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사람에게 학교 교육을 받게 함은 프로메테우스적 사업의 정점임을 인식할 수 있고, 그 대안이 되는 것은 에피메테우스적 인간이 살기 적합한 세계라고 말할 수 있다. (196)
이 문장은 프로메테우스와 에피메테우스의 특징을 알기 전에는 이해하기 어려운 문장이다. 학교와 교과과정이라는 틀에서 계획에 따라 진행되는 것을 프로메테우스적 사업이라고 했다. 반면에 주변의 사물이나 사람과의 상호작용에 의해 배워가는 과정을 사후적 인간인 에피메테우스적이라고 보았다. 우리는 프로메테우스적 인간이 더 바람직하다고 교육받았다. 하지만 실질적인 배움이란 에피메테우스에 가깝다.
학교에 대한 절망이란 보통 암기나 일삼는 수험경쟁 등을 이유로 하는 것이지만, 일리히는 그런 비판이 아니라, 학교의 존재가치 자체를 부정했고, 나아가 사회 자체가 학교화된 것까지 부정한 점에서 더욱 감동적이었다. (219)
사회의 학교화란 2부에서 언급한 의료, 법률, 종교, 학교 등 대부분의 서비스 분야를 포함한다.
요컨대 일리히의 주장은 일률적인 기계식 의무교육 및 고급교육이 결국 계급을 정당화하고 부의 불평등을 심화시키는 것이므로 부당하다는 것이다. 부만이 아니라 권력도 평등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학교교육에 대한 물신적 존경심을 버릴 필요가 있다. (226)
우리 사회에서 정치적 민주화 이후 진행되야 할 경제적 민주화가 미뤄지고 있는 현실을 설명할 수 있는 문장이다. 경제적인 불평등의 심화는 교육의 불평등으로 연결되었다. 학교 교육 제도는 부의 불평등의 영향을 고스란히 받았고, 사회적 불평등에 대해 교육으로 정당화할 수 있는 근거로 제시된다. 우리 사회가 극복해야 할 엄중한 과제다.
사회당이 집권하기는커녕 박정희 경제개발계획 체제와 유사한 보수정권이 지금까지 이어져왔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사회에서는 진보-보수 논쟁이 벌어졌다. 물론 실질적으로는 모두 보수정권이기 때문에 그런 논쟁이란 권력다툼 이외의 다른 것이 전혀 아니다. (230~231)
무엇이 진보이고 무엇이 보수인가 진지한 고민이 우리 사회에 있는가 의문이다. 단순히 권력다툼의 소모적인 논쟁이 지속될 뿐이다. 소리 없이 신음하고 있는 국민들을 위한 정권은 보이지 않는다.
가령 군사부일체니 스승의 날이니 하는 것도 전형적인 학교화가 낳은 것이다. 군사부일체란 봉건조선의 유산인데도 지금까지 계승되는 이유가 스승의 날을 기념하는 것처럼 학교에 대한 신앙에서 나온다. (242)
역자 박홍규의 의견이 책의 후반부에 첨부되어 있다. 일리히의 글은 어렵다. 하지만 뒤에 역자의 글을 읽으며 일리히의 주장을 이해할 수 있다. 봉건적 잔재를 당연하게 여겨왔는데 역자의 주장을 보니 상명하복의 군사문화처럼 보인다.
일리히가 평생 이상으로 삼은 인간상은 <학교 없는 사회>의 마지막 7장에서 그가 이상적인 것으로 말한 에피메테우스적 인간상이다. 그것은 인간의 본성과 인격이 선하다는 것을 믿는 희망의 존재로 재물이 아니라 인간을 사랑하는 인간이다. (247)
1992년 일리히가 암에 걸리자 의사는 진통제를 대량 투여하여 치료받기를 제안했으나, 그는 그런 치료는 일을 못하게 한다는 이유로 거부하고 스스로 아편을 먹으면서 10년을 일했다. 그는 어려서부터 세상을 떠돌며 모든 권위와 제도에 저항하는 삶을 살았다. 청빈한 생활 속에서 무한한 자유와 평등만이 지배하는 대화를 통해 사람들과 함께하는 삶을 살다가 2002년 독일 브레멘에서 죽었다. (261)
일리히의 말년에 대한 내용이다. 암이란 것은 죽음을 떠올리게 되고 자연스럽게 의료 서비스에 의존해 생명을 연장하고 싶은 마음이 들게 된다. 하지만 일리히는 치료를 거부하고 통증을 참아가며 자신의 삶을 살다 죽음을 맞이했다. 존엄한 죽음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는 문장이다.
