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임스 퍼거슨의 책 <분배정치의 시대>를 읽었다. 인공지능과 로봇으로 일자리가 감소하는 시대에 남아공의 사례를 들어 기본소득의 필요성을 보여주고 있다. 물질적 빈곤과 실존적 빈곤이 동시에 심화되며 타인의 고통을 대면하기 어려운 시대를 살고 있다.
누구나 이 세계에 함께 살아가고 있다는 존재 자체만으로도 기본소득과 같은 일정한 몫을 요구할 자격이 있다고 주장한다. 자신의 삶을 국가가 아닌 개인이 책임져야 한다며 각자도생의 분위기를 당연하게 여기는 대한민국에서 무엇이 국민의 행복을 위한 길인가 통찰을 주는 책이다.
제임스 퍼거슨의 <분배정치의 시대>가 전하는 주요 메시지를 세 가지로 요약해 포스팅한다.
물질적 빈곤과 실존적 빈곤이 동시에 심화되면서 타인의 고통과 대면하기를 점점 거부하는 한국 사회에서 기본소득이, 이 세계에 현존한다는 것만으로 그 몫을 공동으로 요구할 자격이 있다는 주장이 점점 더 파급력을 갖기를, '나의 빈곤'과 '너의 빈곤'을 연결하는 마주침의 장을 생성해낼 수 있기를 원한다. (26)
(...) 이러한 흐름은 경제발전의 역사적 목적이자 진보정치를 떠받치는 지지대로 오랫동안 간주되어온 임금 노동에 인구 대다수가 충분히 접근할 수 없게 된 상황과 동시에 발생했다. 이 새로운 국면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32)
첫째, 기본소득은 현대 사회에서 필수적이다
제임스 퍼거슨은 남아공의 사례를 통해 일자리 감소 시대에 기본소득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그는 누구나 이 세계에 함께 살아가고 있다는 존재 자체만으로도 기본소득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주장한다. 기본소득은 물질적 빈곤을 완화할 뿐만 아니라, 실존적 빈곤을 줄이고, 사람들에게 최소한의 경제적 안정과 존엄성을 제공할 수 있다. 이는 사회적 안전망을 강화하고, 경제적 불평등을 줄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 오히려 반대로 많은 연구가 현금지급이 구직활동에 필요한 비용을 충당해주거나 곤궁한 지역에 새로운 시장을 창출함으로써 새로운 고용기회를 만들어내고 있다는 긍정적 효과를 증명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현금급여는 사라진 수입원을 비활동 inactivity을 통해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가난, 질병, 교통수단의 부족 등 사람들의 경제활동의 범위를 실제로 제약했던 요인을 완화시켜 줌으로써 새롭게 활력을 불어넣는다고 볼 수 있다. (62)
사실 어떤 상식은 우리에게 '모든 사람'이 생계를 위해 일해야 한다고 말하지만, 명백한 사실은 다수의 미국인이, 어린이들까지 포함한다면 정말로 대부분이 그렇지 않다는 점이다. 그들은 적어도 미국 노동청에서 집계되는 방식의 '일'을 하고 있지는 않다. 대신에 그들은 자신의 노동을 시장가치와 교환함으로써가 아니라 다른 개인, 제도, 혹은 그 양자로부터 할당을 분배받음으로써 살아간다. (72)
이 시스템에서는 사람들의 행동에 대한 어떤 감시도, 어떤 낙인 딱지도, 집으로 불쑥 찾아오는 사회복지사도, 누가 자격이 있는지를 가려내기 위한 고비용의 관료제도 사라질 것이다. 공공근로는 물론 자산조사를 조건부로 하는 현금지급 프로그램들은 정교한 관료제적 정보장치들을 불가피하게 필요로 하고 행정비용에 막대한 예산을 써야하는 반면, 무조건적 현금지급은 상대적으로 절차가 단순해서 더 많은 돈을 수혜자들의 손에 직접 건네줄 수 있다. (84)
푸코에게 통치와 정치란 똑같이 비난보다는 실험, 일반적인 정치이론으로부터 적절한 길을 연역해내는 것보다는 구체적 상황에서 가능한 방법들을 찾아보는 것이었다. (87)
하지만 이 슬로건에는 일반적으로 그다지 주목받지 못한 훨씬 더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 "물고기 잡는 법"을 후렴구처럼 강조하는 이면에는 빈곤의 문제가 근본적으로 생산의 문제이며, 그 해결책은 더 많은 사람을 생산노동에 끌어들이는 것이라는 가정이 함축되어 있다. 이 가정은 분배의 중요성("물고기를 줄 것")을 비웃으면서 지속적인 해결책은 물고리를 단지 먹는 게 아니라 직접 잡음으로써 배고픈 사람을 생산세계로 유인하는 것이어야 함을 암시한다.
