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좋은 책이란 익숙함과 멀어지도록 도와주는 책이다. 이길보라의 <당신을 이어 말한다>는 성, 장애, 배움, 나이, 예술 등 여러 분야에서 새로운 세계를 보게 해 줬다.
대한민국을 벗어나 글로벌하게 어려움에도 굴하지 않고 당당하게 자신의 삶을 개척해 가는 모습이 이 시대의 젊은이들에게 큰 도전을 주고 있다. 자기 자신의 생각보다는 주변의 요구에 맞춰서 살고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도 자신을 돌아보게 한다.
농인 부모님을 가진 코다이지만 자신의 꿈을 찾아 길 위에서 배우고, 고등학교라는 정규 과정도 과감하게 포기하고 바로 꿈을 실현하기 위한 대학교에 진학한다. 그리고 네덜란드에서 석사과정을 위한 자금을 크라우드펀딩으로 확보하고 자신의 삶이 녹아 있는 영화를 만들어 사회에 자신의 생각을 드러내고 변화를 촉구한다.
영화와 글을 통해 세상에 변화를 지향하는 젊은 아티비스트의 삶을 배우고 응원한다.
자녀가 성인으로서 주도적으로 스스로의 삶을 개척하기를 바라는 게 모든 부모들의 마음이다. 좋은 성적을 얻고 SKY 대학을 가고 대기업이나 공무원이 되는 것이 삶의 목표가 된 세상이다. 소수의 인원만이 그곳에 필요하다.
모든 사람의 각자의 개성이 있다. 개별 경험과 환경에 따라 하고 싶은 일을 찾아 도전하는 가운데 우리의 삶은 행복하고 풍성해질 것이다.
아래는 책을 통해 배우거나 남기고 싶은 문장을 발췌했다.
농인 부모에게서 태어난 자녀를 일컫는 코다(CODA, Children of Deaf Adults의 약자)라는 단어를 알게 되자, 농인 부모와 살아왔던 일련의 경험이 언어를 얻었다. 장애학과 장애해방 서사를 접하며 "부모님이 청각장애인인데요" 하고 창피해했던 경험에 종지부를 찍고 자긍심을 갖게 되었다. '장애'를 만드는 건 장애인이 아니라 비장애인 중심 사회라는 걸 깨달았다. (8)
나와 너에게 베트남 전쟁은 무엇이었는지, 무엇이어야 하는지 물어야 한다. 그것은 '나'와 '너'를 연결하고 주체와 타자의 도식을 깨는 일이 될 거이다. 여성주의 연구활동가 권김현영은 이렇게 말한다. '전쟁은 구체적인 개인을 적 또는 아군이라는 형태로 추상화한다. 전쟁의 정당성을 확보하는 과정은 보편적 정의에 호소하고 개인의 욕망을 모두 특수한 것으로 만들어내면서 가능해진다. 전쟁이 동일성에 기반해 있다면, 평화는 차이를 견디는 과정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 권김현영, <늘 그랬듯이 길을 찾아낼 것이다>, 292쪽 (50)
청인들은 미소를 띠고 묻는다. 농인을 만나면 어떻게 해야 하냐고. 질문의 의도는 선량하다. 그러나 듣는 이의 입장에서는 이상하고 지겹다. (...) 답은 간단하다. 그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해볼 것, '나'가 '너'가 되어볼 것, 그래 보려고 노력해 볼 것. 타인을 상상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53)
일회용 생리대를 사고 쓰고 몇 시간 후에 버리며 자책감을 느꼈다. 그런데 여행을 좋아하는 지인이 생리대 대신 써보라며 보여준 그것은 가히 '혁명'이었다. 생리컵은 그간의 고민을 모두 날려버리는 '인류 최고의 발명품'이었다. 단돈 4만 원에 생리대를 더 이상 사지 않아도 되었으며 나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피를 마주할 수 있었다. (...) 무엇보다 굉장히 편리했다. 세탁기의 발명이 여성 가사노동의 해방을 가져왔다면 생리컵은 생리대로부터 해방되는 첫 출발점이었다. 그날 이후로 만나는 사람마다 생리컵을 전도했다. (82)
우리는 아직도 옆 사람과 비교하고 경쟁하며 살아간다. 문제는 옆 사람이 아니라 시스템 자체다. 나는 나 대신 다른 이를 탈락시키며 아득바득 살아내고 싶지 않다. 더 이상 친구들에게 미안해하고 싶지도 않다. 그건 당신과 나의 몫이 아니다. (108)
