아이들한테 부대낄 수밖에 없는데, 뭐 그렇게 견디기 어려운 정도는 아니지요. 그저 거실에다 몰아넣곤 벽면 텔레비전 스위치만 켜 주면 그만이니까. 세탁기 돌려서 빨래하는 거나 마찬가지예요." 보울즈 부인은 말하면서 킥킥 웃었다. (158)

이 소설이 출간된 1950년대의 문명 비판서에 언급된 내용은 오늘날 젊은 부부들의 자녀 양육 태도에도 적용할 수 있다. 마트나 식당에서 어린 아이들에게 스마트폰을 맡기고 잠잠해지는 사이, 부모는 장을 보거나 식사를 한다. 벽면 텔레비전을 켜주고 아이들이 보는 것으로 부모의 역할은 끝이다. 그 아이들은 어떻게 자랄까.  

자신의 무지를 감춘다면 아무도 당신을 공격하지 않겠지. 그 대신 아무것도 배우지 못하게 되는 거요. (170)

비티, 당신은 이제 문제가 아냐. 당신이 언제나 말했지. 문제에 직면하지 말고 그냥 태워 버리라고. 그래, 이제 난 두 가지 일을 다 해낸 거야. 안녕, 서장이여. (194)

몬태그가 비티를 태워버리기 전에 그가 했던 말을 그대로 되돌려준다. 

저것들은 다 엉터리야. 당신은 강에서 추적을 따돌렸어. 저들은 그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거든. 자신의 관중들을 오래 붙잡아 놓고 싶은 거지. 이 쇼는 일시적인 결말이라도 내야 할 거요. 그것도 빠른 시간 안에! 그런데 만약 강을 전부 뒤지려고 한다면 밤새도록 해야 한단 말이야. 그러니까 바람직한 결말을 위한 희생양을 찾고 있는 거지. 잘 보시오. 저들은 앞으로 5분 안에 몬태그를 붙잡을 거라고! (227)

사람들에게 오락거리를 제공하기 위해 사람의 생명은 일고의 가치도 없어 보인다. 과거에 경찰이나 검찰이 실적으로 올리기 위해 범인이 아닌 사람을 범인으로 몰아 억울한 옥살이를 하게 했던 사례가 떠오르는 문장이다. 권력을 가진 자들이 어떤 생각을 가지느냐에 따라 사람들의 삶의 질이 좌우될 수 있다.  

오늘 밤 길 위나 버려진 철로를 오가는 수천 명이 밖에서 보면 부랑자지만, 안은 도서관이라오. 처음에는 계획적이지 않았소. 기억하고 싶은 책이 있는 사람들 각자가 그렇게 했지. 그 뒤 20여 년이 지나 서로 만나서 돌아다니다가 경계가 허술한 곳에 모여 계획을 세웠다오. (...) 우린 그저 책을 보관하는 지저분한 책덮개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오. (...) (234)

사람들은 책을 보전하기 위해 개개인의 머릿속에 내용을 암기한다. 우린 그저 책덮개일뿐이라는 겸손한 표현으로 그들의 외유내강적인 면모를 볼 수 있다. 

10초 안에 죽을 사람처럼 살아아. 이 세상을 보거라. 공장에서 만들어지거나 가게에서 돈을 주고 즐기는 어떤 환상적인 꿈보다도 더 굉장한 것이다. 어떤 약속도 묻지 않고, 어떤 담보도 요구하지 않지. 동물 같은 것도 없고. (...) (239~240)

우리의 현실 세상은 그 모든 그룹들 각각이 나름의 주장을 내세우며 법을 만들기도 하고 폐기시키기도 하는 일종의 운동장이다. 하지만 내 소설은, 희곡은, 시는, 그들의 권리가 끝나고 나의 지배 명령이 시작되어 행사되는 통치령이다. (262)

작가는 글 속에서 지배자다. 통치자다. 

오웰은 공산주의를, 그러니까 러시아 공산주의에 대한 환멸과 그가 스페인에서 목도했던 공산주의자들의 행태를 다루었던 겁니다. 『1984』는 그런 정치적 상황에 대한 발언이었지요. 반면에 저는 정치적인 것보다는 다른 여러 가지에 더 관심이 있었습니다. 사회 전반의 모든 분위기를 본 거죠. TV와 라디오의 영향, 혹은 교육의 빈곤 등등. 학교 선생들이 더 이상 독서를 가르치지 않는 세상을 전망할 수 있었어요. 배우는 게 적을수록 책도 더 멀리하게 되겠죠. (267)

조지 오웰의 소설과 레이 브레드버리의 이 소설의 차이점에 대해 설명했다. 오웰의 소설은 공산주의에 대한 반발에서 지어졌다면 이 소설은 당시의 문명에 대한 비판서다. 매스미디어에 대한 비판, 교육에 대한 비판, 그리고 교육 현장에 있는 교사들이 독서를 가르치지 않는 것에 대한 비판이다. 70년이 지난 지금도 그 비판은 대한민국에 유효하다. 

제가 보기에 「물랭 루즈」라는 영화에는 오늘날 TV나 영화의 문제점들이 고스란히 집약되어 있어요. 이것저것 상을 많이 탄 영화인데, 거기엔 0.5초밖에 안 되는 아주 짧은 장면들이 4560개나 있습니다. 카메라가 가만히 정지해 있질 않아요. 그러니 당신이 생각할 틈을 전혀 주지 않죠. 그렇게 폭격하듯이 뭐가 계속 쏟아지는데 생각을 한다는 건 불가능해요. 보통의 60초짜리 TV광고도 120개의 0.5초짜리 클립들이, 아니면 1/3초짜리들이 들어 있습니다. 사람들을 감각으로 폭격하는 거지요. 그게 생각을 몰아내고 그 자리를 대체하고 있습니다. (270)

아직 '물랭 루주' 영화를 보지 못했는데 뮤지컬영화로 유튜브에 소개영상이 나온다. 소비를 부추기기 위해 광고는 우리의 일상 곳곳에 침투한다. 광고는 우리의 감각을 무디게 하고 비판적 사고를 무장해제시킨다. 광고가 난무하는 소비사회에 대한 자기 검열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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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자: 레이 브래드버리 Ray Bradbury (1920~2012)

1920년 8월 22일 일리노이 주 위키건에서 태어났다. 스무 살에 발표한 첫 단편을 시작으로 여러 잡지에 작품을 기고하였으며, 단편과 장편 소설, 희곡, 시 등을 넘나드는 500여 편의 작품을 발표했다. 고도로 세련된 문체와 섬세한 시적 감수성을 바탕으로 환상 문학뿐 아니라 일반 문단에서도 인정받는 훌륭한 작품을 많이 펴냈다.

특히 문명비판서의 고전으로 자리 잡은 『화씨451』, 『화성연대기』 등 작품 곳곳에 과학기술의 발달 이면의 퇴색해 가는 정신문화를 되살리려는 노력이 배어 있다. 1956년 존 휴스턴이 감독한 영화 『백경(Moby Dick)』의 각본을 썼으며, 자신의 이야기 중 65개가 「레이 브래드버리 시어터(The Ray Bradbury Theater)」란 이름으로 TV에 방영되어 7차례나 에미 상을 비롯한 과련 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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