'개발'은 더 많은 물고기를 잡고 더 많은 사람을 일하도록 만드는 것이라는 생산주의적 전제는 지식과 무지에 대한 가정들보다는 훨씬 더 깊은 인식론적 수준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앞서 인용한 친숙한 비판들에 도전받지 않는다. (92)
둘째, 타인의 고통을 대면하고 공감하는 사회가 필요하다
퍼거슨은 현대 사회가 타인의 고통을 대면하기 어려운 시대에 살고 있다고 지적한다. 물질적 빈곤과 실존적 빈곤이 동시에 심화되면서, 사람들은 점점 더 고립되고, 서로의 고통에 무관심해지는 경향이 있다. 그는 나의 빈곤과 너의 빈곤이 합쳐져 마주침의 장을 생성하고, 이를 통해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갈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는 공감과 연대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사회적 유대감을 회복하는 데 기여할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노동력 외에는 아무것도 팔 게 없는 사람들이 박탈감을 느끼는 근본 원인은 준비 부족으로 생선 잡는 법을 숙지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라 한때는 자신들을 포용했던 분배적 계약에서 갑자기 제외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그런 견지에서 보자면 감축된 부분을 분배적 계약 안에 편입시키는 작업은 결코 '징후'만을 건드리는 게 아니라 실제로 문제의 근원에 다가가는 것이다. 분배를 누릴 자격이 결핍된 것이야말로 근본 원인인 것이다. (95)
정통 마르크스주의는 항상 노동을 모든 가치의 원천으로 삼고, 프롤레타리아트를 역사의 주인공으로 내세웠다. '무산자' 등급에 매겨지지 못하고 분배적인 생계전략에 기대는 빈자들은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표현에 따르면 '룸펜프롤레타리아트'였고, 인간적 정치적 가치를 별반 지니지 못한 집단으로 묘사되었다. 실제로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전체 논의의 출발점은 생산이라는 물질적 행위다. (105)
우리가 일하고 있는 수많은 환경에서 임금고용의 보편화가 점점 더 헛된 꿈에 불과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이러한 도전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우리는 좌파정치의 지평으로서의 완전고용이 사라지고 있다는 점을 단순한 비극이 아니라 기회로 포착할 수도 있다. (130)
가난한 아이에게는 교육이 필요한데, 이는 우리가 그 아이한테 동정을 느껴서가 아니라 그 교육이 사회에 좋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케인스주의 경제학자가 해고된 노동자들에게 실험보험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그 노동자들이 보험혜택을 받을 가치가 있어서가 아니라 비즈니스 주기에서의 하락 포인트를 만회하기 위해 그들의 경제적 수요를 필요로 했기 때문이다. (139~140)
신자유주의적 구조 조정은 경제성장을 어느 정도 촉진했으나, 이 책의 서론에서 논의했듯 이는 대체로 '고용 없는 성장'이었다. 실업률은 일부, 특히 가난한 저숙련 흑인들 사이에서 40퍼센트까지 추정할 정도로 끔찍하게 치솟았다.