어느 보험이 좋은지 어떤 것을 보장 내용으로 해야 할지 인터넷 세계를 떠돌며 골머리를 앓을 때 네덜란드에서 의사로 일하는 친구 H가 말했다. "왜 개인이 보험을 들어야해요? 보험의 세부 내용도 선택해야 한다고요? 누가 어떤 병에 걸릴 줄 알고요? 가족 이력이요? 보라 씨가 그 병에 걸릴지 아닐지 어떻게 알아요. 그건 국가와 사회가 보장해줘야 하는 거예요. 그게 왜 개인의 몫이어야 하죠?" (112)
만약 국민 모두에게 1인 1 주택이 주어지고 부의 재분배가 이루어진다면 어떨까? 그럼 모두가 부동산과 주식 투자 등의 재테크를 통한 자산 증식을 고민할까? 누군가는 아파트를 사서 몇 억을 벌었는데 누군가는 하루 종일 일해 10만 원을 겨우 버는 사회, 그런 사회에서 노동의 가치는 제대로 평가받을 수 있을까? 이런 사회에서 '세대주'가 되는 것이 꿈이라고 말하는 아이들이 생겨나는 건 너무나도 당연한 일 아닐까? (124~125)
청년세대의 부동산과 주식투자 열풍은 개인의 현실적인 판단이며 행동이지만 건강하지 않은 각자도생과 개인주의의 단면은 아닐까? 누군가는 묻는다. 시스템을 바꾸자는 건 혁명을 하자는 말처럼 들리는데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가는 개인으로서 무엇을 할 수 있느냐고, 개인으로서 시스템에 저항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질문을 던지지 않는 것보다 질문을 던지는 일, 보다 나은 질문을 고민하고 정확한 질문이 필요하다. 어떤 것이 더 나은 삶의 가치인지, 우위에 서는 어떤 절대적 가치라는 것이 존재할 수 있는지 물어야 한다. 누군가는 돈이 인생의 최고 가치라고 하지만 어떤 이는 경험 혹은 사람, 가족이라고 말한다. (126~127)
그런데 H는 타국, 그것도 네덜란드어를 쓰는 네덜란드 의대에 진학해 석박사를 졸업하고 현장에서 의사로 일한다. 대단하다고 추켜세우면 H는 이렇게 말했다. "여기서 조금만 공부하면 의대 갈 수 있어요. 다들 제가 의대 갔다고 대단하다고 공부 정말 잘했을 거라고 하는데 그렇지 않아요. 만약 한국에서 자랐으면 의대 못 갔을걸요? 저는 똑똑하고 전교 1등 하고 그래야 의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의사에게 제일 중요한 건 성적도, 전교 1등도 아닌, 의사소통 능력이에요. 환자가 어디가 아픈지, 왜 아픈지를 대화를 통해, 환자의 행동을 통해, 몸의 증상을 기반으로 찾아내는 거죠. 저는 보라 씨가 좋은 의사가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해요. 의사소통에 능한 사람이잖아요."(134)
기자는 수어를 배우며 농인과 농인의 삶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고, 자연스럽게 농인에 대한 기사도 쓰게 되었다고 했다. 그는 남성이었다. 한국 사회를 비롯해 대다수의 사회에서 수어를 배우는 이들은 대개 여성이다. 주요 일간지에서 취재를 하러 나온 남성이자 비장애인인 그에게서 수어를 보게 될 줄이야. 일반화를 할 수는 없지만 부러웠다. "수어를 배우기 시작하자 농인의 세상이 펼쳐졌어요. 농인을 여럿 만나게 되었는데 정말 유쾌하고 긍정적인 사람들이라 놀랐죠." (148)
수어통역사 자격시험은 1997년 민간자격 국가공인제도로서 시행되었고, 2006년부터 국가공인자격제로 전환되었다. 한국수화언어법이 제정됨에 따라 한국수어를 가르칠 교원을 양성하기 위해 한국생산성본부가 시행하는 '한국수어교육능력 검정시험'은 2020년 8월에 치러졌다. 현재 한국에 등록된 청각장애인은 37만 7,094명이며, 국가공인수화통역사 자격증을 취득하고 있는 수어통역사는 1,822명이다. (190)
한국과 일본의 장애인은 같은 장애를 가졌지만 다르게 살아간다. 한국에서 장애인을 비롯한 하위 계층을 대상으로 한 복지는, 장애인증과 같은 복지카드를 제시하면 등급에 따라 비용 감면이나 할인을 해주는 방식이다. 일본은 장애 수당을 지급한다. 자신을 증명하지 않고도 개인이 어떤 것을 구매할지 선택할 수 있다. 이는 당사자의 위치와 자리를 결정한다. (192)
