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웅현의 <다시 책은 도끼다>에서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를 읽기 전에 밀란 쿤데라의 <커튼>을 입문서처럼 보라고 했다. 그래서 바로 읽게 되었는데 내용이 쉽지 않았다. 먼저 밀란 쿤데라라는 작가에 대해 알아야 했다. 그렇지 않고는 이 책을 끝까지 소화할 수가 없었다. 체코슬로바키아에서 태어나 문학과 미학을 전공하고 강사로 활동한다. 공산당에 가입과 추방을 당하고 1968년 프라하의 봄에도 참석했다. 하지만 소련의 연방으로 체코슬라바키아가 편입되면서 자신의 작품활동이 어려워져 1975년 조국을 떠나 프랑스 시민으로 살고 있다.
부재를 '소설을 둘러싼 일곱 가지 이야기'라고 했다. 7부로 나눠서 이야기를 전개하며 각 장에는 10여 개의 소제목들이 있다. 그리고 문학과 미학에 관련된 다양한 저자의 책들과 익숙하지 않은 용어들이 등장한다. 이 부분이 독자로서 소화하기 힘든 부분이었다.
하지만 독서를 즐기는 독자로서 내가 몰랐던 작가와 그들의 책에 얽힌 이야기, 그리고 책에 대한 소개는 나의 인식의 폭을 넓히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그래서 책에서 남기고 싶은 문장도 많아 크게 세 번에 나눠서 포스팅한다.
1부 연속성의 의식
소설에서 가치를, 즉 특별한 가치, 미적 가치를 인정하기 시작했던 그때부터 비로소 소설들의 연쇄는 하나의 역사로서 나타날 수 있었다. (15)
'인간이라는 이 기이한 피조물'에게 존재하는 '설명할 수 없는 것' 앞에서의 놀라움은 사실 필딩에게 소설을 쓰는 첫 번째 동기, 즉 창작의 이유다. (...) 소설을 창작하면서 소설가는 그때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숨겨져 있던 '인간 본성'의 한 양상을 발견하는 것이다. 소설 창작은 그러므로 인식의 행위다. (17~18)
돈키호테는 산초에게 호메로스와 베르길리우스는 "후대에 모범이 되기 위하여,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 아니라 그렇게 되어야만 하는 모습의 인물들을 묘사"했다고 설명해 준다. 그런데 돈키호테는 자신이 따라야 할 모범에서 제외된다. 소설의 인물들은 그들의 미덕 때문에 찬양받기를 요구하지 않는다. 이 인물들은 이해받기를 원하는데 이는 완전히 다른 점이다. 서사시의 영웅들은 승리한 순간이나, 혹은 패배했다 해도 죽는 마지막 순간까지 그 위대함을 잃지 않는다. 돈키호테는 실패했다. 그리고 그 어떤 위대함도 없었다. 왜냐하면 있는 그대로의 인간의 삶이 패배라는 사실은 너무나 명백하기 때문이다. 삶이라고 부르는 이 피할 수 없는 패배에 직면한 우리에게 남아 있는 유일한 것은 바로 그 패배를 이해하고자 애쓰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 소설 기술의 존재 이유가 있다. (20~21)
돈키호테에 대한 언급이 등장한다. 영웅이 나오고 모범이 되며 교훈적이어야 하는 완벽함이 아니라 인간의 부족한 모습 그대로를 보여준다. 소설을 창작하는 이유가 인간을 미화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본성 자체를 인식하고 이를 바탕으로 창작하는 활동이라고 한다. 소설을 읽는 소비자의 입장에서가 아니라 생산자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과정이다. 어렵지만 어렴풋이 이해된다.
