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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습관

[732]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1권_①_선사시대부터 오리엔트 및 그리스 로마시대까지

by bandiburi 2023. 5. 27.

인류 역사의 흐름에 따라 문학과 예술이 어떻게 변해왔는지 아르놀트 하우저의 통찰을 잘 보여주는 책이다. 두 권의 책이 떠오른다.

하나는 이와 유사한 양정무 교수의 <난처한 미술 이야기> 시리즈다. 역사에 따라 미술작품을 쉽고 재미있게 접할 수 있도록 편집되어 있어 입문편이라고 볼 수 있다.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는 어려운 용어가 많이 포함되어 있고, 일부 문장은 완독을 해야 이해 가능한 수준으로 심화편에 해당한다.

또 하나는 인류의 역사를 선사시대부터 관통한다는 측면에서 제러드 다이아몬드의 <총, 균, 쇠>와 유사하다. 

어렵기는 하지만 다양한 분야의 책을 읽으며 얻은 기본 지식을 바탕으로 도전할 수 있었다. 책을 가까이 하지 않던 시기에 이 책에 도전했다면 몇 페이지 읽다가 포기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익숙한 조각, 그림, 건축 등이 곳곳에 담겨 있고, 역사를 관통해서 문학이나 예술에 대한 단편적인 지식을 습득한 상태라서 더욱 인식의 폭을 넓히는데 도움 되는 책이다

긴 역사 속에서 상상력을 발휘해서 인류가 남긴 유무형의 유산에 대해 논리를 가지고 해석하는 부분이 놀라웠다. 전문가 마다 해석의 차이는 있다. 누가 더 개연성 있는 주장을 하느냐의 차이다. 구석기시대에 왜 어두운 동굴에 그림을 그렸을까, 그리스 로마 시대에 수많은 예술의 흔적이 있지만 그 이전에는 왜 거의 없을까. 말로 전해진 이야기나 노래에 대한 상상 등 예술사학자나 역사학자들이 던졌을 법한 가설에 대해 저자의 해석을 삽화와 함께 전달한다. 좋은 책은 몇 번을 반복해서 참고할 만한데 그런 종류의 책이다.

책에서 깨닫고 남기고 싶은 문장이 많아 두 번에 걸쳐 포스팅한다.


다만, 분명한 것은, 단순하고 인습적인 모티프를 표현했던 기하학적 양식은 자연주의적 양식처럼 특수한 재능이나 기본적인 훈련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런 사실에 힘입은 딜레땅띠슴(dilettantisme, 예술과 학문을 취미 삼아 즐기는 경향)이 결과적으로 형식의 간소화 내지 조잡화를 촉진하기도 했을 것이다. (51)

부가 증대하고 경작지 및 자유로이 처분 가능한 비축식량이 비교적 소수자에게 집중됨으로써 수공업 생산품에 대해 이전보다 강력하고 다양한 새로운 수요가 생겨나며 분업화 과정이 크게 촉진된다. 정령과 신, 사람들의 상을 만들고 장식이 달린 가재도구와 장신구 등을 만드는 일은 가내작업의 테두리를 벗어나 그 일만으로 생계를 영위해가는 전문가의 손으로 옮아간다. (58)

왕의 궁전이나 사원에 딸린 큰 작업장은 작업장인 동시에 후진 예술가들을 양성하는 학교이기도 했다. 특히 사원과 관련된 작업장이 기술 전수의 가장 중요한 담당자였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인 생각인데, 예술에 대한 사제층의 영향력이 압도적이었다는 점을 의문시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런 견해도 모든 사람에게 인정받고 있는 것은 아니다. (71)

앉아 있는 서기 The Seated Scribe (출처: Wikimedia Commons)

왕조 이전 시대의 말기 및 초기 왕조 시대의 부조(浮彫)에는 구도의 자유분방한 취향이 아직 남아 있는데, 그것은 시대가 흐름에 따라 일단 사라졌다가 훗날 문화 전반에 걸친 일대 혁명을 통해서야 겨우 되찾아지는 것이다. 루브르 박물관의 <앉아 있는 서기(書記)>와 카이로 이집트 박물관의 <촌장(村長)> 등으로 대표되는 고왕국 말기까지의 걸작들만 해도 아직 청신하고 발랄한 기운에 차 있는데 (...) (73)

