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과 독서가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만든다.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책 <스페인 기행>은 깊이 있는 여행을 보여준다. 2016년에 스페인으로 가족여행을 갔다. 차를 렌트해서 바르셀로나에서 마드리드 그라나다 지브롤터를 지나 세비야까지 방문했다. 처음으로 방문한 곳의 풍경과 도시, 사람 자체가 우리에겐 신선했다. 그 자체로 만족하며 곳곳을 시간에 맞춰 여행했다. 만족스러웠다.
하지만 이 책을 보며 깊이 있는 스페인 여행을 다시 했다. 저자가 방문한 곳에 대한 단순한 시계열식 나열이 아니다. 지명에 대한 역사와 인물을 알고 저자의 생각을 접목해서 글로 풀어냈다. 그래서 좀처럼 읽히지 않았다. 잠시 쉬어 생각해야 하는 지점이 많다. 서부 유럽의 역사에 비해 스페인 역사는 무지의 영역에 놓여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그 자체로 소득이다.
책은 크게 2부로 나뉘었다. 전반부는 주요 도시에 대한 소개다. 후반부는 1936년 스페인 내전으로 시작한다. 1936년 저자 카잔차키스가 직접 스페인을 방문해 프랑코를 만난 적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러면서 이 책이 스페인 내전이 멀지 않은 곳에 있는 것처럼 느끼게 만들었다.
여러 사람에게 강력히 추천하고 싶은 책이다. 특히 스페인 여행을 준비하는 분들이라면 꼭 읽어보고 가시면 보이는 것이 더욱 많아질 것이다. 책에서 몰랐던 부분, 남기고 싶은 부분이 많아 세 번에 걸쳐 나눠서 포스팅한다.
여행을 기록한다는 것은 오만한 자아를 인간이라는 고통받는 편력 군대 속으로 던져 담금질하여 부드럽게 만드는 것이다. (7)
그리스의 도시 미솔롱기온의 주민들은 1822~1823년 오토만 제국에서 포위되자 저항했고, 결국 그 포위를 이겨 냈다. 그리고 1825~1826년의 두 번째 포위 공격에서는 영웅적으로 최후까지 저항했다. 영국의 시인 바이런은 그리스 저항자들을 지원하면서 1824년에 이곳에서 숨을 거두었다. (8)
스페인의 현재를 가장 완벽하게 대표하는 미겔 데 우나무노는 <나! 나!>라고 외치면서 이렇게 말한다. "나는 나 이외의 그 어느 것도 아니다! 그리고 이 삶에서뿐만 아니라 죽은 다음의 세상에서도 마찬가지다. 나는 추상적이고 개성 없는, 아니 개성을 넘어선 유럽 사람들의 불멸을 원치 않는다. 나는 진정한 것, 즉 오직 나의 스페인 정신에 걸맞은 유일한 불멸만을 원한다. 나는 살아남아야 한다. 나, 나 자신, 우나무노, 미겔 데 우나무노는 나의 이 몸뚱이와 이 손톱 열 개와 발톱 열 개, 그리고 나의 뾰족한 염소수염과 함께 살아남아야 하는 것이다!" (31)
위대한 공고라가 그것을 두고 <투명한 공기의 역사>라고 표현했던 것처럼, 지금은 사라지고 없다. 단지 살아 있는 아이들의 불장난과 편지를 만드는 이가 쿵 하고 내리치는 망치 소리와 말똥 냄새만 남아 있을 뿐이다. (41)
이상과 돌시네아를 사랑하는 대담하고 단순한 이 연인은 이미 그의 창을 높이 든 상태였다. 그는 사랑과 분노로 가득 차 있었다. 세상은 하느님의 손에서 나타났고, 많은 부정과 결점도 그 손에서 함께 나타났다. 그리고 그 이상의 기사는 그런 것들을 바로잡아야만 했다. 그렇기 때문에 돈키호테의 작업은 하느님이 떠난 곳에서 시작된다. (43)
