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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습관

[1029]지워진 기억을 쫓는 남자_총알이 뇌를 관통해 기억과 공간능력 상실한 자세츠키 중위의 글

by bandiburi 2025. 3. 30.

세상을 살다 보면 사건사고로 인해 다양한 후유증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을 접한다. 
대부분은 머리가 아닌 다른 신체부위에 대한 상처나 절단사고의 결과를 감당하는 사례다. 
이 책 『지워진 기억을 쫓는 남자』는 전쟁 중에 총알이 두개골을 관통해 일정 영역이 손상된 자세츠키라는 인물에 관한 이야기다. 

저자인 루리야 박사가 자세츠키의 상태에 대한 분석한 글이 뼈대를 이룬다. 
이와 함께 자세츠키가 대뇌피질의 3차 영역이 손상된 자신의 상태를 어렵게 기록해 놓은 글이 내용을 채운다.
그의 상태를 이해하는데 의사나 심리학자의 어려운 용어가 불필요하다. 
왜냐하면 뇌손상을 입은 자세츠키 본인의 입장에서 주변환경과의 관계를 기록했기 때문이다. 
세상이 어떻게 보이고, 어떻게 들리고, 어떻게 느껴지는지 남긴 표현은 그의 상태를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독자로서 자세츠키의 글을 통해 일부라도 그가 어떻게 느끼는지 상상할 수 있다. 
뇌가 눈, 코, 입, 손과 발, 피부 등에서 입수된 정보를 해석하고 저장하고 필요할 때 꺼내 쓸 수 있는 중요한 기관이란 것을 알게 해 준다. 
자세츠키와 같이 눈으로 보지만 두뇌에서 정상적으로 해석하고 저장하지 못할 때 공간을 제대로 지각하지 못한다. 
방금 들었던 단어를 떠올리지 못한다. 
복잡한 문장의 문법구조를 이해하지 못한다. 

 

나는 다른 나라에 억압과 노예 제도가 존재하는 이유를 모르겠다. 지구는 모든 인류를 먹이고 입힐 수 있을 만큼, 그리고 기본적인 필수품을 공급하고 후손들의 삶을 밝게 비춰줄 수 있을 만큼 풍요롭다. 그토록 부유한 국가에 전쟁, 폭력, 노예 제도, 억압, 살인, 처형, 가난, 기아, 고통스러운 노동, 실업이 존재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204)

이 책은 자세츠키의 증상에 대한 내용이 대부분이지만 결국 하고 싶은 말은 마지막에 있는 위의 문장이다.
그의 불행의 시작은 결국 전쟁이었다. 
지구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풍족하게 살 수 있는 여건이 되었는데도 여전히 도처에서 갈등과 전쟁이 일어난다. 
심지어 선진국에서도 테러가 이어지고, 선진국에서도 전쟁을 억제하려는 노력보다 돈을 버는 기회로 삼는다.
인간의 탐욕은 결국 만족을 모르고 끝없이 희생자를 만들어낸다. 
이것이 자세츠키가 마지막으로 던지는 질문의 답이 아닐까. 

아래는 책에서 남기고 싶은 문장을 인용했다.


23세의 자세츠키 중위는 1943년 3월 2일, 두개골 좌측 두정 후두부에 머리 부상을 입었다. 머리 부상으로 장기간 혼수상태에 빠져 있었으며, 야전병원에서 신속하게 응급 처치를 했는데도 주변 조직이 눈에 띄게 변하고 두개골이 뇌막에 유착되는 합병증에 시달렸다. 반흔 조직이 형성되면서 외측 내실을 위로 끌어올렸고, 이 부분의 수질이 초기에 위축되면서 외측 내실의 모습이 변형됐다. (45)

이 환자의 뇌에서 총알 파편에 의해 손상된 부위가 바로 대뇌피질의 3차 영역이었다. 그러므로 대뇌피질에서 이 영억이 손상됐을 때(총알 파편 혹은 출혈이나 염증에 의한 손상) 어떤 증상이 나타나는지를 고려해야 한다. (...) 환자는 계속해서 분리된 사물을 인식하고(시각피질과 2차 영역이 손상되지 않았기 때문에), 촉각 및 청각 기능을 유지하며, 말소리를 구별할 수 있다. 그렇지만 매우 중요한 기능이 손상됐기 때문에 환자는 인식한 시각 정보를 하나의 완벽한 이미지로 즉시 결합하지 못한다. 따라서 그는 주변 세계를 따로따로 분리해서 인식할 수밖에 없다. (55~56)

언어는 의사소통의 수단이면서 인식과 기억, 사고와 행동에 근간이 된다. 내면의 삶을 형성하는 것이다. 좌반구 피질의 3차 영역이 파괴될 경우 앞서 설명했던 것보다 훨씬 심각한 결과가 나타나는 것은 아닐까? 이런 부상을 입은 환자는 내면세계가 산산이 조각난다. 생각을 표현하는 데 필요한 단어를 떠올릴 수도 없다. 또한 문법 관계를 너무 어렵다고 느끼게 된다. 뿐만 아니라 학교에서 배웠던 기술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도 까맣게 잊어버린다. 과거에 알고 있던 지식은 개별적이고 연관성 없는 정보로 분리된다. 겉드로 보이는 삶은 변화가 없어 보이지만, 사실은 엄청난 변화를 겪는다. 뇌의 일부분이 손상되었기 때문에 그의 세계는 끝없이 연결된 미로가 되고 말았다. (57)

