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 노예제도가 있던 시절의 흑인들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담은 소설은 많이 있다. <한때 흑인이었던 남자의 자서전>은 노예제도가 사라진 시대에도 사회에 남아 있는 유색인에 대한 뿌리 깊은 차별을 이야기한다.
주인공은 백인 아버지와 그 집의 하인이었던 혼혈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하지만 아버지는 백인 여인과 결혼을 하고 아주 가끔 어머니를 찾는다. 주인공은 혼혈로서 백인과 유사한 피부를 가진 유색인이다.
자신은 백인이라고 생각하며 살았지만 초등학교 시절 선생님의 경솔한 행동(당연한 행동이었을 거다)으로 유색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깨닫게 된다. 그러면서 사회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을 의식하며 살게 된다. 백인들이 경험하지 못하는 세상을 살기 시작한다. 이후 애틀랜타 대학 진학을 위한 여행부터 백인 여인과 결혼할 때까지 주인공의 좌충우돌 경험기가 시작된다.
주인공은 언어에 대한 재능이 있어 스페인어, 프랑스어를 자신만의 노력으로 유창해진다. 피아노에 대한 재능은 그에게 돈을 벌 수 있는 기회를 주고, 백만장자 후원자를 만나 유럽을 여행할 수 있도록 인생의 여정을 이끈다. 하지만 유색인으로서의 정체성은 늘 그에게 삶의 방향에 대해 고민을 던진다.
주인공은 흑인들의 음악에 대한 관심으로 지방을 여행한다. 하지만 이때 마주친 화형 장면은 백인들과 같은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끔찍한 일인지 깨닫게 한다. 그리고 뉴욕으로 돌아와 '돈'을 벌기 위한 사업가로 살아간다. 백인 여자와 사랑을 하며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낼까 고민하는 부분이 긴장감을 준다. 결국 결혼에 성공했지만 그녀는 두 아이를 두고 세상을 떠나게 된다.
제목에 '자서전'이라는 단어가 사용되어 이 소설이 자전적 소설이라고 생각했다. 마치 최근에 읽은 신경숙의 <외딴방>처럼 말이다. 하지만 저자 제임스 웰든 존슨의 삶은 주인공과 다르다. 유색인이면서 문학과 법에 대한 식견을 가지고 음악에도 안목이 있기에 이 소설의 주인공이 탄생했을 것이다. 책의 마지막에 있는 저자의 약력을 보면서 확실히 부모부터 책의 내용과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다. 마음속으로는 저자의 삶이 주인공과 닮아 있기를 바라고 있었다. 모처럼 흑인, 유색인에 대한 소설을 읽는 시간이었다.
아래는 책에서 남기고 싶은 문장과 소감을 포스팅한다.
이 소설의 첫 장면에서부터 독자들은 주인공의 내밀한 의식 공간으로 곧장 안내되어 고백록 같은 그의 담담한 서술에 귀 기울이게 된다. 어머니와 음악과 더불어 행복하게 보낸 코네티컷에서의 어린 시절, 흑인의 정체성이 드러나는 초등학교 교실에서의 충격적인 사건, 백인 아버지에 대한 애증 섞인 신비스러운 기억, 어머니의 죽음과 애틀랜타 대학 진학의 실패가 가져온 좌절, 시가 제조공으로서 첫 사회생활의 경험, 뉴욕에서 다분히 퇴폐적인 보헤미안적 삶과 그럼에도 식지 않은 음악에의 열정, 백만장자 후원자와의 화려한 유럽 여행, 흑인 음악가로서 흑인 사회에 기여하기로 한 그의 비장한 결심과 그에 따른 급작스러운 귀국, 흑인 음악 연구를 위한 그의 활기찬 여정과 결국 그 여정을 중단하게 만든 린치 사건의 충격, 뉴욕으로 돌아와 한 백인 여자를 사랑하게 되고 그녀와 결혼한 후 결국 백인 사업가로 변신하게 된 고통스러운 과정, 주인공의 이 모든 성장과 방황의 이야기를 독자들은 줄곧 그의 심리세계 속에서 함께 머물며 경청하게 되는 것이다. (205~206)
소설의 내용을 잘 요약한 문장이다. 제일 마지막 '해설' 부분에 있다.
어머니의 무릎에 머리를 묻고 불쑥 내질렀다. "엄마, 엄마, 말해줘, 내가 깜둥이야?" 어머니의 얼굴은 볼 수 없었지만 일감이 마루 위로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고, 내 머리에 어머니의 손길이 느껴졌다. (20)
주인공이 처음으로 자신의 유색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깨닫는 부분이다.
