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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습관

[910]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_물리학자 오펜하이머의 일대기

by bandiburi 2024. 7. 12.

 미국의 이론 물리학자 오펜하이머에 대한 인생을 다룬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를 재미있게 읽었다. 오펜하이머란 인물에 대해 어렴풋이 알고 있었는데 이 책을 통해 그의 삶을 전체적으로 볼 수 있었다.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는 프로메테우스가 제우스로부터 불을 훔쳐 인간에게 전해주었듯이, 오펜하이머가 자연 속에서 원자력을 인간에게 전해 주었다.

오펜하우스의 삶은 몇 단계로 나눠볼 수 있다. 누구보다 명석했던 배움의 시절, 맨하탄 프로젝트에서 원자폭탄을 개발하던 시절, 메카시즘의 광풍 속에서 공산주의자로 몰려 청문회로 시달리던 시절, 그리고 인후암으로 고생하다 사망할 때까지의 노년 시절로 구분할 수 있다.

인류 문명의 큰 진보이자 재앙이 될 수 있는 원자력의 힘을 알게 해준 오펜하이머의 파란만장했던 삶을 즐길 수 있는 시간이었다. 이 책에서 전하는 다섯 가지 주요 메시지를 포스팅한다. 

앨솝 형제는 오펜하이머 사건이 드레퓌스 사건과 유사한 장기적 파장을 불러일으킬 것이라고 예측했다. "프랑스의 추악한 세력들은 그들의 부풀어 오른 자존심과 도가 지나친 자신감으로 드레퓌스 사건을 조작했다. 하지만 결국 그들은 자신들의 더로운 손으로 스스로의 권력을 앗아가는 결과를 맞이할 수밖에 없었다. 미국에서도 비슷한 세력들이 오펜하이머를 재판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었고, 결국 그로 인해 스스로 권력을 내놓게 될 것이다." (898~899)

 

첫째, 과학과 윤리의 상호작용

 오펜하이머의 삶은 과학적 발견이 윤리적, 사회적 책임과 어떻게 얽혀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원자폭탄 개발은 과학의 위대한 성취였지만, 그 파괴력은 엄청난 윤리적 딜레마를 초래했다. 이는 과학자들이 자신의 연구가 사회에 미칠 영향을 항상 고려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달한다.

그가 가르치는 '인생 문제 교육(Education in Life Problem)'은 에티컬 컬처 스쿨의 필수 과목이었다. 그는 종종 학생들에게 개인적인 윤리적 딜레마를 제기하고는 했다. (...) 오펜하이머는 학교에 다니는 동안 흑인 문제, 전쟁과 평화의 윤리학, 경제적 불평등, 그리고 남녀 관계의 이해 등 여러 쟁점에 대해 고민해야만 했다. (48)

오펜하이머는 나중에 자신이 여전히 "스스로에 대해 모든 면에서 대단히 큰 의구심"을 가지고 있다고 회고했다. "하지만 나는 할 수만 있다면 확실히 이론 물리학을 연구하리라 결심했습니다....... 실험실로 돌아가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니 커다란 해방감을 느꼈지요. (...)" (107)

케임브리지가 유럽 실험 물리학의 중심이었다면, 괴팅겐은 이론 물리학의 본산이었다. 당시 독일 물리학자들은 미국의 물리학 수준을 아주 낮게 평가했다. (110)

 

둘째, 지식의 양면성

   프로메테우스가 불을 인간에게 전해준 것처럼, 오펜하이머는 원자력이라는 강력한 지식을 인류에게 전했다. 이 지식은 에너지 생산과 같은 긍정적인 용도로 사용될 수 있지만, 동시에 파괴적인 무기로도 사용될 수 있다. 이는 지식과 기술이 어떻게 사용되느냐에 따라 인류에게 축복이 될 수도, 재앙이 될 수도 있음을 상기시킨다.

