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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습관

[898]하나일 수 없는 역사_르몽드 역사 교과서 비평

by bandiburi 2024. 6. 8.

 르몽드에서 출간한 <하나일 수 없는 역사>는 많은 사진과 함께 새로운 각도에서 역사를 바라보는 재미를 주는 책이다. 우리가 교실에서 배우는 역사란 객관적인 사실인가라는 의문을 던지는 책이다.

역사학자의 역할은 찬양이나 비난이 아니라 설명하는 것이라고 한다. 역사는 현재의 정치나 국제관계에 종속되지 않아야 한다. 역사학자는 오늘날의 이념적 도식에 과거를 끼워 맞추지 않아야 한다. 역사는 오늘날의 감수성으로 판단되어서도 안된다.

이 책 <하나일 수 없는 역사>는 세계의 역사 속에서 있었던 일과 이를 왜곡해서 가르치는 각 나라의 교과서를 비판하고 있다. 많은 학생들과 역사를 가르치는 교육자나 관련 공무원, 역사에 관심 있는 일반인들이 참고하면 좋겠다.

르몽드에서 출간한 <하나일 수 없는 역사>는 우리가 배우는 역사가 과연 객관적인 사실인지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며, 역사학자의 역할과 역사 교육의 문제점을 다루고 있다. 이 책이 우리에게 던지는 주요 메시지를 세 가지로 요약해서 포스팅한다.

 

첫째, 역사는 찬양이나 비난이 아닌 설명의 대상이다

<하나일 수 없는 역사>는 역사학자의 역할이 특정 사건이나 인물을 찬양하거나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건이나 인물이 왜 발생했는지, 어떤 맥락에서 일어났는지를 설명하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역사는 복잡하고 다층적인 맥락 속에서 이해되어야 하며, 단순한 도덕적 판단이나 이념적 도식에 맞추어 해석되어서는 안 됩니다. 이는 역사 연구와 교육에서 객관성과 중립성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역사학자의 역할은 찬양이나 비난이 아니라 설명하는 것이다. 역사는 현재에 종속되지 않는다. 역사학자는 오늘날의 이념적 도식에 과거를 끼워 맞추지 않으며, 오날날의 감수성으로 과거의 사건을 판단하지 않는다. (5)

모든 학생이 국가가 만든 하나의 교과서로 공부하고, 그 교과서에 논쟁적인 질문을 던지지 못하도록 한다면 그것은 역사 교육이 아니다. 그런데도 권력이 앞장서서 국정화를 추진한 것은 역사 인식을 정치적 쟁투의 수단으로 삼으려 하고, 그 과정에서 국민의 기억을 통제함으로써 그것을 의도하는 이들의 생각대로 미래를 만들고자 하는 일이다. (8)

생 라자르 역, 클로드 모네, 1877 (출처: Google Arts &amp; Culture)

1873년 5월 9일 오스트리아 빈 증시의 폭락에서 시작된 경제 위기는 다른 서구 국가에 급속히 확산됐고, 19세기 말 장기 공황으로 이어졌다. 요컨대 상장은 발전의 동의어가 아니다. 성장의 결실은 대단히 불평등하게 분배되었다. 19세기는 '사회문제'의 시대, 다시 말해 노동자들의 빈곤의 시대였다. (17)

 

둘째, 역사는 현재의 정치나 국제관계에 종속되지 않아야 한다

  이 책은 역사가 현재의 정치적 이념이나 국제관계에 종속되어 왜곡되는 문제를 비판한다. 각 나라의 교과서가 자국의 이익이나 정치적 목적에 따라 역사를 왜곡해서 가르치는 사례를 지적하며, 이는 학생들에게 잘못된 역사 인식을 심어줄 수 있다고 경고한다. 역사는 과거의 사실을 있는 그대로 전달하고, 이를 통해 현재와 미래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어야 하며, 정치적 도구로 사용되어서는 안 된다는 메시지를 전한다. 인접해 있는 중국과 일본과의 역사문제에 대한 인식의 차이는 좋은 사례다.

