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의 혁명>을 통해 이반 일리치란 혁명적 사상가를 처음 만났다. 책의 도입부에 에리히 프롬이 언급한 '모든 것을 의심하라'는 급진주의적 접근방식은 이반 일리치를 한 마디로 잘 표현하고 있다. 우리가 상식으로 받아들이는 선교, 전쟁, 경제원조, 교육 등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아무런 비판의식 없이 수용해 온 정보들의 이면을 보면 특정 국가나 단체나 조직, 개인의 이익을 위해 편향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몇 백 년 동안 이어져온 가톨릭 교회 시스템이나 2백 년 가까이 산업에 필요한 인력자원을 양성하기 위한 교육 시스템이 대표적으로 의심해야 하는 대상이다. 그리고 이에 대한 저자의 깊이 있는 통찰이 담겨 있다.
책에서 인용하고 싶은 문장을 소감과 함께 아래에 포스팅한다.
https://bandiburi-life.tistory.com/1937
나는 급진주의를 특정한 이념 체계라기보다는 어떤 태도라든가 '접근방식'이라고 생각한다. 우선 이 접근방식은 "모든 것을 의심하라"는 한 마디 말로 특징지을 수 있겠다. 모든 것을 의심해야 한다. 특히 모든 사람이 다 받아들이다 보니 결과적으로 누구도 의심할 수 없는 상식이 되어버린 이념을 의심해야 한다. (10)
대한민국 교육 시스템에서 허용되지 않는 것이 반론이자 의문을 제기하는 거였다. 지금은 많이 변했을 거라 기대한다. 회사라는 조직에서도 위계에 따라서 소통이 한 방향으로 흐르기 쉽다. 의문과 비판 속에서 더욱 정제된 결정이 도출된다. 급진주의적 토론이 아쉬운 교육이다. 무비판적으로 사실을 받아들이고 결과를 객관식 시험으로 평가받는 체계는 변해야 한다. 반론 제기를 거부하기 때문이다.
현대의 '진보' 개념은 생산과 소비의 끝없는 증대와 시간 절약을 통해 최대 능률과 이윤에 이르는 원리, 즉 삶의 질이나 인간 본성의 발현에 미치는 효과와는 상관없이 모든 경제 행위를 측정하는 원리를 말한다. 소비 증대야말로 인간을 행복하게 하는 길이며, 대규모로 기업 경영을 하려면 관료화와 비인간화는 불가피하다는 신조이기도 하다. (13)
미국의 선교 활동과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세 작전지역을 비교해 보면 미국인은 금방 자명한 이치를 깨달을 것이다. 양당제와 의무교육 제도를 갖춘, 성공한 사람과 소비자의 나라인 미국 사회는 가진 자에게는 적합한 사회일는지 모르지만 전 세계 나머지 사람들에게는 결코 맞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32)
유럽이나 미국의 선교 활동이 순수한 종교적인 의미를 넘어 영토 확장을 통한 소비시장 확대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때로는 전쟁이 수반된다. 열강의 일방적인 생각에 의해 주입된 문화는 그 이외의 국가에 어울리지 않는 옷이다. 선교와 전쟁은 늘 의도를 파악해야 한다. 국가가 움직이는데 종교가 동행한다. 무엇을 위한 종교인가 근본적인 질문을 먼저 해야 한다.
지금까지 짚어본 것들 모두 푸에르토리코인이 살아온 배경을 존중하는 데 꼭 필요하다. 그들에게 필요한 건 도움이 아니라, 기존의 틀에 따른 범주로 그들을 가두지 않는 것이며, 그들을 더 깊이 이해하는 것이다. (58)
푸에르토리코인들이 뉴욕에서 겪은 경험이 흥미로웠다. 이미 미국시민이지만 자기의 고향에서 일이 없을 때 일자리를 찾아 잠시 뉴욕에 들리는 것일 뿐이다. 유럽에서 일자리를 찾아온 이민자들과 다르다. 하지만 뉴욕사람들에게는 유색인종이며 이민자처럼 보일 뿐이었다는 점이다. 푸에르토리코란 나라에 대해 조금 더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을 이해하려면 우리는 그의 말뿐 아니라 그의 침묵도 알아들어야 합니다. 소리를 통해서만 의미가 전달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을 이해시키려고 말을 멈추는 순간에도 의미가 전달됩니다. 언어를 배우는 일은 소리보다 침묵을 배우는 일에 더 가깝습니다. (64)
언어를 통한 소통이 소리와 함께 침묵을 통해서도 전달된다는 해석이 깊이 와닿았다. 소리 외에도 얼굴표정과 소리 사이의 빈 공간인 침묵으로 우리는 의미를 해석한다. 그래서 제대로된 의사소통은 서로의 말 사이의 공간을 이해하는 과정이다.
