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우저의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와 같이 역사를 관통해 우리의 안목을 키워주는 좋은 책을 볼 때면 우리의 '교육'에 대해 생각하곤 한다. 그림이나 조각, 건축 등 수많은 작품들이 교실에서 시험을 위해 가르치고 배우는 단계에서 벗어나야 한다. 상상력을 가지고 그 시대로 돌아가 작품을 만든 사람들이 돼야 한다. 기회가 되면 직접 가보거나 특정한 작품을 가지고 생각을 나누는 토론으로 자신의 인식의 폭을 확장해야 한다. 관련된 독서로 깊이와 폭을 넓혀갈 수 있다.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지식을 나눠줘야 한다. 이런 선순환이 모든 분야에서 이뤄져야 할 배움의 과정이다.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1권> 후반부는 중세에 대한 내용이다. 왕권이 약해지고 영주들이 장원을 중심으로 폐쇄된 자립경제를 지속하면서 기독교 중심의 사회는 보수적인 색체를 띠며 2세기 정도 이어진다는 설명이 인상적이다. 그리스 로마 시대의 조각상들이 사라지고 관념적 추상적인 종교의 세계를 보여주는 중세에는 도리어 퇴보한 것처럼 느껴진다. 사회의 변화는 경제적인 변화를 가져왔고, 이는 예술에도 영향을 주었다.
프랑크왕국에서 중세말기에 다시 도시와 화폐경제가 되살아나며 신분이 아니라 개인의 능력이 소중해지는 시대가 도래한다. 재미있는 점은 건축물에 부속되어진 그림이 패널화로 독립하며 부유한 계층의 소유가 되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가난한 민중들에게는 판화가 유통되었다.
고전기 그리스 로마의 사실주의에서 멀어져간 기독교 예술은 두 방향을 취하게 된다. 하나는 상징주의 방향으로, 거기서는 모사보다는 그려야 할 신성한 대상의 정신을 화면에 떠오르게 하는 것이 문제였고, 따라서 세부 묘사 하나하나가 모두 기독교적 구원을 가르치는 교리의 암호 같은 의미를 지니게 된다. 초기 기독교 예술의 특징 가운데 그 자체로는 전혀 뜻을 알 수 없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대부분 이런 상징적, 관념적 의미가 예술작품 각 부분에 내포되어 있다는 사실로 설명된다. (221)
기독교 예술관의 가장 현저한 특색은 예술을 도덕교육의 수단으로 보는 사고방식이었다. (...) 이 점에서 고대의 예술관과 기독교의 예술관은 애초부터 그 방향을 달리했던 것이다. (228)
비잔띤제국은 일정한 조세수입과 합리적으로 경영된 국영기업 덕분에 완벽한 균형예산을 집행했으며, 중세 초기와 전성기에 걸쳐 서방과는 반대로 모든 분권주의 자유주의 세력을 억누를 만한 재력을 지니고 있었다. (...) 흔히 상업과 교역, 도시경제와 화폐경제에 수반된다고 생각되는 역동적이고 진보적인 반전통주의 경향이 비잔띤제국에서 꽃피지 못한 원인도 이런 상황에서 비롯된 것이다. (232)
비잔띤제국의 통치형태는 황제교황주의, 즉 세속적 권력과 종교적 권력이 한 사람의 전제군주의 손에 집중되는 형태였다. 황제가 교회 위에까지 군림하는 근거가 된 것은 교부(敎父)들이 전개하고 유스띠니아누스 황제가 법률로 선포한 제왕신권설로(...) (233)
존경과 숭배를 요구하는 인물을 인상 깊게 그리려는 경향은 제정시대 후기 이래 점차 높아져서 이제 비잔띤 예술에 오면 정점에 이른다. 이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 사용된 방법은 옛날 고대 오리엔트 예술에서처럼 여기에서도 무엇보다 정면성의 법칙이었다. (235)
비잔띤 건축은 초기 기독교의 이 바실리까 형식에다가 돔(dome)을 덧붙임으로써 건축물 내부의 갖가지 공간을 분명하게 구분하는 이런 '비민주적인' 공간구성을 다시 한걸음 전진시킨 결과가 되었다. (...) 미니아뛰르는 그다지 돈이 드는 예술이 아니었으므로 막대한 비용이 드는 모자이끄 주문자들보다 사회적 지위가 낮고 예술에 관해 좀 더 자유주의적 사고방식을 지닌 사람들도 고객이 될 수 있었다. (240)
