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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습관

[796]다른 의견을 가질 권리_칼뱅의 독재에 맞서 세르베투스 살인에 항의한 카스텔리오의 용기

by bandiburi 2023. 10. 25.

가톨릭으로부터 종교적 자유를 주장한 종교개혁하면 떠오르는 인물이 루터와 칼뱅이다. 하지만 <다른 의견을 가질 권리>는 16세기 중순 스위스 제네바에서 기독교 독재를 행했던 칼뱅의 횡포에 대한 이야기다. 종교국을 앞세워 개인의 자유를 철저히 통제한 칼뱅의 독재에 대항해 자신의 소신을 밝힌 카스텔리오의 인문주의자적 용기를 높이는 책이다. 

스무살 청년 세르베투스가 자신의 종교적 신념을 밝혔다는 이유로 살아있는 채로 화형을 집행한 인물이 칼뱅이다. 성실한 지식인이자 무자비한 종교인으로서의 칼뱅을 잘 보여주고 있다.  

억압과 동시에 정신의 역동적인 반항이 자라난다. 정신은 억눌리고 짓눌릴수록 폭발물로 변한다. 모든 억압은 언젠가는 폭동을 분출시킨다. 인간의 도덕적인 자주성은 지속적으로 - 영원한 위안이다! - 파괴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19)

인간의 역사는 억압이 있으면 반항이 있었다. 영원한 억압은 없다는 점이 우리에겐 위안이 된다. 인류 공통의 방향성이다. 

 

 

카스텔리오는 이 모든 인문주의자들 중에서 유일하게 앞으로 나서서 자신의 운명에 단호하게 맞섰던 사람이다 - 이 점이 그에게 시들지 않는 명성을 가져다주었다. (22)

칼뱅이 카스텔리오의 강의와 출판을 금하고 책을 불태웠음에도 그의 용기있는 행동이 지금까지 전해질 수 있다는 것은 위안이다. 

카스텔리오 (출처: snl.no)

죄 없는 미겔 세르베투스의 살해에 대한 카스텔리오의 항의를 수천 배나 더 유명한 칼라스Calas 사건에 대한 볼테르의 항변이나 드레퓌스 사건에 대한 졸라의 항변과 비교하려 들지 말라. 이러한 비교는 카스텔리오가 한 행위의 도덕적인 높이에 전혀 미치지 못한다. (23)

칼라스 사건과 드레퓌스 사건에 대해 변호하는 일도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하지만 칼뱅의 기독교 독재가 실행되었던 제네바의 상황은 목숨을 잃을 각오를 해야하는 엄중한 시대였기에 카스텔리오의 도덕적인 높이를 비교할 수 었다고 했다. 

하나의 교리가 국가기관과 그 억압수단을 장악하는 데 성공하면, 그것은 무자비하게 테러를 자행한다. 자신의 전권에 의문을 표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그 목에 있는 말을 짓누르고, 대개는 그의 목까지 아예 짓눌러 버린다. (24)

국가의 지도자의 중요성을 보여준다. 권력을 위임받은 지도자가 자신의 권위를 내세우며 국민들이 자유롭게 비판하며 의견을 표현하는 것을 통제하는 순간 국가는 퇴보한다. 현재의 우리 모습이 칼뱅의 제네바와 닮아 있는 것 같아 안타깝다. 

 

 

역사는 오직 승리자만을 응시하며 패배자들은 어둠 속에 남겨둔다. 이 '이름 없는 용사들'은 거대한 망각의 구덩이 속에 아무런 주목도 받지 못하고 내던져져 있다. 십자가도 없고 화환도 없다. (27)

루터가 요구한 "기독교인의 자유"는 제네바에서 끝이 났으며, 종교가 개인의 양심의 문제라는 생각도 종말을 고했다. 논리가 윤리를 지배하게 되었고, 문자가 종교개혁의 정신 위에 놓이게 되었다. 칼뱅이 이 도시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제네바에서는 어떤 형태의 자유도 끝나고 말았다. (48)

기독교인의 자유가 제네바에서 끝났다. 개인의 양심을 드러내는 것도 금지된다. 칼뱅의 의견에 반대하는 것도 통제된다. 종교국은 불시에 어느 집이나 들어가 칼뱅이 제시한 기독교적인 경건한 삶을 살고 있는지 확인한다. 시민이 시민을 서로 감시한다. 고발된 사람은 화형이나 고문을 받을 수도 있기에 제네바는 더욱더 음울한 도시가 되었다. 인간의 자율성과 창의성이 억압받을 때 사회는 퇴보한다. 