라만차 지역의 미친 영웅처럼 스페인은 너무나 지치고 가난해졌으며, 결국 완전히 힘을 잃고 말았다. 또한 위대한 사상 대신 상상으로 가득 차 있었다. 바로 기독교를 전파시킴으로써 세상을 구하려는 상상이었다. 스페인 역시 돈키호테의 거룩한 광기에 의해 통치되었다. 스페인은 또한 현실과 이상을 구별할 수 없었다. 그러던 1588년 8월 어느 저녁에 끔찍한 소식을 전해 듣게 되었다. 무적함대가 암초가 많은 영국 해안에서 패배했다는 소식이었다. 그러자 스페인 전체가 쓰러졌고 결코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왜냐하면 무적함대와 더불어 스페인의 돈키호테적 꿈이 모두 침몰하고 말았기 때문이다. (44)
신대륙 발견으로 자신의 영역을 넓혀가며 자신감에 넘쳐 있던 스페인이 1588년 무적함대가 영국에 패배하면서 무너지는 과정을 잘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이 패배가 어떻게 돈키호테와 연결되는지도 설명한다. 자신감이 사라질 때 국가의 상실감과 무기력이 얼마나 끔찍한 것인가. 스페인은 점진적으로 침몰했다. 결국 1898년 미국에게 멕시코에서 패배하며 이베리아 반도로 회귀할 수밖에 없었다. 현재의 스페인이다.
거센 외침이나 세속적인 선언도 하지 않은 채, 프란시스코는 조용하게 자신의 가르침과 삶으로 투쟁을 시작했다. 그는 1876년에 현대 스페인의 모교라고 일컬어지는 <자유 교육 학교>를 설립했다. 그의 목적은 남녀를 가리지 않고 새로운 인간을 만들어 내는 것이었다. 그들의 정신뿐만 아니라 그들의 마음과 영혼도 수양시키는 것이었다. 모든 참된 스페인 사람들처럼, 프란시스코는 마음을 한쪽으로 편향되게 배양하려는 생각은 없었다. 그는 이것을 인격을 떨어뜨리는 위험한 것으로 간주했다. 그의 목적은 생각과 감정과 행동이 완전히 일치되는 완벽한 인간을 만드는 것이었다. (59~60)
사람들이 지나치게 성급하고 피상적으로 <시대정신>이라고 부르는 것은 실제로 인간보다 더 높은 차원의 무엇, 즉 악마다. 그것은 짐 나르는 짐승이 그 어떤 합리적 예상이나 즉각적인 필요성을 넘어, 즉 자기 능력 이상의 행동을 하기 위해 질주하듯이, 시대와 종족을 지배한다. 이 위대한 순간에 모든 사람들은 선하든 악하든, 적이든 친구든, 싫든 좋든 이 악마와 협력한다. 그들이 이 리듬을 이해하고 부추기든, 그것에 반항하면서 그에 해당하는 패거리를 조직하고 증가시키든, 모두 이 리듬을 실어 나르는 것이다. (...) 동일한 정신과 동일한 불꽃이지만, 그것들은 각 시대이 필요와 각 인종의 구성 요소에 따라 서로 다른 이름으로 가고 있다. 그러나 그 경험의 눈은 속지 않는 법이다. (72~73)
마드리드로부터 북서쪽으로 60킬로미터 떨어진 에스코리알의 험준한 바위 사이에 이 성자를 기리는 교회가 있다. 펠리페 2세는 만약 전쟁에서 이기면, 성 라우렌티우스를 기리는 거대한 수도원을 짓겠다고 맹세했다. 그는 승리했고, 그래서 1563년 자신의 맹세를 실천에 옮기기 시작했다. 그 창백한 광신자 왕은 자기의 영혼을 안치할 집, 즉 그의 냉담하고 별난 뇌를 보관할 집을 짓고 싶었던 것이다. 그는 이 세상의 미와 기쁨은 전혀 안중에 없었다. (...) 그는 자기 영혼이 편히 쉴 수 있도록 아주 깜깜한 화강암 굴을 만들고 싶어 했다. (74)
대한민국에 살면서 여러 유적지를 모두 가보지 못한다. 스페인 내에도 수많은 역사적 의미를 주는 장소가 많다. 대부분의 장소가 그럴지도 모른다. 에스코리알에 위치한 교회와 펠리페 2세와의 관계에 대해 설명한다. 지식을 쌓기 위해서가 아니라 과거에 존재했던 한 인물의 삶을 바라보는 기회다. 책이 없다면 그의 존재도 나에게는 없었다.
