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에 서경식의 <소년의 눈물>을 읽었다. 그 책에서 둘째형 서승과 막내형 서준식에 대한 언급이 있다. 형제들의 삶에 대한 관심이 커져 이전에 도서관 관심 목록에 저장해 두었던 <서준식의 옥중서한>을 읽고 있다. 이 책은 서준식이 '유학생 간첩단 사건'으로 억울하게 징역 생활을 시작한 1971년부터 보호감호처분을 거쳐 1988년 출소하기까지 가족들에게 보냈던 편지를 모은 것이다.
800페이지가 넘는 책이라서 1부와 2부로 나눠서 포스팅한다. 1부는 1971년부터 1983년 5월 아버지가 직장암으로 사망할 때까지의 기록이다. 1부의 소감을 몇 가지로 정리했다.
첫째, 반복되지 않아야 할 조작 사건의 희생 가족이다.
일제로부터 해방된 뒤에 이승만에서 박정희로 이어지는 역사는 국민들에게 제대로 평가받아야 하는 시기다. 한국전쟁의 폐허를 극복하고 산업화 시대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투명하지 않은 부패한 정치로 인해 수많은 국민들이 희생되었다. 출세주의와 물질만능주의를 부추기는 부패한 자본주의의 민낯을 드러내는 시기였다.
서승과 서준식 형제는 '유학생 간첩단'이라는 박정희 정권의 정치적 목적으로 조작된 사건의 희생자가 된다. 책의 저자인 서준식은 당시 서울대 법대에 유학 중이었다. 조작 사건은 무고한 사람의 인생을 무참히 죽이는 일이고, 그 가족의 평온을 깨는 잔인한 일이다. 권력의 중심에 있지 않은 국민들의 인권이란 말로만 있는 것이었다.
장관 인사청문회에서 후보들의 과거를 따라가 보면 그들의 삶에 일반 국민들의 정서가 담겨있지 않다는 인상이다. 국민들이 경험하기 힘든 이력을 자랑하는 사람들에게서 기대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역사는 반복되지 않아야 하지만 자신과 가족의 이익을 국민과 국가보다 앞에 두는 사람들이 큰소리를 내고 의사결정을 하게 되며 반복될까 우려된다.
우리는 지나간 일을 회상할 때 죽어 버리고 싶도록 자기가 저지른 과오를 후회할 때가 있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다시 새로운 결의를 다져야 한다. 그 누구에게도 응석 부림이 없이 아무에게도 기대함이 없이, 결국은 자신의 힘으로 살아가야 한다. 그러기 위하여서는 강력한 무장을 갖추어야 하는데, 그것이 바로 '항상 재검토되는 맑고 엄숙한 양심에 의하여 제어되는 꾸준한 공부'라고 할 수 있겠다. 굳세게 살아가기 위한 무장은 형이나 오빠에게 기대할 수도 없고 아버지나 어머니께 기대할 수도 없고 스스로가 마련해야 하는 것이다. (35)
세상에는 대학을 졸업했으면서도 학문으로 뒷받침이 된 자신의 주장을 지니지 못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큼직한 고전 하나 읽어보지 못한 사람들, 외국어 하나 제대로 구사할 줄 모르는 사람들은 또 얼마나 많은가. 이런 생각을 할 때 지식인 되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실감하지 않을 수 없다. (41)
다른 공부도 비교적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모든 종류의 반지성, 특히 그 주어진 결론만을 중시하고 결론에 이르는 과정을 거치지 않는 반지성, 따라서 '옳은 것'이 피와 눈물로 다져져서 '진짜 옳은 것'이 되는 것이 아닌 반지성, 모든 주장의 결론에 이르는 논리적인 과정을 음미하지 않고 자신의 결론이나 용어법과 틀리면 규탄하는 반지성, 저는 요즘 그런 것들에 대한 적개심에 가득 차 있습니다. (70)
둘째, 7년 징역도 억울한데 보호감호 처분을 받았다.
서준식은 사회와 단절된 채 7년이란 긴 형기를 마치고 가족의 품으로 돌아갈 것을 기대했다. 하지만 국가는 그에게 전향하라는 강요 하지만 사람의 생각을 바꾸려는 것에 반대하며 다시 보호감호처분을 받고 교도소에 남게 된다. 2년마다 종료되는 시기에 출소를 기대하지만 국가는 계속해서 보호감호처분 기간을 갱신한다. 그것이 결국은 10년이나 연장된다.
조작된 사건에 의해 억울하게 7년의 감옥살이를 한 서준식에게 생각을 바꾸지 않는다고 국가는 보호감호라는 명목으로 옥살이를 연장했다. 이는 인권에 대한 국가의 태도 얼마나 후진적이었는지 보여주는 실례다. 박정희 시기에 조작된 사건이 전두환 시기에도 보호감호처분을 유지하며 감금한 것이다. 우리 현대사의 지극히 어두운 모습이다.
