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준식의 옥중서한> 후반부를 읽었다. 전반부의 편지는 부모님과 사촌 여동생들에게 보내는 내용이 주를 이뤘으나 옥중생활이 10년이 넘어서면서 조카들로 바뀐다. 세월이 흘러 부모님은 돌아가시고, 이종사촌이나 고종사촌 여동생들은 시집을 갔고, 조카들은 어느새 청소년이 된 것이다.
검열로 인해 자신의 생각을 있는 대로 표현할 수 없고, 수인 생활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도 기록할 수 없기에 저자의 편지는 자신의 건강과 주변에 보이는 자연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내면의 성찰로 한정될 수밖에 없었다. 대부분이 연하의 인물들에 대한 내용이어서 상대방에 대한 조언이 많다. 학업에 대한 조언, 건강에 대한 조언, 결혼에 대한 조언 등이다. 서로 왕래할 수도 없고, 표현의 자유도 제한된 상태에서 이따금씩 면회를 통해 보는 얼굴로 서로의 늙어감을 안다.
외부와는 단절된 세계에서 오로지 편지와 면회로 세상을 파악하는 저자는 나이가 35세가 되고 40세가 되며 삶에 대해 생각한다. 정체되어 있는 듯한 삶에 대한 우려, 전향에 대한 주변의 설득에 대한 자신의 입장 유지, 책 이외에 음악과 악기에 대한 관심, 오랜 기간 자신을 찾아왔던 L양에 대한 연정 그리고 보호감호처분의 부당함에 대한 지속적인 이의제기와 기각이 이어진다.
저자의 편지 속에서 음악, 미술, 지리, 역사, 언어 등에 대한 통찰을 본다. 억울하게 7년의 징역살이를 마치고 다시 보호감호라는 인권을 무시하는 법으로 기한 없는 시간을 좁은 감방에서 보내야 했던 저자의 입장에서 생각해본다. 초기에는 울분이었고 시간이 흐르며 얼마나 많은 사색과 성찰을 반복했을까. 책은 1988년 5월 2일 순전에게 보내는 편지로 끝을 맺는다. 한국 현대사의 희생자의 입장에서 한 가족의 고통을 간접 경험할 수 있었고, 이런 역사가 반복되지 않도록 모든 국민에 잘 알고 깨어있어야겠다.
아래는 책에서 남기고 싶은 부분을 인용했다.
‘누군가 붙잡고 이야기 안 하면 못 견디겠다!’는 그런 절실한 이야깃거리가 없는 사람을, 그러니까 인간답게 살려고 안간힘으로 발버둥쳐 보는 일도 없는 사람들이 제 아무리 손끝 재주가 좋아서 멋들어지게 문장을 다듬어 봤자 그런 글을 우리가 ‘착한 마음을 가지고’ 잘 읽어 나가면 온갖 더러운 거짓말과 불성실로 꽉 채워져 있음을 눈치채기 마련이다. (373)
그러니까 사람은 값진 경험을 많이 하면서 그 경험을 잡고 늘어져 많은 것을 느끼고 생각해야 한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한 인간이 평생을 두고 직접 겪을 수 있는 일들은 지극히 제한되어 있다. (…) 그러나 그 경험의 폭을 무한히 넓혀 줄 뿐 아니라 많은 생각까지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있다. 그것이 바로 좋은 책을 열심히 읽는 일이다. 몸으로 하는 직접적인 경험은 수동적이지만 책을 읽음으로써 하는 경험은 능동적, 즉 자기가 해보고 싶은 경험을 마음대로 골라가며 해 볼 수 있다는 것이 특징이다. (374)
눈앞에 환자를 보고도 돈이 없다는 이유로 치료를 거부하는 철저히 반예수적인 이 놀라운 잔인 행위를 지금 우리는 아무렇지도 않게 보아 넘기곤 합니다. (390)
TV를 너무 많이 보고 있지 않을까 좀 걱정이다. 혜숙이가 생활하는 방에는 TV가 없어야 한다. TV에 나오는 이야기나 언어는 제아무리 멋있고 세련되게 꾸며놓아도 명작이나 고전 등을 책으로 읽는 것처럼 우리 영혼의 밑바닥에까지 와 닿고 우리 영혼을 살찌워 주지는 않는 법이다. (416~417)
