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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습관

[686]밀란 쿤데라 커튼③_찢어진 커튼 & 소설 기억 망각

by bandiburi 2023. 1. 28.

Milan Kundera (출처: Wikimedia Commons)

밀란 쿤데라의 <커튼> 마지막 포스팅이다. 인용하고 싶은 문장이 많다는 사실은 독자로서 새롭게 깨닫게 된 부분이나 알게 된 부분이 많다는 것의 반증이다. 또한 좋은 책이라고 독자로서 추천한다는 의미다. 

6부 찢어진 커튼

한 보잘것없는 시골 신사 알론소 키하다는 존재에 대한 세 가지 질문과 함께 소설이라는 예술의 역사를 열었다. 개인의 정체성이란 무엇인가? 진실이란 무엇인가? 사랑이란 무엇인가? (166)

스스로 '라만차의 돈키호테'라고 부르던 노인 알론소 키하다는 소설의 새로운 역사를 열었다. 밀란 쿤데라는 그가 세 가지 질문을 던졌다고 한다. 개인의 정체성, 진실, 사랑이다. <돈키호테>를 완역본으로 제대로 읽어야 할 이유다. 어린이용이 아니라 성인본으로 세르반테스가 고민했던 스페인의 정체성, 당시의 시대상을 상상하며 도전해야 한다. 

1920년의 엥겔베르트 씨는 '폭발하는 괴물'의 소리에 깜짝 놀랐다. 다음 세대는 그것을 당연하게 생각했다. 엥겔베르트 씨를 두렵게 하고 고통스럽게 했던 소음이 차츰차츰 인간을 개조한 것이다. 언제 어디에나 존재함으로써 결국 인간에게 소음의 필요성을 각인시켰고, 그와 더불어 자연, 휴식, 기쁨, 아름다움, 음악(음악은 끊임없는 배경음악이 되어 버려 그 예술적 성격을 잃었다), 심지어 말(말은 소리의 세계에서 이제 더 이상 예전처럼 우위를 차지하지 않는다)에 대해서조차 전혀 다른 태도를 갖게 만들었다. (169)

자동차가 처음 등장했을 때 사람들은 그 소음에 놀랐다. 점차 익숙해졌다. 스마트폰이 처음 등장했을 때 우리는 환호했다. 그리고 놀라운 변화는 현실이 됐다. 더 이상 환호하지 않는다. 소음으로부터 단절된 휴식이 사라졌다. 인간과의 관계가 스마트폰으로 대체되었다. 말이 더 이상 우위를 차지하지 않는다. 이것을 쿤데라는 인간의 개조라고 부른다. 

프랑스 대혁명을 배경으로 하는 소설 <1793년>(1874)을 쓴 빅토르 위고만큼 비극적 페이소스에 매혹당한 소설가는 아마 없을 것이다. 분장을 하고 의상을 차려입은 세 주인공은 무대에서 소설로 곧장 넘어온 듯한 인상을 준다. 열정적으로 왕정에 충성하는 랑트낙 후작, 그에 못지않게 혁명의 진리를 확신하는 혁명의 주요 인물 시무르댕, 마지막으로 시무르댕의 영향을 받아 혁명군의 장군이 된 귀족이자 랑트낙의 조카 고뱅. (171)

<마담 보바리>에 "선이 너무 결여되어 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난점은 다른 데 있다. 거기에는 어리석음이 너무 충만한 것이다. 바로 그것 때문에 샤를은 생트 뵈브가 보고 좋아했을 '멋진 장면'에 쓰일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플로베르는 '멋진 장면'을 만들려고 하지 않았다. 그는 '상황들의 정수'에 도달하고자 했다. (176)

이런 책의 설명을 보면 읽었던 책의 내용도 희미해졌다는 사실을 알고 <레미제라블>과 <마담 보바리>를 다시 읽어보고 싶은 마음이 든다. 독서 후에 이렇게 포스팅을 하는 이유도 조금이라도 더 책의 내용을 나만의 것으로 소화하고자 하는 의도가 있다. 

세상의 모든 지식을 섭렵하기로 결심한 두 퇴직자, 부바르와 폐퀴셰는 농담의 주인공들인 동시에 수수께끼의 주인공들이다. 그들은 그들 주위의 어떤 사람들뿐만 아니라 그들의 이야기를 읽어 갈 모든 독자들보다도 훨씬 지식이 많다. (...) 하지만 그들을 어리석다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들은 왜 어리석어 보이는 것일까? (179)

<부바르와 폐퀴셰>도 여러 곳에서 인용되었다. 세상의 많은 지식을 가진 두 퇴직자, 왜 그들은 사람들에게 어리석다고 생각되었을까. 독자에게 호기심을 던진다. 역시 내게 읽을거리의 추가다. 

