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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습관

[686]밀란 쿤데라 커튼②_사물의 핵심에 도달하기 & 소설가란 무엇인가 & 미학과 삶

by bandiburi 2023. 1. 28.

두 번째 소감을 이어서 포스팅한다. 

3부 사물의 핵심에 도달하기

예술은 모두 같지 않다. 그것들 각각이 세계에 도달하는 것은 서로 다른 문을 통해서다. 이 문 가운데 하나는 전적으로 소설의 몫이다. (87)

프란츠 카프카의 세 소설은 동일한 상황의 세 변주다. 인간은 타인이 아니라 거대한 행정 조직으로 변한 세계와 갈등 관계에 놓인다. 첫 번째 소설(1912년에 쓰인)에서 인간의 이름은 카를 로스만이며 세계는 아메리카다. 두 번째 소설(1917년)에서 인간은 조셉 K이며, 세계는 그를 고소한 거대한 법정이다. 세 번째 소설(1922년)에서 인간은 K이며 세계는 성에 의해 지배당하는 마을이다. (...) 바로 이러한 문제들을 뒤집고, 인간의 삶에 다른 방식의 질문을 던지며, 개인의 정체성을 다른 방식으로 인식함으로써 카프카는 과거의 문학뿐만 아니라 그의 위대한 동시대인들인 프루스트나 조이스와도 구분된다. (91)

카프카의 책이라면 왠지 어렵다는 느낌이다. 개개의 인간에 대한 관심은 없다. 인간의 삶에 대한 다른 접근방법을 택했다. 우리의 정체성을 기존의 소설가들과 다르게 인식했고 그래서 낯설게 느껴진다. 거대한 조직 내에서의 인간을 바라봤다. 새로운 소설 구성방식을 채택했고 그는 우리에게 위대한 작가로 남아 있다. 카프카의 책도 다시 도전해야 할 목록으로 남는다. 

여기에 소박하지만 근본적인 미학적 전환점이 있다. 어떤 인물에 관해서 모든 정보가 주어져야만 그 인물이 '생생하고 강렬하며' 예술적으로 '성공적'이 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그가 우리처럼 실제적인 존재라고 믿게 해야 할 필요는 없다. 강렬하고 잊을 수 없는 인물이 되기 위해서는 소설가가 그를 위해 창조한 상황의 공간을 가득 메우기만 하면 된다. (94)

이 단어 하나를 포기함으로써 정치적 측면은 어슴푸레한 빛에 싸이고, 소설가가 관심을 가진 주요한 문제인 실존의 수수께끼에 조명이 집중되기에 충분해진다. (...) 소설가는 역사의 하인이 아니다. 소설가를 매혹시키는 역사란, 인간 실존의 주위를 돌며 빛을 비추는 탐조등, 역사가 움직이지 않는 평화로운 시기였다면 실현되지 않고 보이지 않고, 알려지지 않았을 뜻밖의 가능성들에 빛을 던지는 탐조등으로서의 역사다. (97)

'소설가는 역사의 하인이 아니다'라는 말이 강렬하게 다가왔다. 소설가는 잠잠하게 흘러가는 듯 보이는 역사 속에서 인간 실존 주변을 탐색하며 새로운 가능성들에 조명을 비추는 존재다. 그래서 소설가의 역사는 다르다. 어쩌면 소설가의 눈은 늘 날카로움을 유지하며 새로운 실존의 이슈를 찾아 두리번거리고 있을 것이다. 

다음 사실을 강조해 보자. 브로흐와 무질이 현대 소설 미학에 도입한 것과 같은 소설 속의 사색은 과학적 사색이나 철학적 사색과는 무관하다. 심지어 일부러 비철학적, 더 나아가 반철학적이기까지 하다고 말할 수 있다. 즉 모든 선입관의 체계로부터 철저하게 독립적이라는 것이다. 소설의 사색은 판단을 내리지 않고 진리를 부르짖지 않는다. 그것은 스스로 질문하고 놀라고 탐색한다. 그 형태도 매우 다양하다. (...) 등장인물들의 삶이야말로 그것을 살찌우고 정당화하는 것이니까. (100)