그때부터 나는 다른 사람의 눈을 통해 사물을 보게 되었고, 하나의 지배적이고 절대적인 관념, 그 힘과 무게가 점점 더 커져서 결국 거대한 하나의 실체적 사실이 되어버린 그 관념을 통하여 나의 생각이 채색되고, 그 관념에 의하여 나의 말이 지배되고, 그 관념에 따라 나의 행동이 제한을 받게 된 것이다. (24)
유색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깨닫게 된 이후 자신의 말과 행동, 생각은 이 정체성의 영향을 받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나는 <톰 아저씨의 오두막>을 노예제도의 공정하고 진실한 파노라마라고 말하는 것이 결코 지나친 주장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어찌되었건 그 책은 내가 누구이며 내가 무엇인지, 우리나라는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등의 문제에 대해 눈을 뜨게 해 주었다. (44)
흑인의 삶을 담은 소설이 주인공에게 자신의 객관적 위치에 대한 의미를 부여하기 시작한다.
오른손으로 자주 깔끔한 반음계로 건반의 반을 휩쓸었는데 반음계의 조화가 너무나 훌륭해서 그 기량을 구사할 때마다 청중들에게 즐거움과 놀라움 같은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이것이 바로 래그타임 음악이었다. (96)
래그타임 음악이란 장르를 처음 접하게 되었다. 유튜브를 통해 래그타임 피아노곡을 들어본다. 아프리카계 아메리칸 문화에 영향을 받아 래그(Rag) 리듬과 당김음을 특징으로 한다. 1895년부터 1918년까지 전성기를 누렸던 음악이라고 나무위키에 정의되어 있다. 이 소설이 1912년에 출간되었으니 꼭 이 시기에 해당된다.
이런 식의 생활이 정말 이상적으로 느껴져서 나는 어느 날 그에게 파리에 얼마나 머물 생각이냐고 물어보았다. 그의 대답은 간단했다. "아, 그야 지칠 때까지지." 나는 어떻게 파리에 지치는 일이 가능할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126)
그는 뉴욕의 끔찍한 생활로부터 나를 구해주었고 여행을 함께하며 그가 아는 사람들과 교제할 수 있는 기회를 줌으로써 나를 세련된 사회인으로 만들어주었다. 반면에 나는 그에게 인생의 모든 것을 요약한 무엇처럼 보이는 것, 그가 두려워하는 그 시간이라는 것을 처치해 주는 주요 수단이 되어주었다. 이제 돌이켜보면 그가 항상 피하고 건너뛰고 지워버리려고 했던 것은 시간이었다. (137)
유한계급에 떠오르는 문장이다. 스스로 노동하지 않아도 자본이 충분한 사람들은 '시간'이 가장 두려워하는 대상이라는 문장이 흥미롭다. 지루함과 무료함이 아니었을까. 그래서 주체할 수 없는 시간을 소일하는 방법이 유한계급의 주요 관심사가 아니었을까. 그들이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했던 일들이 과학이나 문학 등의 결과물로 우리에게 전해지고 있다고 생각된다.
현대 문명은 대중 교육의 수단으로 대중의 무지에 타격을 가했소. 결국 무지를 무정부주의와 사회주의, 태업, 부자와 빈자 간의 증오, 일상적 불만감으로 바꾸어놓은 것 외에 한 일이 무엇이요? 마찬가지로 현대의 박애주의가 요양소와 병원을 통해서 고통과 질병에 타격을 가했고. 그것이 고통받는 사람들의 생명을 연장시켜 준 건 사실이지만 동시에 유약함과 정신이상에 대한 부담을 미래 세대들에게 물려주고 있지 않소. (...) (140)
대중 교육으로 나타난 결과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이다. 사회 발전의 과정이 아닐까. 사람들이 교육으로 세상을 이해하고 자신의 길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서로 간에 갈등과 경제적 사회적 불평등은 불가피하다. 다만 국가적인 차원에서 사회 구성원 모두가 최소한의 생존을 할 수 있도록 지원은 필요하다.
또한 의료기술의 발달이 긍정적인 측면과 함께 미래 세대들에게 부담을 전가한다는 부분은 생각해 볼 여지가 있다. 구구팔팔이라는 말처럼 누구나 건강하게 살기를 원한다. 그렇지 않고 타인의 도움에 의지해야 하는 생명 연장은 결국은 미래 세대의 부담이 된다. 공감한다.