19세기는 전 유럽을 여러 번 그리고 완전히 변화시킨 수십 년간의 분쟁 동안 태어났다. 인간 존재에서 근본적인 어떤 것이 그때 바뀌었으며 그 이후로도 지속되었다. 역사는 누구나의 경험이 되었다. 인간은 그가 태어난 곳과 같은 세계에서 죽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역사의 시계는 어디에서나 큰 소리로 시간을 알리기 시작했다. 심지어 시간이 당장에 헤아려지고 날짜가 매겨지는 소설들 내부에서도 그러했다. (27)
예술의 역사는 가치의 역사이므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 항상 현존하는 것, 항상 우리와 함께 있는 것의 역사다. 말하자면 우리는 몬테베르디와 스트라빈스키를 같은 공연장에서 듣고 있다. (30)
예술의 가치와 과학의 가치의 차이를 분별하게 되었다. 과학은 이전을 디딤돌로 새로운 것을 발견 혹은 발명한다. 그리고 이전의 것은 잊힌다. 낡은 것, 버려야 할 것이다. 하지만 예술은 과거에 없었던 새로운 것을 창조한다. 과거와 현재가 중복되지 않고 그대로의 가치를 지닌다. 그래서 우리는 베르디와 스트라빈스키의 음악을 동시에 가치를 부여하고 듣는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들에서 시계는 계속해서 시간을 알려 준다. <백치>의 첫 문장은 "아침 9시쯤이었다"이며, 바로 그때 아주 우연히(그렇다. 소설은 거대한 우연으로 시작된다) 한 번도 서로 만나본 적 없는 미슈킨, 로고진, 레베데프, 이 세 인물이 한 기차간에서 만난다. 그들이 나누는 대화에서 소설의 여주인공 나스타샤가 필리포브나가 곧바로 등장한다. (...) 250쪽 정도까지 만 하루도 안 되는 열다섯 시간이 지났고, 겨우 네 개의 무대 배경, 즉 기차, 예판친의 자택, 가냐의 집, 나스타샤의 집이 등장할 뿐이다. 그때까지 하나의 시간과 하나의 공간에 그렇게 밀도 있게 사건들이 집중되는 것은 연극에서밖에 볼 수 없는 것이었다. (32~33)
도스토예프스키의 <백치>를 시간의 관점에서 다시 읽어보라고 권하는 문장이다.
문학에서 가장 유명한 에로틱한 장면 중 하나가 전적인 진부함, 즉 위험하지는 않지만 성가신 사람 그리고 그의 계속되는 끈질긴 수다에 의해 시작된 것이다. 연극에서 위대한 행위는 또 다른 위대한 행위에 의해서만 생겨날 수 있다. 오직 소설만이 사소한 것의 거대하고도 신비로운 힘을 발견해 낼 수 있다. (36)
연극은 행위의 연속성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소설은 작가가 인식한 부분에 대해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떠나 작게도 크게도 만들 수 있다. 이것이 신비로운 힘이다.
안나는 자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브론스키와 재회하기 위해 역에 간다. 플랫폼에서 우연히 그녀는 기억에 갑자기 사로잡히고 자신의 사랑 이야기에 아름답고 완전한 형식을 부여할 수 있는 예기치 않은 기회, 다시 말해 역이라는 동일한 무대와 열차 바퀴에 깔려 죽는다는 동일한 모티프에 의해 연애의 시작과 끝이 연결될 수 있는 기호에 매료당한다. 왜냐하면 사람은 의식하지는 않지만 아름다움의 유혹 아래서 살아가며, 안나는 존재의 추함에 숨이 막힐 것만 같기에 더욱더 이러한 유혹에 민감해졌기 때문이다. (42)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를 이런 관점에서 다시 읽어보고 싶다. 연애의 시작과 끝에 대한 유혹에 이끌려서, 그리고 인간의 존재에 대한 환멸에 사로잡혀서 세상과 작별하기로 결심한 안나의 삶을 확인해보고 싶다.
1989년 공산당 체제가 붕괴된 이후 내가 프라하에 체류하던 초기에 거기서 줄곧 살아 왔던 한 친구가 내게 다음과 같은 말을 한 적이 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발자크일지도 몰라, 왜냐하면 네가 여기서 보는 것은 자본주의 사회가 복원되면서 그 사회가 지니게 된 모든 잔인하고 어리석은 것들과 사기꾼과 벼락부자들의 저속함이니까. 상업적인 어리석음이 이데올로기적인 어리석음을 대체했지. (43)
1989년 소련의 붕괴로 체코가 독립되었다. 공산주의 이데올로기가 자본주의의 상업성으로 대체되었다. 더 나은 사회로 발전했느냐는 관점에서 여전히 '어리석음' 속에 있다고 친구는 말한다.