죽음의 신비에 깃든 이 궁극의 침묵에 영혼을 열 때, 지금까지 말씀드린 선교사의 세 가지 침묵 - 순수하게 듣는 침묵, 공명하는 침묵, 사랑의 침묵 - 은 느린 성숙을 끝내고 절정에 다다를 것입니다. (74)
돈은 이런 식으로 교회를 실행 도구가 아니라 양떼를 다스리는 사목(司牧) 조직으로 만듦으로써 하나의 정치권력이 되게 한다. (87)
절대적인 신을 중재하는 역할을 하는 교회는 사람에 의해 운영된다. 사람은 사회나 국가 안에서 화폐경제에 속할 수밖에 없다. 돈은 모든 부분에 영향을 미치고 탐심을 일으킨다. 가톨릭은 거대한 조직이며 정치적인 영향력도 크다. 우리에게도 교회에서의 돈에 대한 부적절한 행위가 보도되곤 한다. 돈에 휘둘리는 종교는 더 이상 그 역할을 하지 못하고 버려진다.
로마 가톨릭교회는 세계 최대 규모의 비정부 관료조직이다. 상근 인력만 사제, 수사, 수녀, 평신도를 합쳐 180만 명이다. 미국의 한 비즈니스컨설팅 회사가 세계에서 가장 효율적 기구라고 평가한 조직에서 이들 직원이 일하고 있는 것이다. (104)
Lateran conventions. 1929년 로마 라테라노 궁전에서 이탈리아와 교황청 사이에 맺은 협정. 로마가톨릭을 이탈리아 국교로 인정하고 교황청의 절대적 주권과 바티칸 시국의 독립을 보장한 것이 골자다. (111)
지금의 목회 구조는 대부분 지난 10세기 동안 이어진 독신제와 성직자 제도를 통해 만든 것이다. (122)
가톨릭 시스템에 대한 저자의 의문제기다. 10세기 전에 만들어진 독신제와 성직자 제도는 당시의 시대적 배경을 담고 있다. 과학과 기술의 발전을 바탕으로 사람에 대한 이해도 깊어졌다. 지식의 대중화가 빠르게 진행된다. 더 이상 지식이 특정 집단의 소유물이 아니고 지식이 권력이 아니다. 사람과 국가 간의 교류가 왕성한 이 시대에 중세의 가치관이 지속돼야 하는가는 합당한 의문이라고 본다.
교회는 16세기 트리엔트 공의회 이후 줄곧 산하의 전문 교육기관에서 성직자를 교육하고 양성했다. 그렇게 교육받은 사제가 개인의 결행으로 조직화된 성직자 생활을 계속하길 바랐다. (...) 조만간 사라질 직업에 사람들을 준비시키는 짓은 당장 보아도 대단히 무책임해 보인다. (136~137)
의타심과 외로움과 탐심이 갈수록 커지는 것은 갖가지 물건과 제도와 영웅에 빠져 자신을 소외시킨 결과입니다. 교회는 성공에 안주하는 대신 더 가난한 삶을 살라고 요구합니다. (147)
학교는 이처럼 지난 세기에 봉건주의를 극복하는 데 한몫을 했지만, 이제는 학교교육 받은 이들만 보호하는 억압적 우상이 되어버렸다. 학교의 높이가 올라갈수록 사람의 급은 낮아진다. 학교는 이렇게 인간의 급을 낮춰 놓고는 복종을 받아들이게 한다. 사회적 서열도 학교교육을 받은 수준에 따라 정한다. (169)
학교는 태어나면서부터 유리하게 출발한 사람을 마치 노력을 성취한 사람처럼 합리화한다. 특권 위에 평등과 공평한 기회라는 허울을 입히는 것이다. 어린 시절에 배움의 기회를 놓쳐서 현재의 지위에 불만이 있는 사람은 언제든 야간학교나 실업학교에 가면 된다는 식이다. 이렇게 공인된 처방이 있는데도 받아들이지 않으면, 혜택에서 배제된 건 그 사람 잘못인 것이다. 학교는 학교교육으로 인해 좌절한 사람을 이런 식으로 또 한 번 억누른다. (170~171)
우리 교육의 문제점을 잘 설명하고 있다. 교육에 있어서도 보편적 의무교육이 아니라 유치원부터 대학교까지 부유한 집과 가난한 집이 받을 수 있는 대상이 차별화되었다. 돈에 구애받지 않는 집안은 최고의 교육을 허락받고, 가난한 집안은 국가에서 제공하는 공교육에 만족해야 한다. 태어난 집안 환경에 따라 유리한 출발선에서 시작하는 학생은 사회적 특권을 유지할 교육과 환경을 제공받는다. 그래서 교육의 불평등은 심화되고 빈부격차 확대의 원인이 된다.