촌장 Kaaper (출처: Wikimedia Commons)


남달리 강한 계급의식을 가진 봉건귀족이 판치게 되는 중왕국 시대에 들어와서 비로소 궁정예술 및 종교예술에 형식에 치우친 인습이 생기고, 이후로는 자유의지에 의한 표현 형식은 완전히 억눌리고 만다. 물론 신석기시대의 종교예술에도 이미 틀에 박힌 양식이 없지 않았지만 이집트 궁정예술에서 볼 수 있는 거북할 정도로 의식적인 형식은 전혀 새로운 것으로서, 이것은 인류사에서 이때 처음으로 등장한다. (75)

메소포타미아 예술에서 진정한 문제점은 경제적으로는 상업과 수공업, 화폐와 신용제도가 압도적인 비중을 점유하고 있던 이 나라의 예술이 농업 및 자연경제에 더 깊이 뿌리박고 있던 이집트 예술보더 더 엄격한 규율에 매여 있고 변화와 신선함이 적다는 사실이다. (93)

이 설에 따르면 크리티 예술이 좀더 자연스럽다는 인상을 주는 것은 양식의 문제라기보다는 오히려 소재 선택의 대담성, 즉 엄숙한 상징적인 인물을 그리지 않고 세속적이고 사소한 소재와 생기발랄한 모티프를 선택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101)

대장장이 신 헤파이스토스가 절름발이라는 것과 마찬가지로 호메로스가 이런 육체적 결함의 소유자라는 전설 속에도 선사시대의 잔재라고 할 수 있는 도 하나의 사고방식, 즉 시인과 화가, 조각가 등 예술품의 작자는 전쟁이나 전투에 부적합한 사람들 가운데서만 나올 수 있다는 사고방식이 나타나 있다. 그러나 그밖의 다른 면에서는 호메로스의 전설은 시인에 관한 신화, 즉 시인은 반신이자 기적을 만드는 능력을 가진 예언자라는 신화를 거의 그대로 계승하고 있다. (110)

봉건제도의 사회윤리는 혈연과 씨족에 의한 연대관계를 부정하고 도덕관계를 개인화 합리화한다. 씨족공동체가 점차 붕괴의 길을 밟고 있었다는 사실을 가장 두드러지게 입증하는 것은 영웅시대 이래 혈족 간의 알력이 증대하는 경향이 보인다는 점이다. 신하로서 또는 국민으로서의 충성이 강조되면서 마침내 혈연의 발언권보다 강해진다. (113)

가창시인이 왕와 가신들의 명예를 전하는 사람이라면 음유시인은 종족의 과거를 찬양하는 사람이었다. 전자는 당대의 사건들을 노래하고 후자는 역사적이거나 전설적인 사건의 기억을 불러일으켰다. 시작품을 만드는 것과 이를 낭송하는 것이 아직 제각기 전문화된 별개의 두 직업은 아니었으나 예전처럼 낭송자가 반드시 그 저작자인 것은 아니었다. (120)

그리스의 영웅시는 한번도 민중문학이었던 적이 없다고 보는 학설까지 있는데, 이 점에서 바로 독일 중세의 서사시 <니벨룽겐의 노래>와의 유추가 성립되지 않는다고 한다. 후자의 경우는 애초부터 궁정문학으로서의 발전단계를 거친 다음 음유시인들을 통해서 민중 사이에 퍼짐으로써 일단 민중문학의 단계를 거쳤다는 최종적으로 다시 궁정문학의 형태로 귀착했던 것이다. (122)

헤시오도스 Hesiod (출처: snl.no)

그의 작품에서 다루는 소재와 가치관, 인생목표 등은 농민층, 즉 지주귀족들에게 억압받는 민중의 그것이었다. 헤시오도스 작품의 세계사적 의의는 그것이 사회적 긴장과 계급 간 대립의 최초의 문학적 표현이었다는 데 있다. (125)