1932년에 실험 물리학자 칼 앤더슨(1950~1991)이 양전자의 존재를 증명했다. 앤더슨의 발견은 오펜하이머의 계산이 양전자의 존재를 이론적으로 보인 지 2년 후에 이루어졌다. 그로부터 1년 후, 디랙은 노벨상을 받았다. (162)

오펜하이머는 당시에 버지가 그런 말을 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지만, 그와 같은 반유태주의 분위기에 대해서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미국의 상류 사회에서 반유태주의는 1920년대와 1930년대를 거치면서 고조되고 있었다. 많은 대학들이 1920년대 초에 하버드가 유태인 학생의 수를 제한하는 정책을 세우는 것을 보고 그것을 따라 하기 시작했다. (195)

오펜하이머는 1954년 심문관들에게 "1936년 무렵에 나의 관심사가 바뀌기 시작했습니다."라고 설명했다. "나는 독일에서 유태인들이 겪는 일에 대해 지속적이고 사무치는 분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독일에 친척들(고모와 사촌들 몇 명)이 있었고, 나는 그들이 미국으로 올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습니다. 나는 대공황이 나의 학생들에게 미치는 영향을 보았습니다. (...) 나는 공동체의 삶에 보다 적극적으로 참여해야겠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204~205)

 

셋째, 정치와 과학의 복잡한 관계

 오펜하이머는 맨하탄 프로젝트 이후 냉전 시대의 정치적 압박과 메카시즘의 희생양이 되었다. 이는 과학이 정치적 도구로 사용될 때 발생할 수 있는 위험성을 경고하며, 과학자들이 정치적 압력에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에 대한 중요한 교훈을 제공한다.

당시에 좌익 성향을 가졌던 수많은 사람들처럼, 스페인 내전의 발발은 슈발리에에게 중대한 전환점이 되었다. 1936년 7월에 스페인 육군의 우익 파벌은 민주적으로 선출된 좌익 정부에 대항해 반란을 일으켰다. 프란시스 프랑코(1892~1975) 장군이 이끄는 파시스트 반란군들은 몇 주 내로 공화국을 전복시킬 수 있다고 예측했다. 하지만 대중들의 저항은 끈질겼고, 잔혹한 내전이 일어났다. 공산주의의 영향을 받은 스페인 정부에 의구심을 가지고 있던 미국과 유럽의 민주 국가들은 가톨릭 교회의 부추김을 받자 양쪽 모두에 대한 무기 금수 조치를 선언했다. 이는 히틀러의 독일과 무솔리니의 이탈리아로부터 후한 원조를 받던 파시스트들에게 유리한 환경을 제공했다. 포위당한 공화국 정부에 원조를 제공한 것은 소련 뿐이었다. 좌익 정부를 지원하기 위해 전 세계의 좌파들은 공화국을 수비하기 위해 국제 여단(international brigade)을 조직해 내전에 참전했다. (212)

슈발리에는 오펜하이머에게 자신이 이 책을 쓴 이유를 설명하면서 "역사는 비록 쉽게 드러내지 않지만, 진실에 근거해야 할 필요가 있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이 경우에 "진실"은 각자의 인식에 달려 있는 것이다. (264)

어떤 대의에의 헌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올바르게 균형 잡힌 시각에서 보아야 한다. 매카시 시기의 가장 해로운 특징은 그러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오펜하이머의 정치적 편력에 대한 가장 중요한 사실은, 그가 1930년대에 미국의 사회 경제적 정의를 위해 헌신했다는 것이고, 이러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 좌파의 편에 서기로 선택했다는 것이다. (266)

그로브스는 "나는 '시식의 구획화(compartemntalization of knowledge)'가 보안의 핵심이라고 생각한다."라고 주장했다. (380)

 

넷째, 개인의 복잡성과 인간성

 오펜하이머는 천재적인 과학자였지만, 동시에 복잡한 인간적 면모를 지닌 인물이었다. 그의 삶은 인간의 복잡성과 다면성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통찰을 제공한다. 이는 우리가 역사적 인물을 평가할 때 그들의 업적뿐만 아니라 인간적인 면모도 함께 고려해야 함을 상기시킨다.