이러한 두 가지 위기의 접합은 아프리카 사회정책을 오랫동안 지탱해온 가족주의 판타지, 즉 전통적 농지를 토대로 한 농촌의 '확대가족'과 '생계부양자'인 남성 임금노동자를 기반으로 한 도시 '핵가족'이라는 두 가지 판타지를 동시에 종식시켰다. (156~157)
생체인식 케이스를 평가하기 위해서는 아프리카에서 현재 진행되는 문서화 작업이 상당히 심각한 문제들을 갖고 있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도 사회에서 가장 가난하고 주변부에 위치한 사람들은 서류를 획득하고 보유하는 데서 상당한 부담을 느끼며, 이 과정에서 실수로 자격을 박탈당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게다가 문서위조 등 공공연한 사기는 자원낭비를 가져올 뿐 아니라 사회적 지급 프로그램에 대해한 정치적 지지를 약화시킨다. 서류를 발급하고 확인하는 과정에서 지방 관리들에 대한 의존이 많아지면서 부패 기회가 증가하며, 혜택을 특정 카드의 보유나 서류증명과 연계한 탓에 급여 수령자에 대한 사회적 낙인 역시 줄어들지 않고 있다. 반대로 생체인식 역학은 무조건적 현금지급의 보편성과 잘 어울리는 것처럼 보인다. (166)
셋째, 국가가 아닌 개인에게 삶의 책임을 전가하는 사회를 재고해야 한다
퍼거슨은 자신의 삶은 국가가 아닌 개인이 책임져야 한다며 각자도생을 조장하는 사회적 분위기를 비판한다. 그는 이러한 접근이 국민의 행복을 저해하고, 사회적 불평등을 심화시킨다고 주장한다. 대신, 그는 국가가 국민의 기본적인 삶의 질을 보장하고, 사회적 안전망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정책을 전환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는 국민의 행복을 증진시키고, 더 포용적이고 공정한 사회를 만드는 데 기여할 수 있다.
현대 산업사회에서 생산노동에 직접 종사하는 사람들의 숫자가 전체 인구 근처에도 못 미친다. 그럼에도 대부분의 사람이 직접 물건을 생산하거나 자신의 노동을 팔아 생계를 꾸리는 게 정상상태라는 생각은 변화들은 생계와 생산의 상식적인 연계에 의문을 던지고 있다. 현 세계의 어떤 관찰자든 이미 알아차렸겠지만 점점 더 많은 물건이 이제는 전문화된 훨씬 소수의 사람들에 의해 생산되는 상황이다. (171)
내가 다른 책에서 '소 숭배'라 칭했을 만큼 레소토 사람들은 소를 현금으로 바꾸는 것을 문화적으로 적대시하는데, 이러한 반감은 피부양자들의 즉각적인 필요와 요구로부터 사진의 자산을 보호함으로써 일하는 동안 축적된 자원이 불가피하게 사라지는 것을 어느 정도 늦출 수 있었다. (181)
물론 기근이 극심할 경우식량을 직접 배분하는 것이 큰 역할을 하겠지만, 이 주장의 요지는 식량부족 상황에서 현금을 제공하는 것이 수급자들이 직접 현금을 받아 자신들의 삶에서 가장 긴요한 부분에 쓰도록 함으로써 시장과 함께 작동할 수 있음을 보이는 것이다. (234)
기본소득 논의는 또한 가장 가난한 시민들이라도 관료제적 장애물이나 잠재적 부패, 온정주의적 분배제도의 남용에 구속되지 않고 접근할 수 있는 경제적 권리들을 만들어내고자 한다. (278)
이 세 가지 메시지는 제임스 퍼거슨의 "분배정치의 시대"가 현대 사회에서 기본소득의 필요성과 타인의 고통에 대한 공감, 그리고 국가의 역할을 재고하는 중요성을 강조하는 핵심적인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국유 기업이 권리를 위임받은 석유자원을 극히 소수의 엘리트가 다국적 기업들과 야합해서 이익을 나눠 갖고, 인구 대다수는 극빈에 허덕이는 상황에서조차 이 나라는 석유자원이 '인민'에 속한다고 자랑스럽게 선언하고 있다. 누군가는 이를 '흑인 경제 권한강화'로 생각하고 싶겠지만, 실제로 권한이 강화되는 사람들은 극소수이며, 인구 대다수에게는 기념할 만한 일이라고는 전혀 없을 것이다. (299)