보호무역으로 문이 닫혀 있을 때, 자유무역은 무력으로 강요될 수도 있다. 엄격한 보호무역을 추구한 파라과이는 1865년부터 1870년까지 브라질 우루과이 아르헨티나로 이루어진 삼국동맹과의 전쟁 당시, 무력으로 자유무역을 강요받는 쓰라린 경험을 했다. 영국 경제계의 재정 지원을 받았던 삼국동맹은 파라과이를 영국 경제계에 굴복시키는 데 성공했다. (18)

파라과이는 무역수지 흑자를 이루어 채무 문제에서 벗어났으며, 국민 가운데 일부를 유럽 명문 대학에서 교육받도록 파견할 만큼 형편이 좋았다. (19)

오노레 도미에의 풍자화, 1833 (출처: rawpixel)

1830년 7월 25일, 프랑스 샤를 10세는 왕권을 강화하고 공적 자유를 제한하기 위한 칙령을 공포했다. 그러자 이에 반발한 파리 시민이 들고일어나 사흘 만에 샤를 10세를 왕위에서 끌어내렸다. 이 사건은 폴란드와 이탈리아를 거쳐 벨기에에 이르기까지 전 유럽에서 민중이 정치적 권리를 요구하는 혁명의 열기를 불러일으켰다. (22)

런던 회의, 오도레 도미에 풍자화, 1832 (출처: PICRYL)

1830년, 1848년 혁명과는 달리 파리 코뮌은 프랑스의 몇몇 지방에 일시적으로 영향을 미쳤을 뿐, 다른 유럽 국가에는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한편, 프랑스는 프러시아군의 점령하에서 급하게 선거를 치러 의회를 구성하고 임시정부를 수립한 상태였다. 파리 코뮌은 이러한 베르사유 정부에 홀로 맞섰다. 정규군이 파리를 포위했던 '피의 일요일'(1871년 5월 21~28일)로 인해 파리 코뮌은 역사상 유례 없는 사건이 되었다. (27)

결국 19세기 말에 자리 잡은 '리포터'의 이미지로 상징되는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언론, 전문적이고 엄격한 정통 저널리즘이라는 외피를 쓰고 이른바 '정보 전달자'라는 주요 언론들이 정치적 동기에 따라 움직인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상업적 요구와 제도권 및 경제계의 압력에 무릎 꿇은 언론매체는 세기의 전환기에 그저 상대적인 '자유'를 누렸을 뿐이다. (31)

러시아의 동쪽 끝에는 일본군이 상륙해 동부 지역을 점령했다. 그 후 미국이 동부 시베리아에 군사 개입을 했는데, '백군'을 지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일본의 팽창을 저지하기 위해서였다. 이러한 군사 개입은 발트해 끝에 위치한 '백군'에게만 실질적인 도움이 되었다. 발트해 쪽 백군은 열강의 군사 개입을 틈타 한때 페트로그라드를 위협하기도 했다. 그 밖에는 재정적 물적 지원만이 유효했다. '적군'이 결국 스스로의 힘으로 승리를 거머쥐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 외세 개입은 볼셰비키를 '러시아 영토의 수호자'로 만드는 중대한 결과를 초래했다. 이것이야말로 1920년에 레닌이 강조했던 방이다. (45)

오늘날에도 여전히 베르사유조약은 각국에서 저마다 다른 취급을 받고 있다. 독일 교과서에서는 독일에 가해진 가차 없는 제재를 강조하는 반면, 영국 교과서에서는 프랑스의 보복주의적 태도를 강조한다. 러시아에서는 신생 소비에트연방공화국이 파리 평화회의에 초대받지 못한 점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서로 다른 이 해석들은 역사적 일화를 구성하는 데 각국의 기억이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 보여주는 사례이다. (46)

셋째, 역사는 오늘날의 감수성으로 판단되어서는 안 된다

  <하나일 수 없는 역사>는 역사를 오늘날의 감수성이나 가치관으로 판단하는 것이 위험하다고 경고한다. 과거의 사건과 인물은 그 당시의 사회적, 문화적, 정치적 맥락 속에서 이해되어야 하며, 현대의 기준으로 평가하는 것은 왜곡된 해석을 초래할  수 있다. 이는 역사 연구와 교육에서 시대적 맥락을 고려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메시지를 전달하며, 학생들과 일반인들이 역사를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다.

아르메니안인 여정(출처: PICRYL)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동맹국 편에 섰던 오스만 정부는 전쟁을 통해 남부 캅카스에서 러시아인들을 몰아내길 바랐다. 그러나 이 계획은 완전히 실패했고, 아르메니아인들에게 실패의 모든 책임이 돌아갔다. 이들이 오스만제국을 배신했다는 것이다. 아르메니아인들을 시리아의 사막지대에 이주시키라는 명령이 떨어졌고, 물과 식량이 부족한 그곳에서 100만 명 이상의 아르메니아인이 목숨을 잃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한 세기가 넘는 시간 동안 터키는 이 같은 대량 학살을 부인해 왔으며 (...) (49)

터키의 아르메이나인 학살 부인에 대한 비난 시휘(출처: flickr)

