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공부는 타인에 의해 조작될 필요가 거의 없는 인간 활동이다. 모든 공부는 수업의 결과가 아니다. 도리어 그것은 타인의 개입 없이 의미 있는 상황에 참여한 결과다. (...) 그러나 학교는 개인의 인격이나 인식능력의 향상이 학교의 정교한 계획과 조작과 같은 것이라고 믿게 한다. (88~89)
공부, 배운다는 의미를 잘 정의했다. 수업의 내용은 지극히 제한적이다. 살아가는 과정에서 마주치는 사람과 환경 속에서 능동적으로 참여한 결과가 공부다. 항상 호기심을 가지고 주어진 상황을 개선하고 효과적으로 처리하기 위해 생각하는 자체 배우는 과정이다.
전통적으로 소외란, 일이 임금노동으로 변한 것의 직접적 결과였다. 임금노동은 인간이 창조하고 재창조되는 기회를 박탈했다. 그런데 지금 청소년들은 학교에 의해 사전에 소외되고 있다. 왜냐하면 학교는 학교 내부의 시장에 내놓은 상품이라고 생각되는 자기 지식의 생산자이자 소비자인 양 가장하면서 청소년들을 소외시키기 때문이다. 학교는 소외를 인생의 첫 단계로 만들어, 그 결과 교육의 현실성을 제거하고 노동의 창조성을 박탈한다. (102)
학교의 주체는 학생이어야 하지만 학교가 주체가 된다는 점은 정확한 지적이다. 교육의 주체는 학생이 돼야 한다. 학생이 과정을 정하고 각 과정에서 자신의 창의성을 발휘하며 성장해야 한다. 하지만 현실은 학교가 과정을 계획하고 학생은 정해진 해에 다음 학년으로 진행하는 컨베이어 벨트 위의 상품처럼 간주된다.
관료제도는 일을 만들어내고, 의례의 준칙을 결정하며, '지배층의 진리'를 날조하고 보완하는 데 관심이 있다. (128)
이 문장은 교육을 넘어 우리 관료 사회를 잘 표현하고 있다. 국가의 시스템이 국민을 위해 돌아가야 하지만 기득권을 가진 지배층의 이익을 위해 오용되는 면이 드러나고 있다. 이 또한 학교 교육의 폐단이다. 경쟁과 성적에만 치우친 교육의 결과다. 성적 중심의 경쟁에서 우위를 차지한 사람들이 삶에 대한 깊은 철학 없이 우월감에 취해서 일을 할 때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생각한다.
우리의 현 교육제도는 교사의 목표에 봉사하는 것이다. 우리가 필요로 하는 관련구조는 모든 사람이 자신의 공부와 타인의 공부에 기여하는 것에 의해 스스로 정의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144)
공부하고자 하는 사람은, 정보와 그 이용에 대한 다른 사람으로부터의 비판적 대응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정보는 사물과 사람 속에 축적된다. 훌륭한 교육제도에서는 공부하는 사람이 사물을 마음대로 이용할 수 있어야 하지만, 정보를 갖는 사람에게 접근하기 위해서는 그밖에 타인의 동의를 필요로 한다. (156)
<학교 없는 사회>가 출간된지 몇 십 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우리에게 던지는 시사점이 많다. 정보가 사물과 사람 속에 축적된다는 말은 반대로 사물과 사람을 통해 정보를 얻고 활용하는 능력이 공부라는 점이다. 사람은 주어진 정보에 대해 소화하고 자신의 생각을 예민하게 한다. 그리고 비판적인 시각으로 정보를 바라본다. 사물에 대해서도 학교라는 틀 안에 가두지 말고 박물관, 미술관 등 다양한 것을 보고 상상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필요하다.
널리 공유된 기능은 대부분의 경우, 그 기능을 보여주는 사람이, 우리가 언제나 필요로 하고 갖게 되는 유일한 인적 자원이다. 외국어, 운전, 요리, 의사소통기구의 사용법은 우리가 그것들에 대해 배웠을 때, 우리는 정식으로 배웠다거나 공부했다고 거의 의식하지 않는다. (172)
외국어를 배우기 위해 학교와 학원을 다니며 수많은 시간을 투자하는 것이 현실이다. 하지만 저자는 운전하고 요리하는 것처럼 외국어도 의식하지 않고 생활 속에서 자연스럽게 배우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우리가 필요로 하는 대부분의 대상은 일상에서 발생하고 일상에서 채워진다. 특별한 경우는 전문가의 도움이 필요하겠지만 공부라는 것을 학교의 틀에 가둘 필요가 없다는 점이다.
지금 자격증은, 자신의 지식을 타인과 공유하는 시민적 권리를, 지금은 학교의 피고용자에게만 부여되는 학문의 자유라는 특권으로 바꾸어 교육의 자유를 축소시키는 경향이 있다. (175)
자격증을 향한 배움의 과정에 대한 비판이다.
학교는 역할 묶음에 의해 전문직을 왜곡시키는 유일한 제도가 아니다. 병원은 가정에서의 치료를 더욱 어렵게 만들고 있고, 이어 병원화를 환자에 대한 하나의 이익으로 정당화한다. (...) 법정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 이는 교회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193)
교육 서비스, 법률 서비스, 의료 서비스 및 종교라는 것이 사회가 발전하며 점차 우리 자신으로부터 멀어지고 소위 전문가라는 집단에 의존하는 현상을 비판하고 있다. 개개인은 여러 서비스를 받기 위해 전문가들에게 의존하며 자신의 고유의 능력을 바라보지 않는다. 건강에 대해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을 바라보기보다는 의사나 약사에게 의지한다. 심지어 교회에 가서 목사나 신부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것이 종교가 아니다. 종교는 일상에서 자신이 주체가 되는 일이지만 어느 순간 규칙적으로 교회에 가서 목사의 지도를 받는 행위가 되었다.
마지막 3부로 이어진다.
https://bandiburi-life.tistory.com/2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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