육군의 보안 관계자들은 오펜하이머의 인가를 여전히 가로막고 있었고, 오펜하이머는 자신의 직위를 지키기 위해서는 그로브스의 보안 정책을 거슬러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오펜하이머는 그로브스와의 관계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381)

오펜하이머는 보어가 곁에 있다는 것에 대단히 감사했다. 57세의 덴마크 물리학자는 1943년 9월 29일 코펜하겐에서 몰래 보트를 타고 탈출했다. 스웨덴 해변에 무사히 당도한 그는 스톡홀름으로 보내졌는데, 거기서 독일 요원들이 그를 암살하려 시도했다. (452)

과학사가 제러미 번스타인이 나중에 썼듯이, "보어는 상보성이라는 생각이 물리학에 머무는 것에 만족할 수 없었다. 그는 그것을 모든 것에서 발견했다. 본능과 이성, 자유 의지, 사랑과 정의 등등." 그는 그것을 로스앨러모스의 작업에서도 발견했다. 프로젝트는 모든 부분에서 모순투성이였다. 그들은 파시즘을 굴복시키고 전쟁 자체를 종식시킬 대량 살상 무기를 만들고 있었다. 하지만 이로 인해 모든 문명을 끝장낼 수도 있었다. 오펜하이머는 보어로부터 인생의 모든 순간은 결국 하나로 귀결되고, 그러므로 상보적이라는 말을 듣고 안도감을 느꼈다. (460~461)

오펜하이머슨 그답게 바가바드기타의 한 구절을 인용했다. "인간은 믿음으로 만들어진 존재이다. 한 인간이 믿는 바가 바로 그 자신이다." (488)

하지만 파인만은 잘못 생각하고 있었다. 오펜하이머 역시 그것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트리니티 시험 후 며칠간, 그의 감정은 변하기 시작했다. 로스앨러모스 연구원들은 더 이상 밤늦게까지 일하지 않았다. 그들은 트리니티 시험이 성공한 이상 "장치"는 무기가 될 것이고, 무기들은 군대의 통제를 받을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 "그들은 목표물을 고르고 있었습니다." (522)

 

다섯째, 역사의 교훈

  오펜하이머의 삶과 그의 업적은 현대사에서 중요한 교훈을 제공한다. 원자폭탄의 개발과 사용은 인류 역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이었으며, 이는 우리가 과거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역사를 배우고 기억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달한다.

"현대의 프로메테우스들은 다시 한번 올림푸스 산으로 돌격해 인간을 위해 제우스의 벼락을 가지고 돌아왔다." <라이프(Life)>는 물리학자들이 이제 "슈퍼맨 옷"을 입은 듯하다고 비평했다. (537~538)

"대중 연설을 할 수 있는 능력은 독과 같습니다. 그 능력을 가진 사람에게는 매우 위험하지요." 그와 같은 재주를 가진 사람은 자신의 매끄러운 화술이 효과적인 정치적 보호막을 제공한다고 생각하게 마련이다. (539)

1946년에 진행된 오펜하이머와 트루먼 정부 관료들에 대한 후버의 조사는 반공주의 정치의 전조였다. 그는 "공산주의자", "공산주의 지지자", 또는 "동조자"라는 혐의를 무기로 정적들을 침묵시키거나 파괴했다. (561)

1946년 7월 1일 오전 9시에서 34초가 지났을 때, 역사상 네 번째 원자폭탄이 태평양 마셜 제도의 한 섬인 비키니 환초(Bikini Atoll)의 석호 상공에서 폭발했다. 다양한 크기와 모양의 낡은 해군 선박들이 침몰했거나 엄청난 양의 방사선에 노출되었다. 국회의원, 기자, 그리고 소련을 포함한 각국 외교관들 등 다수의 사람들이 이 시범을 지켜보았다. 오펜하이머는 다른 여러 과학자들과 함께 초대받았지만 참석하지 않았다. (578)

오펜하이머는 1946년에는 국제 통제의 필요성과 투명성을 설파했지만, 1947년이 되자 다수의 핵무기에 의한 국방 계획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던 것이다. (585)

 

이 다섯 가지 메시지는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가 독자들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중요한 교훈들이다. 오펜하이머의 삶을 통해 우리는 과학, 윤리, 정치, 인간성, 그리고 역사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되새길 수 있다.