그러나 대량 생산으로 인한 원가 하락은 내수 시장과 수출에만 도움이 되었을 뿐이다. 자본주의를 신뢰했던 테일러는 임금 정체와 노동자의 구매력 부진의 가능성을 고려하지 않았다. 또한 이로 인해 국내 수요가 감소하면서 상품의 과잉생산이 초래되고 결과적으로 경제 위기를 야기할 수 있다는 결론을 예상하지도 못했다. (57)

프랑코 장군파에 맞선 공화파는 소련의 도움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소련의 비밀정보기관은 프랑코 장군파뿐 아니라 무정부주의자와 트로츠키주의자와도 맞서 싸우고 있었기 때문에 그 도움은 미미한 수준이었다. 프랑스 인민전선 내각은 이탈리아와 독일의 쿠테타군 지원으로 에스파냐가 유린당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영국의 압력으로 '불간섭' 입장을 천명했다. 이러한 프랑스의 위선적 태도에 분노해, 전 세계 좌파운동가 3만 5,000명이 국제여단 소속으로 공화파 편에서 싸우다 그중 1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하지만 이러한 희생에도 불구하고 연이은 공격으로 점차 에스파냐 전역을 점령해 들어오는 파시스 세력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73)

1939년 8월 23일 밤부터 24일 새벽, 모스크바 크렘린에서 소련 외무장관 뱌체슬라프 몰로토프와 독일 제3제국 외무장관인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가 독소불가침조약을 맺었다. 이 조약에는 양국이 폴란드를 분할통치하고, 소련이 루마니아의 베사라비아 및 발트해 연안국을 병합하는 것을 승인하는 내용이 담긴 비밀의정서도 포함되어 있었다. 소련 지도자들은 1989년이 되어서야 이 비밀의정서의 존재를 인정했다. 독일의 목적은 분명했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얻은 교훈대로 나치스 독일은 유럽 정복에 성공하기 위해서는 동시에 두 전선에서 전쟁을 하는 상황은 피해야 했다. (74)

 

이 세 가지 메시지는 "하나일 수 없는 역사"가 역사 연구와 교육에서 객관성과 중립성을 유지하고, 역사를 왜곡하지 않으며, 시대적 맥락을 고려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핵심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페탱과 히틀러 (출처: Wikimedia Commons)

그 후 1940년 7월 10일 프랑스 남부의 비시에서 하원과 상원 의원들은 국회를 열어 투표를 통해 페탱에게 전권을 위임했다. (...) 비시 정부는 휴전협정을 명목으로 독일에 천문학적인 금액을 지불하고 셀수 없이 많은 생산물을 보냈다. 이 외에도, 기업인들은 독일 자본과 제휴가 늘어나자 협력정책의 일환으로 이루어지는 사업에 투자했다. 유대인 박해와 관련해서도 페탱 원수는 독일이 요구한 것보다 더 심하게 유대인을 박해했다. (80)

1944년 급진적 자유주의 이론가 프리드리히 하이에크는 <노예의 길>에서 국가의 개입은 불가피하게 개인의 자유를 제한하고, 자유로운 시장의 운영을 방해하며, '전체주의의 출현'을 초래한다고 주장했다. 그로부터 3년 뒤 해리 트루먼 미국 대통령도 히틀러와 스탈린을 동급으로 간주했다. 1947년 트루먼 대통령은 "모든 전체주의 국가들 사이에는 털끝만큼의 차이도 없다."고 확언했다. (86)

사실 70년간의 공산주의 실험이 무조건 부정적인 교훈만 남긴 것은 아니다. 공산주의 시절 소련을 방문한 사람들은 누구나 러시아 민족의 우수한 문화 수준과 무상 대학교육, 저렴한 주택 가격에 경탄을 금치 못했다. (...) 반공주의 선전 공세 앞에 그저 침묵으로 일관하며, 공산주의 실험들이 이룩한 성과를 조용히 은폐하는 것은 결코 온당치 못한 일이다. 공산주의 실험의 명암을 정확히 이해하고 분석할 때, 비로소 제대로 된 사회변혁 계획을 수립할 수 있을 것이다. (103)

식민지 경영은 비난받아 마땅하다. 이는 '열등한 민족'이 존재하며 이들을 문명화할 '우월한 민족'이 존재한다는 인간 존재의 불평등성이라는 관념에 근거하기 때문이다. 정신분석학자 프란츠 파농은 자신의 유명한 저서 <대지의 저주받은 사람들>(1961)에서 이렇게 말했다. "식민지 주민을 지칭하는 식민지 개척자들의 언어는 동물학에서나 사용할 법한 용어들이다. 황인정은 기어다니듯이 움직이고, (...) 식민지 지배자들은 식민지에 대해 정확한 단어를 찾으려면 우화집을 꾸준히 참고해야 할 것이다." (118)