2부 세계 문학
유럽의 모든 국가는 공동 운명을 갖고 있지만 자신만의 독특한 경험에 따라 서로 다른 방식으로 살아 낸다. 그렇기 때문에 유럽 예술의 역사(회화, 소설, 음악 등)는 서로 다른 국가들이 번갈아 가며 증인이 되는 릴레이 경주처럼 나타난다. (49)
폴란드 사람은 스페인 사람만큼 수가 많지만 스페인은 결코 그 존재가 위협당한 적이 없는 오래된 권력이라면, 역사는 폴란드인에게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가르쳐 주었다. 나라를 빼앗긴 그들은 한 세기도 넘게 죽음의 협곡에서 살았다. "폴란드는 아직 망하지 않았네."는 폴란드 국가의 비장한 첫 소절이다. (52)
유럽이 한 대륙이지만 여러 국가와 언어, 민족이 있다. 공동의 운명체로 볼 수도 있지만 개별적으로 역사의 흐름에 따라 예술의 발전은 달랐다. 폴란드와 스페인을 예로 든다. 나라의 주권을 잃었던 경험의 유무는 예술에도 반영된다.
예술 작품의 위치를 정할 수 있는 두 가지 기본적인 콘텍스트가 있다. 그 나라의 역사(이를 작은 콘텍스트라고 부르자)와 그 예술의 초국가적인 역사.(이를 커다란 콘텍스트라고 부르자) 우리는 음악을 아주 자연스럽게 커다란 콘텍스트 속에서 고려하는 데 익숙하다. 오를란도 디 라수스나 바흐의 모국어가 무엇이었는지를 아는 것은 음악학자에게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반대로 소설은 모국어에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전 세계 거의 모든 대학에서 오직 작은 콘텍스트 속에서 연구된다. (54)
음악과 소설을 이해하기 쉽게 설명했다. 음악은 언어가 필요 없기에 초국가적인 예술이다. 하지만 소설은 언어로 기술돼야 하기에 모국어에 연결되어 있다. 그래서 국가에 구속될 수밖에 없다.
지방주의를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 자신의 문화를 커다란 콘텍스트에서 고려하지 못하는 것(또는 고려하기를 거부하는 것)으로 정의해 보자. 두 종류의 지방주의가 있다. 커다란 국가들의 지방주의와 작은 국가들의 지방주의. 커다란 국가들은 자신들의 문학만으로도 충분히 풍부해서 다른 나라에서 쓴 것에 대해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세계 문학이라는 괴테의 생각에 저항한다. (57)
한국의 소설은 작은 국가들의 지방주의에 해당하겠다. 한국어로 기록될 수밖에 없고, 번역되더라도 한국인의 정서와 언어적 민감도를 그대로 전달하기 어려운 한계에 봉착한다. 영어나 독일어, 프랑스어를 사용하는 커다란 국가들의 작가는 자신들의 문학만으로도 충분해서 다른 나라의 문학에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는 말은 약간은 충격으로 다가왔다.
체코슬로바키아에서 문화적 삶의 해방은 1960년대 초에 생겨난 소극장에 연결되어 있었다. 내가 이오네스코의 연극을 처음 본 것도 거기였으며, 상상력의 폭발, 불손한 정신의 분출은 잊히지 않는다. 프라하의 봄은 1968년에 앞서 8년 전, 난간 위에 세워진 소극장에서 연출된 이오네스코의 작품들과 더불어 시작되었다고 나는 말하곤 한다. (63)
외젠 이오네스코(1909~1994)의 책과 연극을 보고 싶다. 처음 듣는 작가다. 구글링하니 루마니아에서 청년기를 보내고 프랑스에서 이후를 보냈다. 이오네스코 외에도 처음 접하는 작가들이 등장한다. 나의 문학의 세계가 얼마나 편협했는지 깨닫는 지점이다.