리자흐는 계속했다. '내 생각을 분명히 하자면, 나쁜 것을 좋은 것으로, 좋은 것을 나쁜 것으로 교체하는 부품 교환이 있을지라도 제대로 작동하는 이상적인 시계가 만들어져야 한다는 것이네. 그런 시계는 물론 상상할 수도 없지. 하지만 행정은 정확히 이런 형태 아래서만 존재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그것이 겪은 변화에 비추어 사라져 버리거나 해야 하지.' 따라서 관리는 자기가 담당하는 문제에 대해 이해할 필요가 없다. 그는 옆 사무실에서 어떤 일이 진행되는지도 모르는 채, 심지어 알려고도 하지 않은 채 그저 다양한 작업들을 열성적으로 수행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182~183)

조직은 이상적인 시계와 같다. 행정기관도 마찬가지다. 인간은 하나의 부품이 되었다. 자신의 역할만 충실하게 하면 된다. 때가 되면 다른 사람으로 교체할 수 있다. 목가적이고 평화로운 자연 속의 인간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사무실, 관리, 군대, 서류 등과 같은 관료적인 사회 속의 존재가 되었다. 소설가는 이런 변화에 렌즈를 비춘다. 

슈티프터(그리고 그의 제자들)의 다른 많은 산문의 배경이 되기도 한 이 세상은 중부 유럽에서 목가적이고 이상적인 삶의 상징이 되었다. 그런데 슈티프터의 독자인 카프카가 평화로운 마을과 성의 세계에 사무실과 관리들의 군대와 서류 사태를 침입시킨다. 잔인하게도 그는 관료화의 전적인 승리라는 정반대의 의미를 성과 마을에 부여함으로써 반관료적 목가의 신성한 상징을 침범한다. (185)

부모의 인생과 내 인생의 차이는 매우 두드러진다. 관료주의는 삶의 모든 조직에 침투했다. "K는 이토록 복잡한 삶과 행운은 어디에서도 본 적이 없었다. 너무 복잡한 나머지 때때로 삶과 행정이 서로의 자리를 대신한다고 느낄 정도였다." (<성>) 존재의 모든 개념이 단숨에 그 의미를 바꾸었다. (187)

그들은 모두 미지로의 여행의 출발점에 있다. 물론 그들은 방황한다. 그러나 그것은 특별한 방황이다. 그들은 방황하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 채 방황하는 것이다. 이중적인 의미에서 경험이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세상을 모르고 또, 자기 자신을 모른다. 어른이 되어서 거리를 두고 볼 때에야 방황이 방황으로 보인다. (193~194)

혁신적인 젊은 예술가가 대중의 마음을 끌고 사랑받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후에 그는 저녁의 자유가 불어넣어 주는 영감을 받아 다시 한 번 자기 스타일을 바꾸고 스스로에 대해 만들어 냈던 이미지를 버린다. 대중은 선뜻 그를 따르기를 주저한다. 이탈리아 영화계의 젊은 친구들과 결속되어 있던 페데리코 펠리니는 오랫동안 만인의 찬탄을 누렸다. <아마코드>(1973)는 모든 사람이 그 서정적 아름다움에 동의한, 그의 마지막 영화였다. 그러고 나서 그의 상상력은 점점 더 사슬이 풀리고 그의 시선은 더욱 날카로워진다. 그의 시는 반서정적이 되고 모더니즘은 반현대적이 된다. 마지막 15년간 일곱 편의 영화, <카사노바>, <오케스트라 리허설>, <여성의 도시>, <돛단배>, <진저와 프레드>, <인터뷰>, <달의 목소리>는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 대한 냉혹한 초상화다. (197)

이탈리아의 페데리코 펠리니를 통해 예술가가 스스로의 스타일을 바꾸고 새로운 모습으로 만인의 찬탄을 받은 사례를 소개한다. 서정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했으나 이제는 반서정적이고 반현대적이다. 젊은 시절의 낭만적이고 감상적인 모습이 경험이 축적되며 새롭게 인간의 실존을 조명하는 예술가들이 있다. 그들은 세상의 냉혹함을 더욱 잘 알기에 그 부분을 드러내고 싶은 것이다. 