우리가 믿는 종교도 우리가 독창적으로 만들어낸 게 아닙니다. 우리는 위대한 인종이죠. 오늘날 이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인종임에 틀림없소. 하지만 우리는 우리가 과거 인종들의 더미 위에 서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오늘날의 이 지위를 덜 오만하게 즐길 줄 알아야 할 거요. 우리는 그저 게임에서 승자의 순서를 누리고 있을 따름이오. 그리고 그 상태에 오랫동안 익숙해진 게 사실이지요. 하지만 인종적 우월성이란 역사의 시기 문제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155)
백인 우월주의에 대한 비판이다. 백인이 주인 국가가 세계적 승자의 위치를 가졌다고 해서 자신들이 역사적으로 늘 우월했다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팩트를 기반으로 주장한다. 그렇다. 한때는 이집트가, 혹은 중국이 문명을 이끌었다. 그리고 유업으로 넘어가 스페인과 영국이 세계를 이끌었다. 이후로 점차 미국이 주도권을 잡아 현재까지 이르고 있다. 결과만 보고 백인이 흑인보다 우월하다는 주장이 터무니없음을 잘 보여준다.
'대집회'가 끝나자 나는 열정을 가득 담은 채 집회가 열렸던 그 부락을 떠났다. 나의 마음은 예술적 열정으로, 말하자면 영감에 사로잡힌 그런 상태에 놓여 있었다. 직업을 위해 어딘가에 정착을 해서 머릿속에 가득한 생각들을 표현해 낼 마음의 준비가 다 되어 있었고 또 그러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172)
음악에 대한 열정으로 자신의 미래에 대한 방향이 정해졌다. 누구에게나 이런 영감에 사로잡힌 순간이 올 것이다. 자주 경험할수록 좋은 것 아닐까.
모멸감과 수치감이 엄습해 왔다. 우선 내가 그렇게 다루어질 수 있는 종족의 일원이라는 사실이 수치스러웠다. 또한 전 세계에 민주국가의 위대한 예로 알려진 이 나라가 인간을 산 채로 태워 죽일 수 있는 유일한 문명국(유일한 나라는 아니라 할지라도)이라는 사실이 수치스러웠다. 가슴이 쓰려왔다. (177)
미국이 민주주의와 문명국가라는 사실이 유색인들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런 용어는 백인들에게만 적용되고 있다. 주인공에게 눈앞에서 흑인이 화형을 당하는 장면은 커다란 충격으로 다가왔다. 초등학교 때 유색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어쩔 수 없이 알게 되었던 충격보다 더 컸다.
우리의 몇 년 안 된 짧은 결혼 생활은 참으로 행복했다. 아마도 그녀가 나보다 더 행복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결혼 후에도 그녀가 나에게 쏟아붓는 그 풍요로운 사랑에도 불구하고 나에게는 한 가닥 두려움이, 뭐라 설명할 수 없고 근거도 분명치 않지만 결코 나를 떠나지 않는 새로운 두려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197)
백인이 아닌 유색인이기 때문에 백인 아내와 결혼해 그녀의 사랑에도 불구하고 막연한 두려움이 주인공의 마음에서 떠나지 않았다고 고백하는 부분은 미국에서 유색인으로 살아가는 어려움을 내포하고 있다.
독서습관 834_한때 흑인이었던 남자의 자서전_제임스 웰든 존슨_2010_문학동네(240203)
■ 저자: 제임스 웰든 존슨
1871년 미국 플로리다 주 잭슨빌에서 태어났다. 1894년 애틀랜타 대학을 졸업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스탠턴 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동시에 독학으로 법학을 공부하기 시작해 1898년 플로리다 주 최초로 흑인 변호사 자격을 취득했다. 서른 살이 되던 해 동생 로저먼드와 함께 공연회사에 들어가 브로드웨이를 무대로 한 200여 편의 뮤지컬 곡을 작사했다.
정식으로 작가의 꿈을 이루고자 컬럼비아 대학에서 문학을 공부하기 시작하며 유명한 학자이자 비평가인 브랜더 매튜스에게 지도를 받는다. 이때 <한때 흑인이었던 남자의 자서전>의 처음 두 장을 쓰기 시작했다.
1906년 루스벨트 대통령에 의해 베네수엘라 영사에 임명되었다. 1909년에는 니카라과 총영사직을 맡았고 외교관으로 활동하면서 꾸준히 시를 발표했다. 그리고 1912년 한 흑백혼혈인의 이야기를 담은 <한때 흑인이었던 남자의 자서전>을 익명으로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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