제네바에 재입성하는 칼뱅 (출처: flickr)

그는 다시는 이 도시를 떠나지 않고, 그것을 자기 사상의 예술품으로 만들 것이다. 이 순간부터 칼뱅과 제네바, 정신과 형식, 창조자와 그 피조물은 다시는 떼려야 뗄 수 없게 되었다. (60)

프랑스의 작가인 발자크Balzac, 1597~1654는, 칼뱅의 종교적 테러가 프랑스 혁명의 피의 축제보다 오히려 더욱 잔혹했다고 올바르게 지적했다. (86)

 

 

제네바 사람들은 페스트가 창궐하던 시기에 처음으로 종교국의 무오류성에 대해 의심하기 시작했다. 페스트는 3년 동안(1542~1545) 제네바에서 기승을 부렸다. (96)

칼뱅은 카스텔리오가 정신적 종교적인 일에서 아무런 의지도 없이 자기에게 복종할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는 아첨꾼들 한가운데서 모든 독재의 영원한 적인 독자적인 인간을 알아보았다. (108)

피루스의 승리 (출처: sketchplanations)

유일하게 자신과 대등한 학자를 제네바에서 몰아낸 것이 칼뱅의 독재정치에는 승리를 의미했지만 그것은 '피루스의 승리Pyrrhic victory'였다. 극히 존경받는 학자를 떠나보낸 것이 폭넓은 계층에서 무거운 손실로 안타깝게 여겨졌기 때문이다. (116)

니케아 종교회의 (출처: Collections - GetArchive)

세르베투스는 스무살 청년의 비타협성으로 니케아 종교회의는 정당성을 갖지 못하며, 삼위의 영원한 본체에 대한 믿음은 하나님의 본질인 통일성과 일치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126)

니케아 종교회의 : 고대도시 니케아에서 열린 카톨릭 최초의 종교 회의. 첫 번째는 325년 로마의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소집하여 예수의 신성을 부정하는 아리우스파를 이단으로 몰고, 아타나시우스파의 삼위일체설을 정통 교리로 인정하는 니체노 신경을 채택했다. 두 번째는 787년에 동로마 제국의 황후 이레네 이세가 소집하여 성화상 숭배 등에 관한 규약을 제정하였다. 

세르베투스 동상 (출처: Wikimedia Commons)

칼뱅이 세르베투스를 불태워 죽임으로써 이러한 세계사적인 첫발을 내디딘 것이다. 그는 개신교가 쟁취해온 '기독교도의 자유'의 권리를 단번에 없애버렸다. (...) 가톨릭 교회는 독자적인 생각을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단 한 사람을 산 채로 불태울 때까지 일천 년 이상을 망설여왔다. 그러나 칼뱅은 통치한 지 겨우 십몇 년 만에 그의 정신적 독재가 행한 이 가장 저급한 행위를 통해 개신교의 명예를 지워버렸다. (179)

 

 

국가는 그 신하에게 외적이고 정치적인 질서를 엄수할 것을 요구할 수 있다. 도덕적 종교적인 - 여기에 덧붙인다면 예술적인 - 신념이라는 내면의 세계가 국가에 대해 눈에 보이는 잘못을 범하지 않았는데, 그러한 내면 세계에 끼어드는 것은 침범할 수 없는 개성의 권리를 침범하는 것이며 월권일 뿐이다. 어느 누구도 자신의 내면세계에 대해서 국가기관에 책임지지 않는다. (198)

카스텔리오의 <칼뱅의 글에 반대함>은 출간할 길이 막혔다. 칼뱅은 환호성을 올렸다. "우리 뒤에서 마구 짖어대는 개들이 우리를 물 수 없게 되어 퍽 다행입니다." 세르베투스가 장작더미 위에서 입을 다물었듯이, 카스텔리오는 검열에 의해 입을 다물수밖에 없었다. (236)

칼뱅과 녹스 등 (출처: World History Encyclopedia)

1563년 12월 29일에 세바스티안 카스텔리오는 48세의 나이로 운명했다. 내막을 잘 아는 한 친구가 그의 죽음 앞에서 말한 것처럼 "하나님의 도움으로 적들의 발톱에서 빠져나간" 것이다. (270)

삶이 자유와 기쁨에 사로잡히거나 도전을 받지 않고, 오직 완고한 체계 속에 응결되어 있다면, 세계는 예술이란 열매를 맺지 못하고 비창조적으로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279)

모든 폭력 통치는 극히 짧은 시간에 낡아버리거나 차갑게 식어버리고, 모든 이데올로기와 그 일시적인 승리는 그 시대와 더불어 종말을 고한다. 오로지 모든 이념 중의 이념, 절대로 패하지 않는 이념인 정신적 자유의 이념만이 영원히 되살아나온다. 그것은 정신처럼 영원한 것이기 때문이다. (287~288)


독서습관 796_다른 의견을 가질 권리_슈테판 츠바이크_2015_바오출판사


■ 저자: 슈테판 츠바이크

1881년 오스트리아 빈에서 부유한 유대계 방직업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빈 대학에서 여러 언어를 배웠으며, 프랑스와 독일에서 수학 후 1904년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스무살 때 시집 <은빛 현>으로 창작활동을 시작했으며, 1차 대전 기간에는 로맹 롤랑과 함께 반전 운동에 참여하기도 했다. 1938년 오스트리아가 독일에 강제 병합되자 나치의 탄압을 피해 영국과 미국, 브라질 등지에서 망명 생활을 하던 도중 심한 우울증에 시달리다가 1942년 부인과 함께 자살했다. 소설가이자 희곡 작가, 전기 작가로서 생동감 있는 문체와 섬세한 감정 묘사, 뛰어난 구성 능력으로  많은 독자들의 사랑을 받았으며, 특히 역사 속에 묻혀 있는 인물들을 찾아내 그들의 생애와 행적을 추적하여 깊이 감춰진 내면세계와 심리적 갈등까지 입체적으로 그려내는 전기 분야에서 탁월한 재능을 발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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