성화와 성상에 대한 존중이 동로마제국에서는 우상숭배까지 이르러 그에 대한 배척운동을 불러일으켰다는 사실이 우상파괴운동에서 이제까지 말한 다른 어느 동기보다도 훨씬 큰 역할을 한 것이 사실이다. (...) 그(동로마 황제 레오 3세)에게는 종교의 순수성을 보존하는 일보다 우상숭배를 금지함으로써 자신이 얻으리라고 기대했던 계몽적 효과가 훨씬 더 중요했다. (245)
레오 3세는 강력한 군사국가를 건설하려는 자기의 의도에 가장 큰 장애가 되는 것이 교회와 수도원이라고 생각했다. 고위성직자들과 수도원은 제국 내의 가장 큰 지주들 가운데 손꼽혔을 뿐 아니라 면세 특권을 누리고 있었다. 특히 수도원 생활이 일반 민중의 동경의 대상이 된 결과 군대생활과 군대 외에 공무나 농업 등에 종사해야 할 많은 장정을 수도원이 가로채고, 또 끊임없이 헌납과 기증을 받음으로써 국가 재정에도 막대한 손해를 끼쳤다. (247)
아일랜드 미니아뛰르의 '농민적' 기하학 양식을 설명해 주는 또 한 가지 요인은 아일랜드의 수도원 생활이 대륙의 수도원 생활, 특히 비잔띤 수도원 생활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특수한 것이었다는 사실과도 관련되어 있다. 그리스 수도원은 도시 근처에 있고 도시 생활, 교역, 국제적인 지적 흐름, 동방의 학문 예술 등에 활발히 참여했으며, 또 거기 사는 수도사들은 가벼운 육체노동만 할 뿐 그들의 생활과 농민의 생활 사이에는 아무런 공통점도 없었다. 이에 반해 아일랜드 수도사들은 여전히 반농민이었다. (253)
그들은 갈리아인, 로마인, 게르만인 들로 구성되었고 그 내부에서는 적어도 로마인에 비해 프랑크인이 더 우대받는 일은 없었다. 이 점에서 왕들은 지극히 공평무사한 태도를 취했고, 도망노예를 포함한 최하층 사람들이 최고로 영예로운 자리에 앉는 것을 허용했을 뿐 아니라 도리어 그런 일을 장려하기조차 했다. (258)
아랍인의 손에 의해 바그다드와 꼬르도바 같은 거대한 도시가 건설되던 시기에 서방에서는 프랑크 왕조 전시기를 통해 이렇다 할 도시가 하나도 생겨나지 않았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 도시, 궁정, 수도원 중 그 어느 것도 계속적인 예술품 생산을 뒷받침해 줄 힘이 없었던 것이다. (260)
얼마 안 가 교육기관이라고는 성직자의 후계자를 확보하기 위해 할 수 없이 주교들이 관장하던 본당 부속학교 외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되었다. 교회가 서양사회에 압도적인 영향력을 미치는 기관이 될 수 있었던 저 교양의 독점을 처음 이룩한 것은 이렇게 해서였다. (261)
서양의 군주로서 학문, 미술, 문학에 진정한 관심을 가진데 그치지 않고 독자적인 문화정책을 수행한 것은 하드리아누스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이래 카를대제가 처음이었다. 물론 그가 갖가지 문학 교육기관을 설립한 직접적인 목적은 정신문화의 쇄신보다도 행정기구를 위한 훈련된 인적 자원을 획득하려는 것이었다. (265)
카롤링거 왕조 시대에 활발하게 운영된 궁정 부속 아뜰리에와 사본 제작소들은 소규모의 질 높은 세공품들을 생산했다. (270)
카를대제의 재위기간이 끝난 뒤로 궁정은 이미 제국의 정신적 중심지가 아니었다. 학문, 미술, 문학 일체의 거점은 이제 수도원이고, 당대의 정신적 소산의 가장 중요한 부분은 수도원 부속 도서관, 서실, 사본 제작소에서 진행되었다. 기독교적 서양미술이 최초의 꽃을 피우게 된 것은 이들 수도원의 노력과 재산 덕분이었다. (286)
수공업은 수도원에서 비로소 가내경제로부터 독립한 것이다. 시간 관리가 최초로 행해진 것도 여기에서였다. 즉 하루의 시간을 합리적으로 배분하고 이용하며, 시간의 경과를 재어 종을 쳐서 알리는 일 등이 수도원에서 처음 행해졌다. (289)
교육적인 면에서도 예술을 위해 공헌한 것으로 전해지는 또 한명의 공위성직자 주교 베른바르트(Bernward)는 고매한 후원자로서 건축과 주금술을 장려했으며, 그 자신이 힐데스하임 대성당의 청동문을 만들었다. (292)
중세 미술사에서 수도원의 역할을 과대평가하는 경향은 낭만주의 시대의 산물로 중세에 관한 낭만주의적 신화의 일부이며, 그 영향은 오늘날까지 남아 역사적 사실의 공정한 판단을 흐리는 일이 많다. (293)
