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기행>의 후반부는 카잔차키스가 스페인 내전의 한복판에서 진행된다. 한반도에서 먼 나라 스페인, 그리고 1936년이란 암울한 시대에 스페인에서 일어난 전쟁은 우리에게 희미하게 들리는 이야기다. 헤밍웨이, 생텍쥐페리 및 앙드레 말로 등 많은 지식인들이 스페인 내전에 참여했고 그 경험담을 자신의 글로 우리들에게 전하고 있다.
스페인 내전에 대해 그 심장부에서 당사자들과 대화하고 그들의 목소리를 전하며 그 참상을 객관적으로 전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전반부에는 스페인 각 지역에 대한 역사와 지리, 예술이 조화를 이룬 깊이 있는 설명이 지배했다면 후반부는 열정적인 스페인이 전쟁의 혼돈 속에서 얼마나 추락할 수 있는지 보여준다.
이 글을 쓰는 지금, 나는 완전한 책임 의식을 가지고 보여 줄 것이다. 난 내가 본 것을 정직하고 명확하며 공평하게 쓸 것이다.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내가 이 글을 쓰는 목적은 특정 사상을 옹호하는 것도 아니고, 특정 진영의 영웅적 행동이나 범죄를 은폐하거나 찬양하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나의 목적은 다른 곳에 있다. 내가 보고 들은 것을 증거로 제공함으로써, 지금 스페인이라는 이름으로 진행되는 이 엄청난 인간적 상처를 당신에게 있는 그대로 보여 주려는 것이다. (190)
"스페인 사람들은 미쳤소!" 그가 소리쳤다. "스페인 사람들뿐만 아니라 오늘날 전 세계가 미쳤소. 왜 그런지 아시오? 전 세계 젊은이들의 정신이 와해되고 있기 때문이오. 그들은 성신을 비웃을 뿐만 아니라 증오하오. (...) 그들은 스포츠, 행동, 전쟁, 계급투쟁 등을 원하오.(...)" (204~205)
전쟁으로 인간의 육체와 정신이 파괴된 현장을 생생하게 드러내는 말들이다. 미겔이 쓴 일기에 기록된 참상은 끔찍하다. '망할 전쟁!'이라 외치는 미겔의 마음이 전해진다. 누구를 위한 전쟁인가. 세계 어느 곳에서든 물리적인 전쟁이 없어야 한다. 하지만 현재도 지구 반대편에서는 사람들이 전쟁으로 죽음의 공포에서 살고 있다. 문명의 발달과 관계없이 지도자의 의도에 따라 수많은 국민이 피해를 본다. 인간의 사회 시스템의 문제점이다.
미겔은 아래를 바라보았다. 눈에는 눈물이 가득 고여 있었고, 그는 그런 자신을 부끄러워했다. 그의 목소리는 거칠고 딱딱해지더니 이렇게 소리쳤다. "인간을 갈기갈기 찢어 놓는 이 망할 전쟁 같으니라고! 망할 놈의 전쟁! 망할 놈 같으니라고!" 페이지를 넘기면서 피가 거꾸로 솟구치는 것 같았다. (223)
(...) 그리고 어린 군인들이 빠른 걸음으로 걷고 있었다. 그들의 앳된 얼굴은 모두 분노로 일그러져 있었고 미소 하나 없이 무표정했다. 많은 아이들이 입술을 깨물었다. 그들의 눈은 미성숙한 열정으로 빛났다. 부모들은 길가에 길게 늘어서는 박수를 치면서 환호성을 질렀다. 우리는 무자비한 위기의 시대에 들어와 있었다. '아이들이 더 이상 놀고 싶어 하지 않으면 세상은 슬픔의 길로 빠져 든 것이다!'라는 중국의 속담이 실감나게 다가왔다. (219~220)
미성년자들이 총을 메고 전쟁터로 나가야 하는 세상이 전쟁터다. 미성숙한 열정으로 들떠있는 아이들과 그런 아이들을 손뼉 치며 보내야 하는 부모들, 이런 가족을 만들어 놓은 세상이다.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 배우고 성장해야 할 아이들이 개인의 삶을 희생하며 누군가를 위해 전쟁터로 나서야 하는 사회다. 한국전쟁 시기에 우리의 상황도 유사했다. 학도병이라는 이름으로 많은 이들이 꽃도 피우지 못한 채 사라졌다.