따라서 기본소득의 한 형태로서의 사회적 지원이란 일차적으로는 국가 내 생득권birthright을 공유하는 사안이다. 그가 주장하기를, 이는 동정의 문제도, 심지어 좋은 정책의 문제도 아니며 권리의 사안이다. "우리는 그것이 단지 사람들이 받아야 할 혜택이 아니라 이 나라의 시민으로서 누려야 할 권리라고 주장한다." (314)
이 서한을 보낸 필자들은 일하지 않는 자에게 돈을 주는 것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주위를 둘러보고 제대로 관찰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나미비아 부자의 자손들은...... 분명 생계를 위해 일하지 않는다. 그들은 부를 물려받고, 손가락 하나 까딱할 필요도 없다. 오늘날 부의 대부분은 상속을 통해 이전된다. 이것이야말로 일을 강조하는 이데올로기가 왜 오류투성이인지 입증하는 것이다. (316)
전 인류의 전 역사를 아우르는 이렇게 광활한 파노라마에서 누가 얼마나 많이 생산했는지, 누구의 고통이 더 큰지를 설명하기란 불가능할 것이다. 유일하게 윤리적이고 현실적인 결론은 그가 강조한 대로 "만물은 모두의 소유다 All belongs to all"라는 것이다. (321~322)
내가 지금껏 분석한 다른 사회보호 제도들에서도 현금지급으로의 전환은 노동과 분리된, 필요를 기반으로 한 소득을 제공하겠다는 의지와 '빈자들'이 스스로 지출을 결정할 때 자신의 이익을 가장 잘 도모할 수 있다는 인정을 함축하고 있다. (332)
2000년대 초반 사회적 지원이 급속히 확대된 시기에 폰도랜드에 머물면서 상황을 관찰했던 그는 지원금이 가난한 농촌 마을의 구매력을 끌어올리면서 새로운 사업을 일으키고, 교육을 향상시키고, 심지어 구직활동을 증가시켰다고 서술했다. 온갖 비방의 대상인 복지급여가 사실상 비참한 지역에 생기를 불어넣고, 사람들을 "주류 사회에, 삶 자체에 더 가까이 가도록" 한 것이다. 그에 따르면 "연금이 지불되는 날은 수치스럽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오히려 이날은 축제처럼 웃음이 넘치고 유쾌한 기운이 감돈다. 소비할 돈이 있을 때 사람들은 가장 인간적임을 느낀다. " (342~343)
독서습관 899_분배정치의 시대_제임스 퍼거슨_2017_여문책(240614)
■ 저자: 제임스 퍼거슨
스탠퍼드 대학 인류학과 교수이자 인문과학부 '수전과 윌리엄 힌들' 특훈 교수다. 1985년 하버드 대학 인류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캘리포니아 주립대학 어바인 인류학과를 거쳐 2003년부터 스탠퍼드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지난 30여 년 동안 아프리카 지역에 대한 광범위한 현지조사와 이론작업을 바탕으로 빈곤, 개발, 이주, 현대성 등에 관한 인류학과 인문사회과학의 논의에 기여해 왔다.
초기의 연구는 미셸 푸코의 권력 통치성 논의를 개발 현장에서 재해석한 작업으로, 국제개발원조가 관료적 권력을 확산시키면서 빈곤에 대한 질문을 기술적 문법으로 치환해온 과정을 탐구했다. 남아프리카 레소토에서 빈곤퇴치를 선언했던 개발원조가 빈민의 삶에 무지한 '반정치 기계'로 살아남은 역설을 해부하고, 쇠락한 잠비아 구리산출지대 노동자들이 농촌으로의 귀환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드러난 젠더와 친족관계의 폭력을 규명한 데서 보듯, 그의 연구는 줄곧 개발, 현대성, 도시화와 같은 개념들을 둘러싸고 조직되는 담론들이 평범한 사람들의 삶과 교호하는 세계로 독자들을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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