석가모니불은 ‘모든’ 중생을 구제해 주지는 않고 그 과제를 미륵에게 넘긴다. 그래서 미륵은 석가가 못다 구제한 나머지 ‘모든’ 중생을 구제할 방도를 지금 도솔천에서 ‘사유’하고 있는 것이라고 한다. (432)
나는 이곳 생활에서 나의 정신활동의 (많지는 않지만) 결코 무시해 버릴 수 없는 몫을 예수와 기독교의 문제에 빼앗기고 있다. 일본과는 달라서 여기는 온통 기독교 투성이다. 하나님, 예수님 하는 것이 마치 하나의 ‘유행’이 되어 있는 느낌이다. 너도나도 예수쟁이 행세를 해야만 제대로 ‘점잖은 사람’으로 대우를 받게 되어 있는 면도 없지 않다. (488)
후회 없는 인생이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후회하고 뉘우치기 때문에 다시 발전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되도록 젊은 나이에 자신의 어리석음을 크게 후회하고 뉘우치고 분발하는 사람들은 인생의 가장 알찬 시기에 크게 발전할 것이다. (494)
테레사 수녀에 대해서 알기 훨씬 이전부터 많이 생각해 왔던 일이다. 이 ‘꼭두각시놀음’이 끝나면, 나는 세상의 고통받고 고달프며 배고프게 살아가는 사람들과 동고동락하면서 그들을 위하여 뭔가 구체적으로 착한 일을 하며 살고 싶은 간절한 소망을 가지고 있다. “동고동락하는 생활에서만 그들에게 구원의 길을 제시할 수 있습니다.” (테레사 수녀) 그리고 동시에 나도 구원의 길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505)
방금 나는 ‘그녀들’이라고 했다. P여사와 늘 함께 나를 찾아 주는 L양까지 포함해서 ‘그녀들’이다. P여사 못지않게 열심히 나를 위해 주는 L양은 그 생김새나 풍기는 분위기가 죠르주 루오의 그림 <베로니카>를 닮았다. 4년간 신학 공부를 한 28세 아가씨다. (541)
구체적으로 이야기해서,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보아 너희 어머니는 ‘옳게’ 하나님을 못 믿고 계신다는 것이 나의 느낌이다. 한국의 개신교에 대해서는 유물론자는 말할 것도 없고 교회 내부에서도 많은 비판이 있고, 내가 볼 때 제대로 된 목사가 20%도 안 되리라 여겨질 만큼 ‘질보다 양’, 심하게 말해서 예수를 장사 수단으로 삼는 기업이란 것이 지금의 상당한 한국 개신교회의 현실이다. 나는 가끔, 한국 개신교에 ‘쪽수’ 만을 보태어 주고 계시는 너희 어머니의 ‘신앙’에 몹시 마음이 아플 때가 있다. (544)
강원용 목사는 자신의 신도들에게 교회에서 목사가 하는 설교를 의심도 안 해 보고 덮어놓고 고개를 끄덕이며 받아들임은 가짜 신앙이라고 가르쳤다. 목사에게는 첫째로 특정 교단에서 운영하는 학교에서 특정 신학을 공부한 데서 오는 이론적으로 특정한 입장이 있다. 둘째로 목사라는 사회계층에 고유한 에토스를 공유하고 있고, 셋째로 어느 개인이나 다 가지고 있는 자기 나름의 ‘편견’이 있게 마련이다. (551)
장구는 드문 경우를 제외하고 우리 전통 음악의 모든 반주에 쓰여지는, 없어서는 안 되는 가장 기본적인 악기이다. 왼쪽 손바닥(혹은 손가락)으로 치는 저음면(‘북편’이라고 한다.)은 약간 두꺼운 백마 가죽, 오른쪽 손에 잡은 대나무 채로 치는 고음면 (‘채편’이라고 한다.)은 보통 말가죽을 사용한다. 좌우의 가죽면을 연결하는 WW모양의 끈 장력을 조절하여 ‘북편’은 대체로 Ab 정도로, ‘채편’은 한 옥타브 높은 ab 정도로 조율한다. (565)
여름에 L양이 보내준 N. 베르자예프 Nikolai Berdyaev의 <노예와 자유>를 정독했다. 반짝이는 통찰들로 가득 채워진 그 책에 시종일관 흐르는 테마가 이런 구절들이라 해도 크게 틀리지 않을 것이다. 인간의 실존적 자유에 대한 철저하고도 강직한 믿음에 나는 책장을 넘길 때마다 감격했다. (567)