교육이 무엇이냐에 대한 의문을 가지고 진지한 고민과 토론이 필요하다. 나만 잘 살면 된다는 각자도생의 마인드는 국가차원에서 먼저 해소해야 한다. 하지만 현실은 기득권을 가진 자들이 각자도생의 분위기를 조장하는 것 같아 안타깝다.
자동화가 밀고 들어오는 희소성의 경제에서도 학교는 여전히 두 세계가 공존할 것처럼 합리화하지만, 두 세계 가운데 하나는 다른 쪽의 식민지일 뿐이다. (178)
현대의 학교는 2세기 전 모든 사람을 산업국가로 편입시키려고 출발한 보편교육 운동에 기원을 두고 있습니다. 산업화가 한창이던 나라들은 학교를 국민통합 기관으로 활용했습니다. 식민지에서는 지배계급에 제국주의적 권력의 가치를 심어주는 역할을 하였고 대중에게는 학교교육을 받은 엘리트보다 열등하다는 의식을 심어주는 역할을 했습니다. (187)
사람들은 배움의 과정에서 자기 마음에 있던 흐릿한 느낌들을 선명하게 그리는 경험을 할 때 복잡한 기술을 가장 잘 배웁니다. 자신의 두려움을 직시하고 그 두려움을 없애기 위해 글에서 도움을 구하고, 자신의 감정을 포착하고 그것을 구현하는 글의 힘을 아는 사람만이 다른 사람이 쓴 글을 깊이 있게 이해하는 법입니다. 단순히 글자로 쓴 문구를 해독하는 능력으로는 학교에 의해 만들어지고 공장을 위해 쓰이는 도구로 복종하며 사는, 세뇌된 대중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223)
교육이란 인간 잠재력의 새로운 차원을 일깨우고 삶을 가꾸는 일에 인간의 창조적 능력을 쓰도록 깨우치는 것이다. 그러나 저개발은 미리 패키지화한 해결책에 사회 전체의 의식을 굴복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244)
학교교육은 결국 노동자에게 마구를 채워 고용주에게 붙들어두는 역할을 한다. (245)
능력주의란 학교에서 시민 각자에게 정해준 자리가 마땅히 그럴 만하다고 믿는 마음 상태를 말한다. (...) 왜냐하면 완전학 능력주의 사회는 지옥 같은 곳이 아니라, 아예 지옥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268)
사람의 능력을 어떤 각도에서 보느냐에 따라 360도 다양한 능력을 견줄 수 있다. 시험을 잘 보는 사람만을 우대하는 사회에서는 다른 재능을 가진 자들은 열등하다는 대우를 받고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능력주의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한국에서는 시험제도에 능숙한 사람들이다. 하지만 기술의 발전으로 잘 외우고 풀었던 능력이 인공지능으로 대체될 수 있다. 이제는 자신만의 창의력을 활용해 사회에 기여하는 사람들이 올바르게 평가받아야 하는 시대다. 그런 분위기가 더욱 고양되어 기존의 교육제도와 시험제도가 붕괴되고 재정립되길 바라는 마음이다.