그가 한 번도 경험해본 적 없는 일이 일어났다. 우선 그는 사물을 인식할 수 없었다. 그의 세계는 작은 조각들로 분해됐으며, 이 때문에 물체를 완벽한 형태로 구성할 수 없었다. 그는 물체의 오른쪽을 볼 수 없었다. 형태를 알아본다 해도 희미한 여백에 불과했다. 그는 물체의 완벽한 형태를 인식할 수 없었기 때문에 조각들을 조합하고 그것의 의미를 유추해 내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62)

나는 팔뚝이나 엉덩이가 어디 있는지도 자주 잊어버렸으며 이 두 단어가 지시하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내야만 한다. 나는 '어깨'라는 단어와 팔뚝이 긴밀하게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다. 그러나 팔뚝이 어디 있는지는 항상 잊어버린다. (70)

마침내 그는 카자노프카(이후 키모프스크로 명칭 변경)로 돌아왔다. 이 작은 마을은 그가 태어나고 자란 곳으로 모르는 이웃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그는 또다시 공간 장애로 인해 괴로움을 겪어야 했으며 모든 것이 낯설게만 보였다. (87)

뇌를 관통한 총알 파편은 그의 세상을 무자비할 정도로 산산이 부숴놨기 때문에 그는 더 이상 공간 감각을 발휘하거나 사물들의 관계를 판단할 수 없어서 세상을 수없이 독립된 부분으로 나누어진 곳으로 인식했다. 그의 말처럼 그는 '공간'이라는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으며, 불안정한 공간을 두려워했다. (90)

몇 년이 흘렀다. 책상 위에는 그가 쓴 공책이 쌓아갔다. 처음엔 그가 직접 노란 종이로 묶어서 만든 얇은 공책들이, 첫 번째 원고를 끝내고 난 후에는 회색 공책들이 책상 위에 차곡차곡 쌓였다. 나중에는 커버가 방수포로 된 굉장히 큰 공책으로 바뀌었다. 1천 쪽 정도 썼을 무렵, 그리고 또다시 1천 쪽을 마쳤을 때 그는 좀 더 적절하고 완벽한 표현을 찾기 위해 다시 처음부터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는 전쟁이 끝나기 전부터 다시 쓰기 시작해서 25년간 그 이야기를 계속하고 있다. (117~118)

(...) 그래서 자신의 삶을 쓰는 일기는 그에게 살아야 하는 이유가 되었다. 그것은 삶과 이어주는 끈이자 과거의 '자신'으로 되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이라는 점에서 꼭 필요한 것이었다.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을 기른다면, 여전히 쓸모 있는 인간으로서 성공적인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과거를 되살리는 일은 미래를 약속하는 방법이었다. (119)

내가 이 글을 쓰는 또 다른 이유는 기억력을 향상시키고 실어증을 극복하고 싶기 때문이다. '내 질병에 관한 이야기'를 쓰는 작업은 무엇보다도 기억력과 어휘 구사력을 향상시키는 데 도움을 준다. 이것은 부인할 수 없는 엄연한 사실이다. (122)

문법 구조 속에 함축된 논리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가장 큰 장애였고, 어떤 뇌 기능이 손상됐는지를 보여주는 가장 확실한 증거였다. 그 자신도 이 사실을 인식하고 있었으며, 의사로부터 '지적 실어증'이라는 용어를 배운 후부터는 자신의 병을 그 용어로 설명했다. (179)


 

독서습관1029_지워진 기억을 쫓는 남자_알렉산드르 로마노비치 루리야_2008_도솔출판사(250329)


■ 저자: 알렉산드르 로마노비치 루리야 (1902 ~ 1977)

러시아의 신경심리학자. 카잔 주립 대학교 재학 중 카잔 정신분석협회를 조직해 지그문트 프로이트와 편지를 주고받기도 했다. 1923년 모스크바 심리학연구소에서 근무하기 시작하면서 인간의 사고 과정을 분석하는 "복합 운동 방법"을 고안했는데, 이는 '거짓말 탐지기'의 원리가 되었다. 

1930년대 후반 스탈린의 대숙청을 피하기 위한 방책의 일환으로 의과대학에 진학해 실어증을 연구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육군 병원에서 전투 중 부상으로 인한 정신 장애를 치료하는 법을 연구했다. 이를 바탕으로 훗날 '두뇌심리학'이라는 새로운 심리학 분야를 개척했다. 무한대의 기억력을 지닌 사람에 관한 『모든 것을 기억하는 남자 The Mind of an Mnemonist』1968와 이 책 『지워진 기억을 쫓는 사나이 The Man with a Shattered World』1972에는 고전적 연구 방식과 치료를 조화시킨 그의 독특한 시각이 잘 드러나 있다. 그는 훗날 모스크바 주립대학에 심리학과를 만들어 교수로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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