세계은행, 서방 선진국과 은행 등에서 대출 형태로 제공된 '개발 원조 자금'은 종종 선진국의 완제품을 구매해야 한다는 조건과 맞물려 있었다. 그런데 선진국의 완제품 가격은 꾸준히 상승했다. 이 같은 상황에 대처하기 위해 후진국 경제는 농업 수출과 광물 채굴을 강화하고, 원자재 가격 상승에 기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1980년대에 카카오나 커피 같은 주로 농업 분야의 원자재 가격이 폭락하면서 후진국들은 과도한 부채 위기에 빠지게 되었다. 결국 국제통화기금은 후진국에 신자유주의 논리를 적용했다. (135)

1968년 한 해는 전 지구적인 저항의 해로 자주 언급되어왔다. 청년들의 저항은 정부와 대학 서열, 가족 그리고 일부 유럽 국가에서는 기업과 교회까지 포함해 모든 권위에 대한 저항이라는 공통된 문화적 양상을 띠었다. 동일한 사상과 구호, 투쟁 방식이 전 세계 곳곳으로 퍼져나갔다. 이러한 흐름을 타고 록에서 팝에 이르기까지 음악은 물론, 라이프 스타일과 문화적 모델과 가치도 함께 확산되었다. (146)

경제학자 프레데릭 로르동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기업들은 자신들이 제공하는 일자리를 스스로 창출할 수 있는 수단을 갖고 있지 않다. 이러한 일자리는 기업들 자신이 당연히 결정할 수 없는 경기의 흐름을 관찰한 결과일 뿐이다. 경기 상황은 기업 외부에서, 다시 말해 고객들의 건전한 소비 욕망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달리 말해 경제활동을 활성화하고 일자리를 창출하는 것은 기업들이 아니라 소비자들의 수요이다. 실업을 타파하기 위해서는, 임금 노동자들이 경제활동에 부담을 주는 '비용'의 큰 몫을 차지한다고 생각하기보다는 임금 노동자들의 급여를 올려서 내수시장의 활기를 회복하는 것이 더 낫다는 것이다. (153)

1970년대부터 특히 칠레의 사회주의자 대통령인 살바도르 아옌데 정권을 뒤엎은 아우구스토 피노체트 장군의 쿠데타(1973) 이후부터, 라틴 아메리카는 신자유주의 정책의 실험장 역할을 하게 되었다. 그 결과 라틴 아메리카는 다른 대륙들보다 더 빨리 신자유주의 정책의 사회적 정치적 영향을 받았다. (...) 1998년 우고 차베스가 베네수엘라에서, 2002년과 2006년 루이스 이나시오 룰라 다실바가 브라질에서, (...) '민주주의를 민주화하고' 사회 진보를 이루려고 노력하는 이 지도자들은 신자유주의가 붕괴시키고자 한 대중 권력의 힘을 복원하고, 제국주의가 흔들어놓았던 국가 주권을 강화하고 있다. (160)

제라르 뒤메닐과 도미니크 레비 같은 경제학자의 주장처럼, 수익성이 최초의 목표는 아니었다 해도 수익성을 중시하는 경제가 가져오는 결과는 다음과 같다. 생산된 부 중에서 금융 수익은 급격히 증가하고, 임금 노동자들의 몫은 감소한다. 세계화는 지구상에서 가장 부유한 10%의 상류층과 기업의 외국 이전 혜택을 받은 중국 같은 신흥 공업국의 중산층에서 이익이 되었다. 반면, 가장 가난한 10%의 선진국의 중산층에게는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인플레이션을 고려하면, 선진국 중산층의 수입은 오히려 침체했기 때문이다. (162)

브뤼닝 총리의 독일에서, 피노체트 장군의 칠레에서, 살라자르 총리의 포르투갈에서 적용된 긴축정책은 경제를 다시 활성화할 거라는 예상을 빗나갔다. 주민들의 생활은 더욱 취약해졌고, 사회는 불안정해졌으며, 경제는 부실해졌다. 그러나 유럽연합은 긴축정책을 단념하지 않았다. 엄격한 긴축정책이야말로 재정 위기에 대한 기적적인 해결책이라고 생각했다. (166)


독서습관 898_하나일 수 없는 역사_르몽드 디플로마티크_2017_휴머니스트(240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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