창작하는 사람이 자기 주변의 일상을 어떻게 이용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은밀하고 곤혹스럽기 짝이 없다. 나는 고야의 충실한 협력자이자 가장 힘들었던 말년의 마지막 친구이며 교묘한 재치로 가득한 익살스러운 만사나레스 강을 상상하고 싶다. (87)
스페인은 무질서와 실험주의와 고통으로 가득한, 역사적으로 아주 힘든 순간을 맞고 있다. 스페인 함대가 쿠바에서 패배한 금찍한 1898년 이후, 스페인은 모든 힘을 잃고 식민지를 빼앗긴 채 침묵을 지켜야만 했다. 명예 이외의 모든 것을 잃어버린 스페인은 이베리아 반도로 되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우리가 기억하는 돈키호테가 뼈가 부러진 채 죽음을 맞기 위해 자신의 요새로 돌아온 것과 같았다. (91)
스페인 기행②_톨레도 코르도바 세비야 그라나다 투우 (tistory.com)
독서습관687_스페인 기행_니코스 카잔차키스_2008_열린책들(230129)
■ 저자: 니코스 카잔차키스
현대 그리스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이자 <20세기 문학의 구도자>로 불리는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1883년 크레타 이라클리온에서 태어났다. 터키의 지배하에서 기독교인 박해 사건과 독립 전쟁을 겪으며 어린 시절을 보낸 그는 이런 경험으로부터 동서양 사이에 위치한 그리스의 역사적 사상적 특이성을 체감하고 이를 자유를 찾으려는 투쟁과 연결시킨다. 1908년 파리로 건너간 그는 베르그송과 니체를 접하면서 인간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투쟁적 인간상>을 부르짖게 된다.
자유에 대한 갈망 외에도 카잔차키스의 삶과 작품에 큰 영향을 준 것은 여행이었는데, 1907년부터 유럽과 아시아 지역을 두루 다녔고, 이때 쓴 글을 신문과 잡지에 연재했다가 후에 여행기로 출간했다. 1917년 펠로폰네소스에서 <그리스인 조르바>의 주인공이자 실존 인물인 기오르고스 조르바와 함께 탄광 사업을 했고, 1919년 베니젤로스 총리를 도와 공공복지부 장관으로 일하기도 했다.
1922년 베를린에서 조국 그리스가 터키와의 전쟁에서 참패했다는 소식을 듣게 된 카잔차키스는 민족주의를 버리고 공산주의적인 행동주의와 불교적인 체념을 조화시키려 시도한다. 이는 이듬해부터 집필을 시작한 <붓다>와 대서사시 <오디세이아>로 구체화된다.
이후에도 특파원 자격으로 이탈리아, 이집트, 시나이, 카프카스 등지를 여행하며 다수의 소설과 희곡, 여행기, 논문, 번역 작품들을 남겼다. 대표작의 하나인 <미할리스 대장>과 <최후의 유혹>은 신성을 모독했다는 이유로 교회로부터 맹렬히 비난받고 1954년 금서가 되기도 했다.
카잔차키스는 1955년 앙티브에 정착했다가 중국 정부의 초청으로 중국을 다녀온 뒤 얼마 안 되어 백혈병으로 사망했다. 두 차례 노벨 문학상 후보로 지명되었고, 톨스토이, 도스토예프스키에 비견될 만큼 위대한 작가로 추앙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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