의무교육에 숨겨진 사회와 인간 정신에 대한 파괴적 성격은, 모든 제도들에 숨어있는 파괴성을 보여주는 한 가지 사례에 지나지 않는다. 이 제도들은 오늘날 인간의 기본적 필요를 충족하는 데 필요한 물품, 서비스, 복지제도의 종류들을 지시하고 감독한다. 따라서 우리가 사는 환경에 대한 우리 자신의 통제력을 회복하는 길은 문화 혁명과 제도 혁명밖에 없다. (278~279)
그의 사상에 중요한 영향을 끼친 생애를 고려하면 그의 내면 전기는 4개의 장으로 이루어질 것이다.
1) 1950~60년대 : 가톨릭 사제로서 교회와 개발을 비판한 시기
2) 1970년대 : 세계적 작가로서 현대사회의 여러 제도를 분석한 시기
3) 1980년대 : 역사학자로 중세 연구에 몰입한 시기
4) 1990년대 : 인간의 감각, 신체, 우정을 연구한 시기 (283~284)
에리히 프롬은 일리치의 위대한 가치는 이 '급진주의'을 풍부한 상상력으로 완벽하게 보여준 점이라고 말한다. 더글러스 러미스 역시 현대인들에게 일리치가 주는 메시지가 있다면 그것은 사람들에게 '무엇을 해야 할지' 이전에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지'를 가르쳐 준 점이라고 말했다. "생각의 전환은 삶의 전환을 불러일으키고, 해석과 재사유가 가능하면 변화의 가능성은 이미 존재한다." (291)
근본적 독점이 이루어지면, "직장에 다니지 않거나 소비를 하지 않는 사람은 쓸모없는 사람이 되어" 무기력과 절망에 빠진다. 이것이 현대화된 가난(modernized poverty)이다. 이 가난은 물질적 가난이 아니다. 산업 생산성이 가져다준 물질에 기대어 살면서 삶의 능력이 잘려나간 사람들이 겪는 풍요 속의 절망이다. (294~295)
우리는 어떤가 돌아보게 된다. 물질적 풍요 속에서 주어진 여유 시간을 어떻게 보내고 있는가. 스마트폰으로 언제든지 연결된 상태로 살아갈 수 있다. 우리의 시간은 넷플릭스나 유튜브에서 유혹하는 다양한 콘텐츠에 소비되고 있다. 성찰이 없는 멍 때리는 소비다. 그래서 풍요 속에서 소통하는 능력, 생각하는 능력, 독해 능력이 잘려나가고 있다. 절망이란 말이 적합하다.
"현대인은 어디서나 감옥에 갇힌 수인이다. 시간을 빼앗는 자동차에 갇히고, 학생을 바보로 만드는 학교에 잡혀 있고, 병을 만드는 병원에 수용되었다." (...) 현대의 노예가 고대의 노예와 다른 점은 노동조차 허용되지 않는다는 점뿐이다. (303)
독서습관 735_깨달음의 혁명_이반 일리치_2018_사월의책_230529
■ 저자: 이반 일리치
1926년 오스트리아 빈에서 태어났다. 로마 그레고리안 대학에서 신학과 철학을 공부하고 잘츠부르크 대학에서 역사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1951년 사제 서품을 받은 후 교황청 국제부 직이 예정되어 있었으나 미국으로 건너가 뉴욕 빈민가의 아일랜드-푸에르토리코인 교구에서 보좌신부로 일했다. 1956년 서른 살에 푸에르토리코 가톨릭 대학의 부총장이 되었고, 1961~1976년에는 멕시코 쿠에르나바카에 일종의 대안 대학인 <문화교류문헌자료센터>(CIDOC)를 설립하여 연구와 사상적 교류를 이어갔다. 교회에 대한 잦은 비판으로 교황청과 마찰을 빚다가 1969년 스스로 사제직을 버렸다. 80년대 이후에는 독일 카셀 대학과 괴팅겐 대학 등에서 서양 중세사를 가르치며 저술과 강의활동에 전념했다. <학교 없는 사회> <공생공락을 위한 도구> <행복은 자전거를 타고 온다> <전문가들의 사회> <그림자 노동> <누가 나를 쓸모없게 만드는가> <과거의 거울에 비추어> 등 성장주의에 빠진 현대 문명과 자본주의 사회에 급진적 비판을 가하는 책들로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고, 사회 경제 역사 철학 언어 여성문제 등에 대한 깊은 통찰을 남겼다. 2002년 12월 2일 독일 브레멘에서 타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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