조금씩 나는 "우리가 잘 알지 못하는 먼 나라" 출신임을 깨닫게 되었다. 내 주위 사람들은 정치에 커다란 중요성을 부여했지만 지리에 관한 지식은 보잘것없었다. 그들은 우리가 '합병'된 것이 아니라 '공산화'된 것으로 보았다. 게다가 체코인은 러시아인과 마찬가지로 오래전부터 '슬라브 세계'에 속해 있지 않았던가? 나는 슬라브 국가의 언어적 통일성은 존재하지만, 그 어떤 슬라브 문화나 슬라브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65~66)
중부 유럽, 그러나 그것은 무엇인가? 러시아와 독일이라는 두 강대국 사이에 위치하는 작은 국가들의 집합. 서구의 동양적 변방. (...) 몇 세기 동안 이들 국가 대부분은 합스부르크 제국이라는 거대한 국가에 속해 있었으며, 그로부터 벗어나기만을 꿈꾸었다. (68~69)
중부 유럽에 대한 서부 유럽 사람들의 지리적 무지함과 무관심을 보여준다. 러시아와 독일에 사이에 있지만 합스부르크 제국 속에서 이후에는 소련 연방하에서 존재했던 나라들은 여전히 서부 유럽에서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하는 현실을 보여준다.
로베르토 무질의 <특성 없는 남자>(1930~1941)에서 클라리스와 발터는 "나란히 돌진하는 두 자동차처럼 날뛰며" 네 손으로 피아노를 연주했다. "조그만 자리에 앉은 그들은 흥분하지도, 사랑에 빠지지도, 그 어떤 것에 슬퍼하지도 않았으며" 오직 "음악의 권위만이 그들을 연결해 주었다. (...)" (73)
로베르토 무질을 처음 만났다. 그의 책 <특성 없는 남자>를 읽어보고 싶다. 무질은 여러 번 이 책에서 등장한다.
'키치'라는 말은 19세기 중반 뮌헨에서 생겨났으며, 위대한 소설의 세기의 저질스러운 실추를 가리킨다. 그러나 낭만주의와 키치의 관계를 양적으로 반비례한다고 보았던 헤르만 브로흐의 견해가 진실에 더 가깝다. 그에 따르면 19세기의 지배적 양식(독일과 중부 유럽에서)이 키치였으며 거기서 예외적인 현상들로서 몇몇 위대한 소설 작품들이 떨어져 나왔다는 것이다. (...) 오래전부터 키치는 중부 유럽에서는 매우 분명한 개념이 되었으며, 최고의 미학적 해악을 나타내고 있다. (75)
곰브로비치는 <페르디두르케>에서 20세기에 일어난 근본적인 전환을 포착했다. 그때까지 인류는 두 가지 부류, 즉 현상을 유지하려는 자와 그것을 바꾸려는 자로 양분되었다. 그런데 역사의 가속화는 그 중대한 결과들을 가져다주었다. 예전에는 매우 천천히 바뀌는 사회의 동일한 환경 속에서 살았지만, 갑자기 굴러가는 양탄자처럼 역사가 발밑에서 움직이는 것을 느끼는 순간이 온 것이다. 현상이 움직이게 된 것이다! 갑자기 현상과 일치함은 움직이는 역사와 일치함과 같은 것이 되었다. 결국 사람들은 진보적이면서도 순응적이며, 보수적이면서도 반항적일 수 있게 되었다! (80~81)
곰브로비치도 자주 등장한다. 그가 <페르디두르케>를 통해 보여주는 근본적인 전환이란 것이 무엇일까 궁금하다. 갑자기 움직이기 시작하는 현상과 일치함이란 무엇일까 와닿지 않는다. 이 책을 통해 이해할 수 있으려나.
독서습관686_커튼_밀란 쿤데라_2012_민음사(230127)
https://bandiburi-life.tistory.com/17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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