영주로서 세습적인 권한을 갖는 대신 군주에 대한 봉사의무를 짊어지는 봉건적 기병대의 창설은 서양역사에서 가장 혁명적인 군사적 혁신 가운데 하나이다. (300)
도시를 중심으로 한 사교생활, 상업, 교역에서 종지부가 찍히고 생활은 이전보다 간결, 소박해지고 지역 중심으로 영위되었다. 일체의 경제 사회생활의 중심은 이제 귀족의 장원이었다. 사람들은 더 광대한 생활권에서 움직이고 더 포괄적인 범주로 생각하는 것을 잊어버렸다. (301)
이런 소극적인 경제원리와 정체적인 사회구조에 호응하여 당시의 학문, 미술, 문학에서도 일단 인정된 가치를 견지하는 엄격하고 고루한 보주주의가 지배하고 있었다. (304)
이제 수도사들은 그들의 전체주의적 목적을 추구하면서 괴로운 세상을 피해 죽음을 동경하는 묵시록적인 분위기를 조성하고, 사람들을 만성적인 종교적 흥분상태에 가두어두며, 세계의 종말과 최후의 심판에 관해 설교하고, 순례와 십자군을 조직하며 황제나 왕을 파문하기도 했다. (306~307)
이렇게 좀더 자유로운 예술관이 표면에 나타나는 것은 로마네스끄 양식 시대 후반기에 들어서야 가능했는데, 그것은 11세기의 경제부흥 및 도시생활의 재현과 때를 같이해서였다. (313)
오로지 육체적으로 아름다운 것, 감각적으로 생동하는 것, 형태적으로 정상인 것만을 묘사했으며 영혼이라든가 정신적인 것에 대한 일체의 암시를 회피한 고전적 고대에 비하면, 로마네스끄 양식은 영적 표현만을 겨냥한 예술이자 감각적 경험의 논리가 아닌 내면적 비전의 논리를 기준으로 한 법칙을 따르는 예술로 보인다. (317)
사회적 대우가 금전적 재산의 많고 적음에 따라 정해지는 이 새로운 사태는 일반적으로 각 경제주체 간의 격차를 줄이는 방향으로 작용하는데, 이러한 재산의 획득은 가문이나 신분, 특권보다도 두뇌, 정세판단, 현실감각, 타산능력 등 극히 개인적인 능력으로 좌우되는 것이어서 개개인이 어떤 사회계층의 대표자로서 갖는 의미가 적어진 대신에 자기 실력을 인정받는 정도가 커졌다. (328)
13세기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도시 시민층은 아직 제대로 대접받지는 못해도 어떻든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사회집단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이 시기 이후 그들은 근대사의 주역을 맡았고 서양문화에 자신의 뚜렷한 자취를 남기게 되는 이른바 '제3계급'으로서 모든 사회활동의 표면으로 떠오르는 것이다. (331)
일반적으로 예술에서 어렵고 복잡한 것을 즐기는 성향의 배후에는 자기를 자기 이하의 사회계층과 구별하려는 의도가 드러나는 정도는 다소 다를지라도 분명히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367)
이러한 읽기 위한 소설의 출현과 더불어 근대문학이 시작된다. (371)
중세 초기에 신의 완전한 초월성이 자연의 가치를 필연적으로 부인하는 결과가 되었듯이, 이제 고딕의 범신론은 역시 필연적인 귀결로서 자연의 명예회복에 기여했다. (379)
고대와 중세 초기의 미술이 결코 이루지 못했던 일을 중세 말기의 미술이 이루어, 진정한 의미의 공간, 즉 현대의 우리가 말하는 의미의 공간을 묘사하는 데 처음으로 성공한 것은 이 시대의 역동적 생활감정에서 생긴 '영화적' 시각의 산물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423~424)
회화는 패널화라는 형식을 통해서 비로소 건축에서 독립하여 부르주아 주택의 이동 가능한 가구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패널화도 아직은 부유하고 사치스러운 계층의 전용미술이었고, 그만 못한 사람들 - 농사꾼이나 무산계급까지는 아니더라도 소시민들 - 의 미술은 판화였다. 목판화와 동판화는 최초의 대중적이고 비교적 값싼 미술작품이었다. (425~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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