아래의 사망한 남편의 손에 쥐어진 아내의 편지는 독자의 마음을 흔든다. 아직도 살아서 아내와 아이들에게 돌아올 것이라고 믿고 쓴 편지는 여전히 살아서 소식을 전하지만 수신자인 남편은 이미 사망한지 오래다. 한 가장의 죽음은 남은 가족들에게 어떤 의미일까. 가느다란 희망의 끈이 사라졌다. 그 자체로 큰 절망과 무거움으로 남겨졌을 것이다.
나는 헤타페의 시체에서 발견한 편지를 주머니에서 꺼냈다. 그것은 어느 아내가 프란시스코 로페스라는 군인 남편에게 쓴 편지였다. (256)
나는 이 오래된 열정을 그토록 격렬하게 결정화시킨 중요한 초인적인 리듬이 무엇인지 발견하려고 애쓰고 있었다. 강렬한 역사적 순간들이 모두 다 그렇듯이, 나는 살육에서 그런 즐거움을 찾는 사람들은 개성을 상실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들의 얼굴은 우리 시대의 사악한 악마를 닮아 가고 있다. 그들은 모두 붉은 가면이나 검은 가면을 쓰고 경기장으로 달려간다. 그들은 가면을 쓰고 술에 취해 자신의 본성을 바꾼다. 야만인이 전쟁의 가면을 쓰면, 그들은 누군가를 죽이고 싶어 한다. (...) 마찬가지로 오늘날도 서로 다른 색깔의 가면들이 전 인류를 격놓도록 선동하고 있다. (259)
가면을 보니 페르소나라는 용어가 떠올랐다. 우리는 처한 역할에 따라 다양한 성격을 가진 페르소나를 보여준다. 어떤 색깔의 가면을 쓰냐에 따라 자신의 이념을 내세우는 전사가 되기도 한다. 원래의 개성을 잃어버리고 죽고 죽이는 역할까지도 즐기게 된다. 스페인 내전기의 상황뿐만 아니라 지금의 우리 현실도 그렇다. 자신과 다른 색깔의 가면을 썼다고 적처럼 대응한다. 서로를 알고 윈윈 하려는 태도를 보여주지 않는다. 사회 시스템을 만들고 운영하는 사람들이 올바른 모습을 자주 보여줘야 국가의 미래가 밝다. 하지만 바른 어른의 모습보다는 가면 색깔을 강조하는 치우친 어른들이 자주 드러나는 것 같아 우려된다.
나는 스페인의 운전사들이 차와 트럭에 새겨 놓은 마스코트들을 바라보았다. 박제된 독수리, 올빼미, 괴물 같은 인형, 빨간색과 노란색으로 칠한 포악한 가면들. 위험한 순간에 인간 기억의 심연에서 끌어 올린 야생 동물들과 늙은 신들의 정글이었다. 불쌍하고 가엾은 사람처럼 인간은 그들을 부활시켜 도움을 호소하고 있었다. 모든 사람은 마음속에 어떤 동물을 지니고 있다. 그것은 그의 세대를 지배하는 고대의 신이다. (285)
그곳에는 젊은 군인들로 가득한 카페가 하나 있었다. 모두 스무 살 정도인 그 청년들은 먹고 마시고 있었다. 그들은 우리에게 셈브레로스에서 만든 훌륭한 포도주를 가져왔고, 우리는 그들과 함께 마셨다. 스무 살, 그러나 그들은 이미 백 살 먹은 노인처럼 살았고 고생했다. 그들은 자기들이 본 모든 것, 즉 살인, 순교, 피바다 등에 대해 이상할 정도로 가학적인 말투로 이야기했다. 그들은 마치 죽음이 스페인 근처의 나라인 것처럼, 차례로 죽음에 관해 이야기했다. 그러나 그것이 다시 돌아올 수 없는 끔찍한 나라라고 지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289)
스무 살 먹은 청년의 모습 속에 백 살 먹은 노인이 보인다는 것은 어떤 모습일까. 평생을 살면서 볼 수 있는 경험을 짧은 기간에 압축해서 알아버렸다. 삶과 죽음에 대해 너무 많이 보았다. 태어나고 죽는 것이 자연과 신의 섭리라고 생각하지만 전장에서 사람이 죽이고 죽임을 당하는 현실을 본 이들에게는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죽음은 언제든지 다가올 수 있는 것이다. 살아남았지만 여전히 죽음의 트라우마는 그들의 남은 삶을 지배한다. 전쟁의 후유증이다.