그래도 오펜하이머는 연구소가 과학뿐만 아니라 인문학까지 아우르는 것이 중요하다고 굳게 믿었다. 연구소에 대한 그의 강연에서 오펜하이머는 과학자들이 과학 자체의 특성과 결과를 보다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인문학이 필수적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나 수학자들은 불과 몇 명만이 그의 의견에 동의를 표했을 뿐이었다. (622)

1950년대 말이 되자 미국의 핵무기 보유량은 핵탄두 300기에서 무려 1만 8000기까지 늘게 된다. 이후 50년 동안, 미국은 7만 기 이상의 핵무기를 만들게 되고 핵무기 프로그램에 5.5조 달러라는 엄청난 자금을 쏟아붓게 된다. 돌이켜 보면, 그리고 그 당시에도, 수소 폭탄 개발 결정은 냉전 시기 군비 경쟁의 전환점이었다. (707)

오펜하이머가 냉전 군사 체제에 맞서 싸웠던 사안은 수소 폭탄만이 아니었다. 1949년이 되자 그는 가까운 미래에 핵 군축과 관련된 상황이 호전되리라는 기대를 버리게 되었다. 그는 여전히 보어의 비전인 전 세계적 개방만이 핵 시대를 사는 인류의 유일한 희망이라고 믿었다. (713)

1953년 가을에 워싱턴은 마녀사냥에 사로잡혀 있었다. 수백 명의 공무원들이 사소한 혐의 때문에 공직에서 물러나야만 했다. 그 누구도, 심지어 대통령조차도 매카시 상원 의원에 맞서려 하지 않았다. 1953년 11월 24일에 매카시는 라디오와 텔레비전을 통해 아이젠하워 행정부가 "애처로운 유화 정책"을 펴고 있다며 맹공을 퍼부었다. (785)

개리슨이 뒤늦게 밝히려고 시도했듯이, 그레이 위원회 청문회는 명백히 불공평했고 터무니없는 불법 행위였다. 청문회 절차를 추진했던 주요 인물을 루이스 스트라우스였다. 하지만 고든 그레이는 위원장으로서 청문회가 공평하게 진행될 수 있도록 조정자의 역할을 할 수도 있었다. (...) 그는 롭의 불법적인 전술을 통제하여 청문회를 공평하게 진행할 수 있었지만, 롭이 절차를 주도하도록 내버려 두었다. (881)

이제 꼭 첩보 활동이 아니더라도, 국가에 대한 충성심에 의심의 여지가 없더라도, 미국의 핵무기 의존이라는 원칙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 자체가 위험한 행동으로 간주되었다. 그러므로 1954년 오펜하이머에 대한 보안 청문회는 냉전 초기에 미국의 공공 영역이 급속히 좁아지게 되는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903)

마침내 1966년 2월에 그녀는 그를 뉴욕의 의사에게 데리고 갔다. 진단 결과는 명확했고 충격적이었다. 키티는 홉슨에게 전화로 소식을 알렸다. "오펜하이머가 암에 걸렸어요." 40년 동안 피운 줄담배가 그의 목에 타격을 주었던 것이다. 아서 슐레싱거 2세는 이 "끔찍한 소식"을 듣고 곧 오펜하이머에게 편지를 썼다. (...) (955)

오펜하이머는 1967년 2월 18일 토요일 오전 10시 40분에 잠을 자다가 세상을 떠났다. 그의 나이는 불과 62세였다. (965)


독서습관 910_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_카이 버드 & 마틴 셔윈_2011_사이언스북스(240713)


■ 저자: 카이 버드 & 마틴 셔윈

카이 버드 Kai Bird는 존 사이먼 구겐하임 재다네, 알리시아 패터슨 저널리즘 펠로십, 맥아더 재단, 록펠러 재단, 토머스 왓슨 재단, 독일 마셜 기금, 그리고 우드러 윌슨 국제 연구 센터 등의 지원을 받았다. 현재 <더 네이션>의 객원 편집자로 활동 중이며, 워싱턴에서 아내와 아들과 함께 살고 있다. 

마틴 셔윈 Martin J. Sherwin은 터프츠 대학교의 월터 S. 딕슨 석좌교수로 영문학과 미국사를 가르치고 있으며 같은 대학교의 원자력 시대 역사 및 인문학 센터를 설립했다. (...) 맥아더 재단, 존 사이먼 구겐하임 재단, 미국 학술원, 국립 인문학 기금, 록펠러 재단의 지원을 받았다. 그는 아내와 함께 보스턴과 워싱턴에서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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