7부 소설 기억 망각

소설가는 황폐화시키는 이 망각에 직면하여 무엇을 해야만 할까? 소설가는 독자가 결코 자신의 소설에 머무르지 않고 오로지 건성으로 빠르게 스쳐 지나가 곧장 잊어버릴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러면서도 그는 이 망각을 무시하고 자신의 소설을 잊힐 수 없는 것의 파괴되지 않는 성으로 만들어 갈 것이다. (208)

시에 있어서, 보들레르, 그러니까 천하의 보들레르가 전후의 무수한 시인과 똑같은 소네트 형식을 사용할 수 있었다는 것이 정말 놀랍지 않은가? 그러나 바로 그러한 것이 시의 기법이다. 시의 독창성은 상상력에 의해 발현되지 전체의 건축술에 의해 드러나는 것이 아니니까. 반대로 소설의 아름다움은 그 소설의 건축술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내가 방금 아름다움이라고 했는데, 왜냐하면 구성은 단순한 기술적 기량이 아니기 때문이다. 구성은 그 자체로 한 작가가 표방하는 스타일의 독창성을 보여 준다. (210~211)

시와 소설의 차이를 설명하고 있다. 시는 우리가 기억한다. 하지만 소설은 스토리를 기억하기에 시간이 지나면서 더 쉽게 잊힌다. 망각의 심연으로 떨어지지 않도록 소설가는 자신의 성을 구축하고자 한다. 그리고 소설은 소설가의 설계에 따라 자신의 스타일로 만들어지는 일종의 건축술이다. 

내게 부족했던 것은 역사적 사건들에 대한 지식이 아니었다. 나는 다른 지식이, 플로베르가 말했을 법한, 인류의 내용을 파악하는, 역사적 상황의 '혼'으로 파고드는 지식이 필요했던 것이다. 어쩌면 나는 한 소설을 통해서, 위대한 한 소설을 통해서 그 당시 체코인들이 어떻게 그들의 결정을 감내했는지를 이해할 수 있었을 텐데. 그런 소설 한 권 쓰인 적 없다. (215)

체코슬로바키아 출신으로 역사적 상황을 깊이 파고드는 책 한 권이 쓰이지 않은 아쉬움을 표현한다. 위대한 책을 통해 우리는 시대를 알고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 그리고 그들의 행위를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의 역사를 보더라도 남아 있는 기록물에 의지해서 유추한다. 기록으로서의 역사의 의미가 강조된다. 

브로흐는 소설 형식에 새 길을 열었다. 카르펜티에르의 작품 역시 이와 동일한 길에 있을까? 그렇고말고, 그 어떤 유명한 소설가일지라도 소설사에서 벗어날 수는 없으니까. 그러나 유사한 형식의 이면에는 서로 다른 의도들이 숨어 있다. 역사의 다양한 시기들을 대조해 놓고서, 카르펜티에르는 위대한 종말의 미스터리를 풀려고 하지 않았다. 그는 유럽인이 아니다. 그의 시계(서인도 제도와 라틴아메리카 전역의 시계) 위의 바늘들이 자정을 가리키려면 아직 멀었다. 그는 "우리는 왜 사라져야만 하는가?"라고 자문하지 않는다. 그 대신 "우리는 왜 태어나야만 했는가?"라고 묻는다. (222)

모든 '서간체 소설' 가운데 세월이 흘러도 꺾이지 않고 버텨 온 아주 위대한 책 한 권이 남아 있다. 바로 쇼데를로드 라클로의 <위험한 관계>(1782)다. <내가 죽어 누워 있을 때>를 읽으면서 내가 떠올린 소설이기도 하다. (229)

시간이 지나도 아주 위대한 서간체 소설이라는 <위험한 관계>가 어떤 책인지 궁금해지는 부분이다. 

오랜 기간, 예술은 새로움을 추구하지 못한 채 반복을 아름답게 만들고 전통을 강화하고 집단의 삶을 더욱더 견고하게 만드는 데 충실했다. 그 기간에 음악과 무용은 사회적 제의, 미사와 축제라는 틀 안에서만 존재했다. 그러나 12세기 어느 날 파리의 한 교회 음악가가 수세기 동안 변함없던 그레고리오 성가의 멜로디에 대위법을 이루는 한 목소리를 첨가할 생각을 하게 되었다. 기본 멜로디는 여전히 태고 상태 그대로를 유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대위법을 이루는 그 목소리는 혁신을 이루었다. 그리고 이 혁신은 또 다른 혁신들에 (...) 이렇게 비상을 이룬 음악은 수세기를 거쳐 음악의 역사가 되었다. 유럽의 모든 장르의 예술은 각각 그때가 되어서 이런 식으로 비상을 하고 나름의 역사로 변화되었다. (231)

한 권의 책을 세 번에 걸쳐 포스팅하며 다시 한번 <밀란 쿤데라의 커튼>을 되새겨 본다. 역시 감당하기 쉽지 않은 책이다. 그래도 남기고 싶은 부분을 반복해서 읽어보며 조금 더 나의 것으로 소화할 수 있었다. 어려운 책을 소화하기 위해 기초체력이 필요하다. 그 체력은 폭넓은 좋은 책과의 대화다. 


독서습관686_커튼_밀란 쿤데라_2012_민음사(230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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