새롭게 등장한 이른바 '아케이즘' 양식은 에게 해 동서쪽 예술의 종합으로서, 즉 도시경제 중심의 이오니아 예술과 여전히 거의 농업과 축산업에만 의존하던 그리스 본토 예술의 종합으로서 생겨난 것이다. 미케네(Mycenae) 시대가 끝나고 아케이즘 시대가 시작될 때까지 그리스에는 신전도 궁전도 존재하지 않았고 어떤 종류의 기념비적 예술도 만들어지지 않았다. (130)

이오니아와 그리스 본토 (출처: Wikipedia)

조각과 문학작품의 대상은 모두 귀족으로서 고도의 훈련을 받고 경기를 위해 철저히 단련된 인간형이고 이상적 남성상이었다. 올림피아 경기에 참가하는 것은 귀족들만의 특권이었다. (136)

그들(참주, 상업귀족) 지배하에서 경제적 자유주의가 허용되고 예술이 장려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그들은 예술을 명예를 얻기 위한 수단과 선전의 도구로서만이 아니라 민중을 현혹하는 아편으로도 이용한 것이다. (141)

인간은 생활을 위한 직접적인 걱정에서 해방되어 비교적 안전해졌다고 느끼는 순간 종전에 필요에 따라 무기나 도구로 발명한 정신적 수단을 유희의 수단으로 삼기 시작한다. 자신의 생존을 위한 투쟁과는 전혀 혹은 거의 관계가 없는 일들에 관해서 원인을 캐고 설명을 구하고 인과관계를 찾기 시작한다. (144)

실용형식에서 이념형식으로, 구체적인 형식에서 추상적인 형식으로의 이러한 전환은 학문세계에서나 예술 도덕의 영역에서나 그리스에 와서야 비로소 이루어졌다. (145)

이런 유희형식이 서로 독립되고 또 생활의 전영역과 무관해짐으로써 이제까지 모든 문화에서 보던 종합적인 생활철학과 우주에 관한 직관적 지식, 고정된 세계상은 윤리 및 종교의 영역, 과학 영역, 예술 영역 등으로 분화되었다. 각 영역의 이런 자율성이 가장 현저하게 드러나는 것은 기원전 7세기에서 6세기에 걸친 이오니아의 자연철학이다. (147~148)

고대 그리스 로마에서 진정한 의미의 민중연극은 미무스(mimus, 실생활에서 취재하고 주로 흉내와 춤으로 이루어진 일종의 광대극 혹은 그 배우)였다. 미무스는 국가로부터 아무런 지원금도 받지 않았기 때문에 상부의 어떤 지시도 따를 필요가 없었고 민중과 접촉해 얻은 스스로의 직접체험에만 의존하면서 자유롭게 활동했다. (157)

새로 등장한 시민적 미덕은 귀족계급이 지녔던 기사의 이상이나 올림피아 경기자의 이상을 대신해 지식, 논리적 사고, 정신과 말의 훈련 등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 지식인을 만들어내는 것이 교육의 목표로 설정된 것은 인류사상 처음이었다. '유식쟁이'에 대한 핀다로스의 모멸을 상기해 볼 때 소피스트의 세계가 스파르타의 체육교사의 세계와 얼마나 동떨어진 것인가를 알 수 있다. (168~169)

에우리피데스 작품 속에서 남편에게 반항하는 메데이아는 종전의 비극에 나오던 여주인공들보다는 오히려 헤벨이나 입센의 극에 등장하는 여성에 가깝다고까지 생각될 정도이다. 전쟁에 나가 혁혁한 공훈을 세우는 것보다 아이를 낳는 편이 더 용기가 필요한 일이라고 서슴지 않고 내뱉는 여성은 그때까지의 비극의 여주인공들과는 너무나 동떨어진 존재가 아닌가! (173)

에우리피데스(출처: flickr)

에우리피데스는 아이스킬로스 같은 장군도 아니고 소포클레스처럼 높은 성직을 맡고 있지도 않았으며, 세상을 등진 학자의 삶을 산 최초의 시인으로 알려져 있다. (178)

