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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습관

[833]외딴방_1980년대 초와 현재가 교차하는 신경숙의 자전적 장편소설

by bandiburi 2024. 1. 31.

1979년에서 1980년대 초 사이에 대통령이 바뀌고 서울의 봄이 오던 시절, 저자 신경숙이 경험했던 사실과 픽션이 어우러진 소설 <외딴방>을 산업화 시대를 회상하며 읽었다. 정치적으로 혼란의 시기에 생존을 위해 농촌에서 서울로 상경한 노동자들의 삶을 볼 수 있다.

저자는 '외딴방'에서 외사촌과 큰오빠와 함께 살았다. 가난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사람들, 학업을 통해 자신의 꿈을 찾아가는 사람들이 온몸으로 인권에 대한 개념이 희박했던 시절에 과도한 노동을 견뎌내며 삶을 억척스럽게 이어간다.

시간적으로 지금으로부터 그리 멀지 않은 시대에 이 땅에서 있었던 일이다. 40년이란 세월의 간극을 두고 있는 그 시절, 현재와는 비교할 수 없는 사회적 문화적 환경을 간접 체험할 수 있다. 그 시기를 경험한 세대와, 경험 하지 못한 세대의 느낌은 많이 다를 것이다. 

요즘은 한 자녀를 둔 가정이 많지만 그 당시는 자녀가 많았다. 그래서 그중 장남의 역할은 컸다. <외딴방>에서도 큰오빠란 장남이 짊어져야 했던 무게를 보여준다.  또한 노동자의 입장에서 쓴 노동소설은 아니지만 저자가 생존을 위해 공단에 일하며 경험한 생생한 상황을 글로 풀었다. 노동자들이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얼마나 많은 희생을 했야 했는지 볼 수 있다. 

저자에게 희재언니는 큰 의미를 갖는다. 그녀의 존재가 왜 저자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지 소설의 마지막에서야 드러난다. 희재언니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소설의 종반까지 저자는 희재언니의 죽음에 대해 언급하기를 주저한다. 왜냐하면 희재언니의 죽음에 자신도 모르게 일조했다는 자책감이 있기 때문이다. 저자에게 커다란 트라우마를 남긴 사건이었다. 소설은 저자와 희재언니의 죽음의 관련성을 고백하기 위한 과정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다음은 소설의 내용을 잘 드러내주는 문장을 인용하며 소감을 포스팅한다.


열여섯에, 그 파란 대문집 마루에 앉아 오빠의 편지를 기다리다가 내 발바닥을 쇠스랑으로 찍어버렸던 열여섯에, 나는 생은 독한 상처로 이루어지는 거라는 걸 어렴풋이 느꼈다. (25)

저자의 삶에 대한 복선처럼 이 문장이 초기에 배치한다. 

훗날, 살아가는 피로와 관계의 부재 속에 처절하게 외로워졌을 때도, 그날 밤 외사촌이 들고 있던 화보 속의 새들, 백로들, (...) 서로 올망졸망 기대어 숲을 아름다이 잠으로 뒤덮고 있던 백로들의 무리를 내 눈으로 보러 가겠다는 마음 버리지 않았다. (49)

현실과 꿈의 대비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미래에 대한 희망으로 오늘을 살아낸다. 

열여섯의 나, 외딴방에 들어서서 창을 연다. (...) 보자기만한 창은 공터 건너 전철역과 마주하고 있었는데 (...) 오 분도 안 되어 사람들은 어디론가로 다 스며들고 세 갈랫길 앞은 텅 빈다. (50)

열여섯이란 나이와 외딴방이 반복되어 언급된다. 저자에게 공단에서의 경험을 시작한 열여섯은 의미가 크끼 때문이다. 

광화문과 중앙청 1980.10.14 (출처: Wikimedia Commons)

겨우, 스물셋의 청년이, 저도 동사무소 근무하랴, 밤에 학교 가랴, 정신이 없는 청년이, 외사촌이 먼저 기차 안으로 들어가자 열여섯 동생의 손에 돈을 쥐어준다. (52)

오늘의 스물셋은 대학생이거나 취업준비를 하며 부모에게 의지하며 사는 시기로 간주된다. 외딴방에 살던 시절의 스물셋인 큰오빠는 부모의 역할을 했다. 방위로 군복무를 하면서도 학원 강사로 돈을 벌어야 했고, 낮에 일하면서 밤에 학업을 이어가면서도 동생들을 경제적으로 지원해야 했다. 상상만으로도 마음을 짠하게 만드는 문장이다. 

우리가 숙련공이 되어갈수록 외사촌과 나의 이름은 없어진다. 나는 스테레오과 A라인의 1번이고 외사촌은 2번으로 불린다. (64)

인간의 삶을 편리하게 만들고, 문화적으로 윤택하게 만들기 위한 기기를 만드는 노동자들이 있다. 하지만 공장에서 그들은 인격적으로 존중받는 존재가 아니다. 단지 물건을 만드는 기계의 한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그들은 이름이 아닌 번호로 불린다. 인간 소외의 전형적인 사례다.  

문학은 삶의 문제에 뿌리를 두게 되어 있고, 삶의 문제는 옳은 것과 희망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옳지 않은 것과 불행에 더 문제가 있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희망 없는 불행 속에 놓여 있어도 살아가야 하는 게 삶이질 않은가. (67)

희망이 없어 보이는 불행한 환경 속에서도 우리는 삶을 살아내야 한다. 영원한 불행은 없기 때문이다. 저자의 삶도 어두운 터널을 지나 현재에 도달했다. 생로병사와 희로애락은 삶의 양념이 아닐까. 