유튜브 시대가 도래하며 나의 영화를 줄거리 형태로 요약해놓은 코멘터리 비디오 Commentary Video로 봤다는 이들을 종종 만난다. 할 말이 없다. 그건 영화를 본 것이 아니다. 누군가가 편집한 원작과 다른 줄거리를 본 것이다. (229)
나의 정체성을 명명할 수 있은 적합한 단어였다.(아티비스트) 언젠가 함께 영화 작업을 했던 프로듀서는 내가 51퍼센트의 활동가 정체성과 49퍼센트의 예술가 정체성을 갖고 작업에 임하는 것 같다고 했다. 나 역시 스스로를 그렇게 인지하고 호명했다. 영화감독, 작가라는 타이틀을 쓰긴 하지만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아 '예술가'라고 적거나 '글과 영화라는 매체를 통해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라고 말하곤 했다. (240)
2년간의 코스를 밟으며 결과보다 과정이 더 중요함을, 시도와 도전이 더 값진 것임을 깨달았다. 각자가 가진 다양성과 주관성이 예술작업의 가장 기본 토양임을 말이다. (245)
나의 작업이 누적관객 몇 명, 판매부수 몇 권이라는 숫자로 수식되어 성공작 혹은 실패작으로 명명되는 것이 아닌, 예술가로서의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과정임을 인식했다. (248)
우리 모두는 각자의 질문과 그에 따른 답을 찾기 위해 다양한 방식으로 시도하고 경험하고 도전하고 모험하는 중이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여러 차례의 시도를 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응원해주는 사회가 아닐까? 한국 사회는 사회 구성원이 생애주기에 따라 시도와 도전을 할 수 있도록 지지하고 있을까? 결과만을 강조하는 시장 경쟁의 가치에 입각해 '성공'만을 강요하고 있는 건 아닐까? 특정한 가치만이 중요하다고 말하고 요구하고 있는 건 아닐까? (250)
중심을 어디에 둘 것인가에 대한 이야기다. 숫자로 환산되고 환원되는 가치가 아닌, 개인의 순간을 구원하고 사회에 질문을 던지는 예술. 생과 삶을 조금 다르게 바라보게 하는 일. 그로 인한 사회적 움직임과 변화. 그것이 아티비스트의 일이자 운동이자 예술이다. (252)
슬아는 2018년 <일간 이슬아>로 '아무도 안 청탁했지만 쓴다 날마다 뭐라도 써서 보낸다'라는 슬로건으로 스스로에게 연재를 청탁했다. 등단해야만 작가가 되는 시스템에 균열을 냈다. 국내 최초로 작가가 독자에게 이메일로 직접 글을 보내주고 구독료를 받는 메일링 시스템을 도입했다. 구독료 1만 원을 내면 한 달에 20편의 글을 받아보는 식이다. 시도는 대성공이었고 이후 많은 작가들이 메일링을 통한 연재 서비스를 시작했다. (254~255)
독서습관585_당신을 이어 말한다_이길보라_2021_동아시아(220623)
■ 저자: 이길보라
글을 쓰고 영화를 찍는 사람. 농인 부모 이상국과 길경희 사이에서 태어났다. 고등학교 1학년 재학 중 아시아 8개국으로 배낭여행을 떠났고, 여행에서 돌아온 후 학교로 돌아가지 않고 학교 밖 공동체에서 글쓰기, 여행, 영상 제작 등을 통해 자기만의 학습을 이어나갔다.
'홈스쿨러', '탈학교 청소년' 같은 말이 거리에서 삶을 배우는 자신과 같은 청소년에게 맞지 않다고 판단해 '로드스쿨러'라는 말을 제안했고, 그 과정을 2008년 자신이 제작하고 연출한 첫 영화 <로드스쿨러>에 담았다. 2014년에는 농인 부모의 시선으로 본 세상을 담은 장편 영화 <반짝이는 박수 소리>를 , 2018년에는 베트남 전쟁 시기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 사건을 둘러싼 서로 다른 기억을 담은 영화 <기억의 전쟁>을 만들었다.
지은 책으로 <해보지 않으면 알 수 없어서>, <반짝이는 박수 소리>, <길은 학교다>, <기억의 전쟁>(공저), <우리는 코다입니다>(공저) 등이 있다.
2021년 네덜란드 정부가 전 세계 여성 리더에게 수여하는 젠더 챔피언 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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