교육과 문화, 의료과 교통, 자연과 환경, 성과 언어, 학문과 예술 등 모든 분야에서 민중의 자율을 주장하며 국가, 자본 및 전문가에 의한 지배에 철저히 반대한다. 그는 그 통치기구로 민중 위에 군림하는 국가법을 부정하나 민중의 법으로서 자연법을 신봉하는 아나키스트이다. (263)
민중의 자율 속에서 인간의 창조성이 발휘된다. 민중을 통제하기 위해 국가와 자본 그리고 전문가 집단은 다양한 지배 기구를 활용한다. 그 속에 인간은 소외된다. 그래서 일리히는 아나키스트라고 볼 수 있다. 무정부 상태의 혼돈이 아니라 인간이 중심이 되는 사회를 꿈꾸는 아나키스트다.
그러한 학교의 기능은 계급화이다. 현대 사회에서 개인의 사회적 지위는 곧 학교에서의 성공에 좌우된다. 학교에서 수여하는 각종 학위는 이력서 위에서 영원한 가격표가 된다. 학교는 계층 상승의 유일한 길이라고 믿게 하며, 자본주의적인 상하 질서로 사람들을 몰아넣는다. 학교는 저소득층 사람을 포함한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계층 상승의 기회를 주지 않으며 기존의 계층 구조를 그대로 존속시킨다. (277)
이 문장이 <학교 없는 사회>의 핵심이다. 학교가 모든 사람들에게 평등한 교육 기회라기보다는 서로를 비교하고 경쟁을 부추긴다. 그리고 개인마다 가격표를 붙여서 사회에 내놓는다. 그 자체가 계급화다. 학교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는 것과 졸업증이 사회적 계층 사다리를 올라가는 유일한 길처럼 믿게 만든다. 자신도 모르게 자본주의 시스템 하에서 쓸모 있는 인간으로 대우받기 위해 학교라는 울타리에 집착한다.
아나키즘은 무엇보다도 개인의 자유와 자치를 증진시키는 사회체제의 개발에 관심을 가지므로 그 자유와 자치를 파괴하는 국가를 부정하고, 대표민주제를 포함하여 특권계층을 위한 정치체제가 착취를 정당화하는 정치적 이익의 수단화가 됨을 부정하며, 나아가 권위적 제도, 예컨대 학교나 교회를 부정한다. (305)
교육의 본질은 학생이 삶에 대해 갖는 관심을 개발하고 삶의 문제점을 아동과 함께 해결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톨스토이의 학교에는 벌칙이나 체형이 없었고, 수업료도 징수하지 않았다. 수업은 오전부터 시작하여 2시경 학생들은 점심을 먹고 8, 9시경까지 자유롭게 수업을 했으나 아무도 돌아가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그의 교육이념과 학교는 전통적인 교육자들에 의해 비난을 받고 결국 좌절되었다. (321)
톨스토이가 교육의 본질을 깨닫고 이를 실천하는 학교를 운영했다는 사실을 처음 접했다. 특히 교육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 삶에 대해 갖는 관심을 개발하고 삶의 문제점을 아동과 함께 해결'이라고 주장했다는 점에서 놀랐다. 현재의 우리 교육에서도 여전히 공유해야할 교육 철학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스페인의 페레르는, 과거에 무교육에 의한 무지로 민중을 통제했던 국가가 19세기에 와서는 충성스러운 국민을 배출하기 위해, 또 기업은 유순하고 훈련된 산업노동자의 육성을 위해 교육을 이용했다고 보았다. 즉 교육을 통한 사회혁신이 아니라, 자본의 이익을 올리기 위해 완성된 노동의 도구, 개인, 노동자를 필요로 했기에 학교가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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