이건 내 개인적인 의견입니다. 스페인 사람들은 내부에 여러 개의 영혼을 가지고 있어요. 아직도 결정화되지 않고 모순적인 욕망으로 가득 찬 수많은 인종의 혼합체랍니다. 이 모든 욕망이 내부에서 충돌하고 결코 우리를 가만히 놔두지 않습니다. 우리는 인생을 열정적으로 사랑합니다. (...) 일단 원시적인 열정이 분출되면, 그런 투쟁은 더 이상 경제적 원인이나 위대한 이상의 통제를 받지 않아요. 단지 열정에 의해 통제됩니다. 스페인 사람의 열정에는 쓰라린 근원이 자리 잡고 있어요. 그건 바로 절망입니다. (291~292)
물론 알 수 없는 힘도 관여한다. 그중 두 가지가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한다. 바로 굶주림과 부정의 힘이다. 스페인의 사회적 부정은 참을 수 없을 지경이다. 수 세기 동안 소작농들은 영주의 땅을 갈아 왔고, 그들의 땀과 피를 땅에 쏟아 부었다... 그러면서 자신들은 굶주렸다. (293)
그러나 불쌍한 아사냐는 행복한 과거의 민주주의자로 계속 살아가고 있다. 공화국 대통령이라는 비극적 역할을 맡으면서, 그는 선언했다. "나는 극우나 극좌에 의해 매수되지 않는 청렴한 대통령이 될 것이다..." 하지만 그의 판단은 옳지 않았다. 그는 개인적인 역량도 부족했고, 무엇보다도 우리가 오늘날 당면한 역사적 격변을 저지할 힘이 없었으며, 그런 역사적 격변이 우리를 필연적으로 극좌 혹은 극우로 내몰고 있다는 사실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그는 정치가의 진정한 역할이란 역사를 멈추는 것이 아니라 역사와 조화를 이루어 나가는 것이라는 사실을 망각했다. (295)
나라의 방향을 정하고 이끌어가는 지도자가 잘못된 판단을 하면 국가의 발전은 퇴보할 수밖에 없다. 스페인도 아사냐라는 시대와 맞이 않는 인물을 만났다. 우리의 현실을 다시 본다. 국민들의 눈에 보이는 뻔한 노림수를 국민의 삶을 볼모로 펼치고 있다. 국민의 미래 발전과 나라의 지속적인 성장을 위해 온 전력을 기울여야 하는데 그런 모습은 뒷전이고 갈등과 혐오를 부추기고 있어 걱정된다. 국민을 하나로 모으고 청년들이 희망을 가지고 노년층도 사회를 위해 살아온 경험을 활용할 수 있는 사회, 각 계층이 의기투합해서 노력하고 싶은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이 책이 쓰인 것은 1930년대였지만, 아직도 그의 관점은 유효한 듯 보인다. 특히 그가 스페인을 여행하면서 보고 느꼈던 기독교 문화, 유대 문화, 아랍 문화의 혼합은 매우 중요하다. 1492년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하던 해, 스페인에는 또 하나의 중요한 역사적 사건이 일어난다. 그것은 바로 8세기에 걸친 아랍의 지배에서 벗어나 스페인이 온전한 기독교 국가로 다시 태어난 것이다. 그전까지 스페인은 카잔차키스가 보았던 세 가지 문화가 서로 충돌하면서 화합을 이루고 있었다. 하지만 그 후 스페인 왕실이 정통 가톨릭을 고수하면서, 스페인의 문화는 몰락의 길을 걸었고, 그 몰락은 프랑코의 독재에서 절정에 달한다. 이제 스페인은 다시 예전의 영화를 되찾으려 노력하고 있지만, 그 절정이 언제가 될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이런 현상은 우리에게 두 가지 의미를 시사한다. 하나는 '순종'이나 '기원' 혹은 '출신'을 중요시하는 우리의 무의식에 '혼혈'이나 '혼합' 혹은 '변종'이 문화적으로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 준다. 후자는 혼돈의 시대 속에서 다양성으로 표현되며, 현대성의 강력한 문화 조건으로 나타난다. (304~305)
스페인의 몰락이 종교적 획일성을 추구하며 시작되었다고 한다. 우리 사회는 획일성을 자랑했지만 이제는 다양성을 포용해야 한다. 다문화 가정이나 다양한 민족과 이주민들을 수용하고 서로 적응해야 한다. 종교와 문화적 다양성을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서로 간에 다른 것일 뿐이다.
카잔차키스의 <스페인 기행>은 묵직하지만 많은 생각을 자극하고 이해의 폭을 넓여주었다. 그의 다른 기행 관련 책들도 읽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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