발자크나 플로베르, 프루스트가 구체적인 사회 환경 속에서 개인의 행동을 묘사하고자 할 때 개연성을 위반하면 모두 부적절하고 미학적 일관성이 없는 것이 된다. 그러나 소설가가 실존적 문제 제기에 목표를 둘 때, 독자를 위해 개연적 세계를 창조해야 할 의무는 더 이상 규칙이나 필수품이 아니다. (...) 극단적인 경우에는 인물들을 명백한 비개연성의 세상에 배치하는 것이 더 유리할 수조차 있다. (102)

우리가 읽기 쉬운 소설이란 '개연성'이 있는 소설이라고 본다. 하지만 실존적 문제를 다룰 때 소설가에게 개연성은 더 이상 필수가 아니라고 말한다. 최근에 읽었던 소설 중에 난해하다고 생각되는 종류는 대체로 비개연성의 소설이었다. 그만큼 독자에게 인간의 실존의 문제에 집중하라는 의미가 아닐까. 하지만 독자에게 더 사고할 것을 요구한다.

곰브로비치의 <페르디두르케>에서 핌코 교수는 서른 살의 유조를 열여섯 살의 청소년으로 되돌아가게 해서 매일 고등학교의 책상 앞에 앉아 고등학생들 사이에서 학생으로 지내게 하기로 결정한다. 이 터무니없는 상황은 사실 매우 심오한 질문을 내포하고 있다. 모든 사람이 철저하게 청소년 대하듯 대하면 어른도 결국 실제 나이에 대한 자각을 잃게 될까? 더 일반적으로 말해서, 인간은 다른 사람들이 그를 바라보고 대하는 대로 될까, 아니면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것에 반해, 자신의 정체성을 지킬 힘이 있을까? (107~108)

동일한 환경에서 반복적인 행동은 우리의 정체성에 대한 의심을 점차 희미하게 만들 것이다. 저자의 질문에 대한 정답이 있을까. 

19세기의 모든 소설은 장면을 구성의 기본 요소로 삼았다.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소설은 반대 방향으로 향하는 길에 있다. <백년의 고독>에는 장면이 없다! 그것은 취한 듯 흘러가는 서술의 물결 속에 완전히 녹아들어 있는 것이다. (114)

라틴아메리카 친구와의 뜻밖의 사귐에서 나는 곧바로 나의 중부 유럽을 발견했다. 서로 반대되는 양극단에 위치한 서양의 두 변경. 무시당하고, 경멸당하고, 버려진 두 땅, 두 천민의 땅. 바로크의 경험에 가장 깊은 상처를 받았던 세계의 두 부분. (...) 바로크가 라틴아메리카에는 정복자의 예술로 들어왔고, 나의 모국에는 특히 유혈의 반종교 개혁에 의해서 전해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막스 브로트는 프라하를 '악의 도시'라고 불렀다. (115)

라틴아메리카 국가들과 중부 유럽 국가들의 공통점을 발견한다. 세계를 리드하는 국가들에 의해 무시당하고 외면받은 곳이며 상처받은 곳이다. 한반도는 어떤가. 역시 동일한 역사를 밟았다. 


4부 소설가란 무엇인가? 

전설들로 짜인 마법 커튼이 세상 앞에 걸려 있다. 세르반테스는 돈키호테를 떠나보내면서 그 커튼을 찢었다. 아무런 장식 없는 희극적 산문을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는 기사 앞에 세상이 활짝 열렸다. (...) 진부한 그렇고 그런 산문과 낡아 빠진 상징으로 유명세를 얻은 소설은 소설사에서 제외된다. 실제로 세르반테스가 새로운 소설 기법을 개척했던 것은 바로 선해석의 커튼을 찢어 버렸기 때문이다. 그의 이 파괴적 행위는 소설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소설이라면 그 어느 것에서나 반영되고 이어진다. 이것은 소설이란 예술임을 증명하는 표시이니까. (126~127)

박웅현이 <다시 책은 도끼다>에서 인용했던 부분이다. 전설 속의 완벽한 영웅들의 진정한 모습은 우리에게 커튼으로 가려져 있었다. 하지만 세르반테스는 돈키호테를 등장시키면서 그 커튼을 제거했다. 그리고 돈키호테의 불완전한 인간으로서의 실존을 그대로 드러냈다. 예술로서 소설의 일보전진이다. 