에우리피데스가 예술가로 세속적인 성공을 거두지 못한 주요한 원인은 당시 사회에 교양있는 중산층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데 있다. 그의 작품은 낡은 세력의 대표자인 귀족들에게는 세계관 때문에 환영받지 못한 반면, 신흥 시민계층은 교양 면에서 그것을 따라갈 수가 없었다. (179~180)

플라톤은 미래의 이상국가에서 예술가를 추방했는데, 예술가는 경험적 현실세계와 현상계의 감각적 인상, 즉 완전한 가상 내지 부분적 진리에 집착하며 모든 것을 감각의 관점에서 표현하려 하여 순수한 정신적 당위의 세계인 순수 이데아를 저속하게 만들고 왜곡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181)

기원전 4세기 이후 아테네에서는 기존의 금기를 깨고 여자의 나상을 제작했다. 새로운 모티프와 새로운 장르가 등장한 것이다. (183)

동일한 사회계층에서 전혀 다른 여러 예술양식과 유행이 생겨나고, 전혀 다른 양식의 예술작품이 동일한 사회계급과 동일한 교양층을 위해 만들어진 시대는 헬레니즘 이전에는 거의 없었던 것이다. 헬레니즘 시대의 '자연주의' '바로끄' '로꼬꼬' '고전주의' 풍의 양식들은 물론 역사적으로는 서로 시차를 두고 발생했지만 일단 생겨난 뒤에는 동시에 병존했으며, (...) (189)

그리스의 영향이 아직 지배적이던 아우구스투스 시대에는 예술에서 조각이 주도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시대가 끝남과 동시에 회화가 점차로 세력을 뻗기 시작하여 마침내 건축조각과 기념비 조각을 거의 전부 대체하다시피 하게 된다. 3세기에 이르면 그리스 조각의 복제품 제조는 중지되고, 그뒤 200년 동안은 모든 실내장식을 회화가 거의 독점해 버렸다. (196)

같은 시대에 조형예술가를 사회적으로 경시하는 소리가 끝내 사라지지 않았다는 사실은 고대 그리스 로마 시대가 말기에 이르러서도 베블런의 이른바 '전시적인 여가'에 해당하는 선사시대 이래의 체면의식에서 탈피하지 못했고, 그 자랑스러운 미적 문화에도 불구하고 르네상스나 근대의 천재 개념 같은 발상에는 결코 도달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213)


독서습관 732_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1_아르놀트 하우저_2019_창비



■ 저자: 아르놀트 하우저

헝가리 태생의 맑스주의 예술사학자. 1892년 헝가리 테메슈바르(현 루마니아 티미쇼아라)에서 태어나 부다페스트와 빠리에서 게르만어 로망스어 및 철학을 공부했다. 부다페스트 '일요써클'에 참여해 카를 만하임, 죄르지 루카치 등과 교유했으며, 독일 낭만주의 미학 연구로 부다페스트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잠시 교수로 일했다. 1919년 쏘비에뜨 정권에 맞선 헝가리 반혁명이 일어나자 이딸리아로 건너가 예술사를 공부했다.

이후 베를린에 머물며 문학과 예술에 관한 사회경제사의 관점을 진전시켰다. 나치가 득세하면서 빈 영화계로 자리를 옮겨 저서에 필요한 자료를 수집하다가 1938년 영국 런던으로 이주했다. 리즈 대학의 전임강사로 일한 뒤 테오도르 아도르노의 초청으로 프랑크푸르트의 독일 여러 대학에서 강의했으며, 미국 브랜다이스 대학과 오하이오 대학에도 머물렀다. 1978년 타계하기 전 부다페스트로 귀향해 헝가리 학술원 명예회원이 되었다.

지은 책으로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를 비롯해 <예술사의 철학> <매너리즘: 르네상스의 위기와 근대예술의 기원> <예술사회학> <루카치와의 대화> 등이 있다.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는 그가 1941년 카를 만하임의 권유에 따라 예술사 선집에 서문을 쓴 것을 계기로 십여 년에 걸쳐 집필한 대표작이다. 1951년 영문판이 처음 출간되면서부터 예술 이해에 사회사적 관점을 적용한 '새로운 예술사'로서 유럽 지성계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으며, 오늘날까지 20여 개 언어로 번역되어 지식인의 필독서로 자리 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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