“인생의 싸움터에서 말없이 묵묵히 몰려다니는 가축이기를 거부해라!” 이런 롱펠로의 가르침을 마음에 새길 때 우리는 숙명에 질질 끌려 다니는 일이 없는 강한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이다. (610)
조르다노 부르노나 프랑스 계몽주의의 철학자들, 젊은 헤겔 (…) 등등의 철학에는 언제나 세계를 보다 낫게 개조하려는 강렬한 소망과 정열이 깃들어 있었다. 그들에게 있어서 철학은 단지 철’ 학’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그들의 삶이요 현실이요 그리고 인류의 행복을 위한 피투성이의 투쟁 바로 그 자체였다. (667)
그래 태백산맥, 소백산맥 하는 식으로 산맥 이름과 위치도 외워 보았는데, 그런데 말이다. 요즘 어느 한국 지도 연구가가 쓴 글을 읽어 보니 그 같은 산맥 이름과 위치 설정은 일제가 우리나라를 침략하면서 제멋대로 이름을 짓고 긋고 한 것이라는구나. 그들은 과학적 지도라는 명분 하에 우리 고유의 자연환경을 무시해 버리고 지도를 만들었는데, 그 밑바닥에는 주로 지하자원 수탈 등 통치자의 입장에서의 효과적 식민지 지배라는 근본적 의도가 깔려 있었음은 뻔한 노릇이다.
우리 나라 최초의 완벽하고 근대적인 지도는 오랜 세월에 걸쳐 각고의 실증적 답사 끝에 1861년에 김정호 선생이 간행한 ‘대동여지도’라는 방대한 지도인데, 여기에 산맥 이름은 가장 중추를 이루는 ‘백두대간’(태백산맥의 부분과 소백산맥을 합친 것)을 중심으로 ‘무슨무슨 정맥’ 등으로 되어 있다. (678~679)
베토벤의 교향곡 하면 우리는 먼저 표제가 붙은 것을 떠올리게 마련이다. 3번 ‘영웅’, 5번 ‘운명’, 9번 ‘합창’ 하는 식으로 말이다. 그런데 말이다. 요즘 나는 5번 ‘운명’이란 것이 왜인들이 제멋대로 붙인 표제이며 그런 표제를 붙이고 5번 교향곡을 부르는 나라는 이 지구 상에서 일본과, 그리고 일본 것이라면 무엇이든 좋다고 일본책을 그냥 베껴서 출판하는 이놈의 슬픈 한국밖에 없다는 거다. 나는 이런 이야기에 눈깔이 뒤집히도록 경악했다. 긴가 민가 하여 영어와 독어로 된 베토벤의 작품 목록을 훑어보았더니, 과연 No. 5에는 표제가 없다. (679)
그런데 나는 현대 한국어가 가령 50년 전, 100년 전에 사용하던 어휘를 도대체 얼마만큼이나 유지하고 있는지 심히 의심스러울 때가 있다. 즉, 현대 한국어가 (외래어나 괴상한 속어는 많이 집어삼켰지만) 고유의 표현을 많이 잃어버린 한정된 (즉, 제 실력을 100% 발휘하지 못하고 있는) 한국어라고 생각하기도 하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게 된 이유는, 염상섭이나 김유정 등의 소설을 읽어 볼 때 나는 내가 당황할 정도로 많은 생소한 낱말들과 부딪히는데, 현대 소설에서는 (..) 거의 볼 수 없게 된 이런 낱말들(..) 이 일제시대에는 아직도 대중들에게 그리 생소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보기 대문이다.
그렇다면 우리 고유의 풍부한 표현 중 상당수가 일제의 의식적인 민족문화 말살정책 아래, 그리고 해방 후의 들뜬 미국화의 과정에서 사어가 되어 버린 것이라는 이야기가 가능해질 것이다. (702)
특유의 거친 터치와 강렬한 색채의 루오의 그림 속에서 예수는 언제나 처절하리 만큼 고고하다. 눈을 부릅뜨거나 야비하게 웃는 군상에 둘러싸여 고개를 꼿꼿이 세운 채 다소곳이 눈을 내리깔곤 하는 예수는 그러나 ‘신의 아들’이기 때문에 당연히 고고한 것은 아니다. (752)
독서습관584_17년의 부당한 옥살이 중 통찰과 사색의 편지들_서준식의 옥중서한(1971~1988)②_2002_야간비행(220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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