그중에서도 예술가의 영광이 가장 끔찍하다. 왜냐하면 그 영광이 불멸할 것이라 생각하니까. 그것은 악마가 파 놓은 함정이다. 예술가의 마음속에 불멸을 바라는 그로테스크하기까지 한 과대한 야심이 반드시 있어야 예술가는 예술가로서의 사명을 성실하게 수행할 수 있으니 말이다. 진정한 열정으로 만들어진 소설이라면 너무도 당연하게 영구적인 미학적 가치를, 즉 작가의 사후에도 여전히 살아남을 수 있는 가치를 인정받고 싶어 한다. 이러한 야망 없는 글을 쓰는 것은 파렴치한 일이다. (128~129)

소설가는 죽지만 소설은 영원히 남는다. 선택받은 소설만 그런 불멸의 영광을 누릴 수 있다. 소설가라면 이런 불멸의 작품을 남기겠다는 야망이 있어야 한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그런 열정 없이 소설을 쓴다는 것은 파렴치한 일이라고 일침을 놓는다. 

작가는 자신의 삶을 말하려고 소설을 쓰지 않는다. 그는 독자의 면전에서 그들의 삶을 밝게 비춰 주고 싶어서 글을 썼던 것이다. "(...) 독서는 독서하는 순간 자기 자신에 대한 고유한 독자가 된다. 작가의 작품은 일종의 광학 기구에 불과하다. 작가는 이 기구를 독자에게 줌으로써 이 책이 없었다면 아마도 자기 자신 안에서 볼 수 없었을 것을 알아볼 수 있도록 돕는다. 독자가 책이 말하는 것을 자기 자신 안에서 인정하는 일은 진실과 대면하는 것이다 (...)" 프루스트의 이 문장들이 오로지 프루스트 소설의 의미만을 밝혀 주고 있지는 않다. 더 넓게 소설이라는 예술을 아주 간단하면서도 명료하게 정의 내려 주고 있다. (132)

소설을 정의한 프루스트의 말이 아주 마음에 든다. 우리가 책을 읽는 이유도 작가가 제공하는 다양한 렌즈를 통해 보지 못했던 세상을 보고 싶기 때문이다. 그리고 책에서 주장하는 부분과 기존의 생각을 비교하고 평가해서 자신의 생각을 더욱 풍성하게 만드는 과정이 독서다. 

소설가가 쓴 모든 것, 편지, 메모, 일기, 논문 전부가 작품이 되는 게 아니니까. 작품은 미학적인 설계도를 따라 아주 긴 작업을 거친 끝에 나오는 것이다. (133)


5부 미학과 삶

내가 미학 개념에 흥미를 느끼기 시작한 것은 그것들이 삶에 뿌리내리고 있음을 깨닫고서다. 그러니까 미학 개념을 존재의 개념으로 이해했을 때다. (144)

'미학'이란 말이 지속적으로 등장한다. 하지만 이해하기 어렵다. 미학이 하나의 학문으로 정립된 것은 그만큼 영향력이 크기 때문일 것이다. 관련된 독서도 도전거리다. 

제임스 조이스와 카프카는 이 문제들의 극한을 건드렸다. 조이스의 거대 현미경은 일상의 자잘한 동작 하나하나를 엄청나게 크게 부풀리는데, 그런 식으로 상당히 평범한 블룸의 하루를 스케일이 큰 현대판 <오디세이>로 변화시킨다. (...) 조이스의 현대판 <오디세이> 옆에 자리하고 있는 카프카의 <성>은 현대판 <일리아드>이다. 더는 접근할 수 없는 공간인 서사 세계의 이면에서 몽환적으로 그려지고 있는 오디세이와 일리아드. (146)

작가는 시간과 공간을 압축할 수도 있고 팽창시킬 수도 있다. 작가가 독자에게 보여주고 싶은 렌즈에 따라 현미경이나 망원경을 사용하는 것이다. 그래서 제임스 조이스와 카프카의 책을 도전해야 할 이유가 생겼다. 