시골에선 자연이 상처였지만 도시에선 사람이 상처였다는 게 내가 만난 도시의 첫인상이다. 자연에 금지구역이 많았듯이 도시엔 사람 사이에 금지구역이 많았다. 우리를 업수이 여기는 사람, 다가가기가 겁나는 사람, 만나면 독이 되는 사람...... 그러나 그리운 사람. (107)

도시로 몰려드는 사람들, 관계의 단절, 이따금 들려오는 극단적 사건사고, 무미건조한 군상들의 모습 등 도시에서 사람이 사람에게 상처였다는 말을 설명할 수 있다. 사람이 사람을 무서워하는 곳이 도시다. 

최홍이 선생이 소설을 써보는 게 어떻겠느냐는 말 대신 시를 써보는 게 어떻겠느냐고 했으면 나는 시인을 꿈꾸었을 것이다. 그랬었다. 나는 꿈이 필요했었다. (176~177)

저자에게 최홍이 선생님의 역할은 컸다. 그의 삶을 대하는 태도는 그녀에게 큰 힘이 되었다. 특히 꿈을 보여주었다. 나이에 관계없이 누구나 꿈을 필요로 한다. 

살아 있다는 것. 우리가 그 골목에서 간이숙박소 같은 삶을 살았다고 해도, 중요한 것은 살아 있다는 것이야. (...) 언니가 이 세상의 어느 공기 속에서 아침마다 눈을 뜨고 숨을 쉬며 악다구니를 쓰며 살아가고 있었다면...... 나는 내 열여섯에서 스물까지의 시간과 공간들을 피해오지 않았을 거야. (221)

희재 언니의 죽음과 함께 저자의 열여섯에서 스물까지의 시간은 사라졌다. 이 소설을 쓰면서 저자의 내면에 있던 희재 언니의 짧은 삶과 죽음은 온전히 글로 옮겨졌다. 그리고 사라졌던 저자의 시간은 복원되었다. 

마음을 열고 살아 있는 사람들을 생각해. 지난 이야기의 열쇠는 내 손에 쥐어진 게 아니라 너의 손에 쥐어져 있어. 네가 만났던 사람들의 슬픔과 기쁨들을 살아 있는 사람들에게 퍼뜨리렴. 그 사람들의 진실이 너를 변화시킬 거야. (404)

죽은 희재 언니가 살아있는 저자에게 남기는 메시지다. 

오랫동안 나에게 중요한 모든 운명의 모습은 희재언니의 모습을 띠고 있었다. 그녀는 내게 밀물이었고 썰물이었다. 그녀는 내게 희망이었고 절망이었다. 그녀는 내게 삶이었고 죽음이었다. (423)

해설 中

<외딴방>의 주된 이야기는 '나'가 유신말기에 구로공단에서 일하면서 '산업체특별학급'에 다니던 삼년 남짓의 세월에 관한 것이다. 그 서사를 촉발하는 계기는 당시의 학교 친구 하계숙이 지금은 유명한 소설가가 된 '나'에게 어느 날 전화를 걸어온 일이다. (434)

저자는 하계숙을 통해 드러나지 않았던 열여섯에서 스물까지의 이야기를 소설로 풀어낸다. 

'나의 시골집은 결코 부농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가난하지도 않았다. "(...) 그런데 도시로 나오니 하층민이다."(58쪽) 하지만 이 '모순'이야말로 농촌의 희생을 전제로 삼은 저임금정책, 그리고 국민들의 향학열을 사회적 길들이기 및 경제적 착취에 이용하는 교육제도와 사회구조가 드러나는 한 가지 양태이다. (436)

국민들의 희생 속에 현재의 대한민국이 있다. 국가의 잘못된 정책으로 이용당하고 착취당했던 과거를 우리는 책으로 보고 되풀이되지 않기를 바란다. 사회 구성원들의 의식 수준과 함께 비판과 격려가 필요하다. 기득권자들이 국민을 두려워해야 한다. 우리의 현실을 보자. 밝지만은 않다. 

'나'의 이런 성공에는 본인의 재능과 인내라든가 최홍이 선생같은 분을 만난 행운 등 여러 가지가 작용한다. 그러나 가장 직접적인 공헌은 먼저 서울에 와 있다가 '나'와 외사촌을 맡아 생활을 꾸려가는 큰오빠의 헌신적인 뒷바라지와 엄격한 보호일 것이다. (437)

포스트모더니즘 계열의 서사이론은 대체로 줄거리의 깔끔한 마무리를 수상쩍게 본다. 통속문학의 '해피 엔딩'은 더 말할 것도 없고 비극적 결말이라도 어떤 완결감을 주는 끝맺음은 그 자체가 이데올로기적 봉쇄 내지 '닫음(closure)'에 해당한다고 보는 것이다. (446)


독서습관 833_외딴방_신경숙_2013_문학동네(240131)


■ 저자: 신경숙

서울예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1985년 중편 <겨울 우화>로 문예중앙 신인문학상을 수상하며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소설집 <겨울 우화> <풍금이 있던 자리> <감자 먹는 사람들> <딸기밭> <종소리> <모르는 여인들>, 장편소설 <깊은 슬픔> <기차는 7시에 떠나네> <바이올렛> <리진> <엄마를 부탁해>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 짧은소설 <이야기> <달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 산문집 <아름다운 그늘> <자거라, 네 슬픔아> <산이 있는 집 우물이 있는 집>(공저)이 있다.

한국일보문학상,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 현대문학상, 만해문학상, 동인문학상, 21세기문학상, 이상문학상, 오영수문학상, 호암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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