로렌스 스턴은 자신의 요리에 관한 이야기를 하면서 '아젤라스트'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그것은 라블레가 웃을 줄 모르는 이들을 가리키기 위해서 그리스어로 만들어 낸 신조어다. (148)

우리는 이미 돈키호테가 그 젊은이의 자작시들에 찬사를 보내자 그가 자기도취적 기쁨에 빠진 것을 봤으니까. 지금 이 장면의 첫 부분을 다시 보니까 아들이 나이에 걸맞지 않게 거드름을 피우며 행동하는 것이 바로 나타난다. 그러니까 처음부터 희극적으로 보인다. 바로 이런 식으로 어른은 세상을 본다. 어른이라 하면 이전에 '인간 본성'이 어떤지 산전수전을 다 겪어 봐서 오래전에 인간들의 근엄한 태도를 심각하게 여기길 그만둔 존재니까. (152)

<안티고네>를 이처럼 정치적으로 구현한 작업들이 2차 대전 직후 상당히 유행했다. 히틀러는 유럽에 형용할 수 없는 공포를 가져다주었을 뿐만 아니라 유럽 비극이 나아가야 할 방향마저 뒤틀어 놓았다. 아마도 그때부터 동시대의 정치사 전부는, 나치주의에 대항하는 전투를 모범으로 삼아 선악 대결의 싸움으로 간주되고 또 그런 식으로 만들어졌을 것이다. (154)

슈베이크는 탈영병이다. 그 용어의 법률상 의미(군대를 불법적으로 이탈한 사람)로서가 아니라 대규모의 집단 싸움에 대해 그가 보이는 철저한 무관심에서 그렇다. 정치적, 법률적, 도덕적, 어느 모로 보나 탈영병은 유쾌하지 못한 존재, 벌을 받아야 마땅한 존재, 겁쟁이와 배반자에 속하는 존재로 보인다. 하지만 소설가의 시선은 그를 다른 식으로 바라본다. 탈영병을 동시대인들이 벌이는 싸움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기를 거부하는 자로 말이다. 그는 엄청난 살육의 현장에서 비극적 위대함을 보고 싶어 하지 않는다. 역사가 벌이는 코미디에 어릿광대로 출현하기를 싫어한다. (156)

국가는 국민들에게 탈영병은 비겁하고 도덕적이지 않으며 법을 어기는 존재로 포장해서 보여준다. 그래야 애국심을 고취시킬 수 있고 국가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기꺼이 버릴 수 있는 존재를 키워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작가는 탈영병 슈베이크를 통해 다른 시선을 보여 준다. 왜 싸움에 참여해야 하는지 의문을 제기한다. 누구를 위한 전쟁인가. 그 살육의 현장에서 승자와 패자의 의미는 무엇인가. 일종의 코미디다. 누군가에 의해 조장되는 코미디에 출연하기를 거부하는 행위다. 크게 공감 가는 부분이다. 

헤밍웨이는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나>의 10장에서 파시스트들에게 점령되었던 한 소도시를 공화군들(남자로서 또 작가로서 그가 공감대를 나누는 이들은 바로 공화군들이다)이 탈환한 날에 대해서 말한다. 공화군들은 재판도 없이 스무 명가량의 사람들에게 유죄 판결을 내린 다음 그들을 죽음이 기다리는 곳으로 끌고 간다. (...) 겨우 알코올의 힘을 빌려서 또 피 맛에 자극을 받고 나서야 그들은 흥분하기 시작한다. (160)

헤밍웨이가 소설을 통해 보여주고 싶은 것은 무엇인가. 작가가 동조하는 공화군이 파시스트로부터 소도시를 회복한다. 그리고 그들이 한 일은 얼마나 잔인했는가. 이데올로기에 따라 재판도 없이 인간은 버려진다. 인간이 인간을 상대로 신의 역할을 한다. 죽어야 하는 사람이 있는가. 왜 그렇게 생각하는가. 다시 '무엇을 위해'라는 질문으로 돌아간다.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참혹해 질 수 있다. 우리는 늘 질문하고 사유해야 하는 존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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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란 쿤데라 커튼③_찢어진 커튼 & 소설 기억 망각

밀란 쿤데라의 마지막 포스팅이다. 인용하고 싶은 문장이 많다는 사실은 독자로서 새롭게 깨닫게 된 부분이나 알게 된 부분이 많다는 것의 반증이다. 또한 좋은 책이라고 독자로서 추천한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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