그리고 본존님을 잘 모시고 남무묘법연화경을 외는 일에 절대 회의를 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도대체 '과학'과는 무슨 상관이 있는지 등의 문제의식을 가지고 파고들고 고뇌하는 일이다. 정신 차리지 않으면 어감의 마술에 속기가 십상이다. (94)
예술 사회학이라는 학문은 사회에서 일어나는 예술 현상을 해명하는 몹시 매력적인 학문이다. 이에 대해서는 아놀드 하우저의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힘이 들면 그중 '현대편' 만이라도)를 읽어 볼 것을 권한다. 많은 젊은이의 마음을 잡아 흔드는 명저라 할 수 있다. (116)
대체로 이런 식으로 역사 공부를 하여 보아라. 그리고 어려운 책은 적어도 연속해서 두 번 이상 읽어야 한다. 아무리 어려운 책이라도 두 번 세 번 읽으면 윤곽이 보이기 마련이다. 읽고 나서 너의 '착한 마음'에 비추어 감명받은 책은 그 저자 이름을 꼭 외워 두어야 한다. 다음에 또 그 저자의 책을 사서 읽을 수 있도록. (120)
생존경쟁에 시달리는 여느 각박한 사회가 그렇듯이, 나의 눈에 조국은 철저히 메말라 있었고 세상은 온통 속물투성이였다. 출세주의와 물질 제일주의, 그리고 '강자에게는 비굴하게, 약자에게는 용감하게'라는 금언에 젊은 학우들의 정신은 썩어 들고 있는 것 같았고, 내가 사랑했던 어느 여학생이 그런 속물이라는 사실에 나는 몹시도 괴로워했다. (127)
셋째, 보호감호처분 기간중에 의지와 희망이었던 부모님의 부고를 접했다.
7년의 징역살이를 마치고 출소할 수 있었는데 서준식은 1978년 보호감호 처분을 받고 여전히 사회와 단절된 상태가 유지된다. 아들의 출소를 바라고 있던 그의 어머니가 사망하며 그에게 큰 희망과 의지였던 거인이 사라지는 충격을 받는다. 그리고 1983년 아버지마저 직장암으로 사망한다.
부모와 자식간에 살아있지만 생이별을 해야만 하는 심정은 가족의 마음에 큰 응어리로 남았을까. 상상만으로도 마음이 답답하다. 가족과 친척들에게 편지를 쓰더라도 검열을 받아 삭제되고 거부되는 시대에 편지 내용은 순화될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글에 녹아 있는 부모에 대한 그리움과 죄송함은 독자에게 전해진다.
좋은 옷에 욕심 부리고 화장이나 부지런히 해 대면서 남자들이 좋아함직한 '예쁜' 표정 만들기 연습에 여념이 없는 여자들은 애초에 '인격' 보다도 아름다움으로 남자의 환심을 살 생각밖에 없는 것이다. 즉, 알아서 남자에 대한 종속의 길로 치닫는 셈이다. (133)
흔해 빠진 '비자생적' 크리스천들을 보고 성서 자체의 가치를 싸잡아 부정적으로 속단하는 일은 없어야 하겠다. 그들은 아무리 열심히 기도를 하고 성서를 암송해도 대부분 교회에 나가 있는 동안만 크리스천인 위선자들이거나 아니면 인간해방보다는 교세나 교회건물을 자랑하는 물신숭배주의자이기 때문이다. 성서에는 책임이 없는 일인 것이다. (159)
역사의 흐름 속에 스스로를 놓고 스스로의 위치를 물을 수 있는 사람, 나아가서는 역사 속에서 스스로의 위치를 뚜렷이 깨달을 수 있는 사람이란 그 어떤 어둠 속에 던져지더라도 그 어떤 어려움 속에서라도 그 나름대로 행복할 수 있는 사람이다. "왜 불행한 사람만 불행할까요?"라고 묻는 순자가 지금 결여하고 있는 것은 보다 크고 길게 세상을 보는 일이다. (178)
시험이라는 것은 참으로 인간의 영혼을 빼 가고 인간을 기계로 만들어 버리는 마귀 같은 것이라고나 할까. 사람들은 "공장이나 논밭에서 일하긴 실다. 좀더 편하게! 좀 더 많은 돈을!" 하고 부르짖으면서 진리탐구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기계가 되기 위한 시험, 시험, 시험 속에서 피를 말린다. 그 정력을 단순한 '교양'이 아닌, '착하게 살기 위한 공부', '세상과 이웃에 대한 사명감이 있는 공부' 쪽으로 돌린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192)
마지막으로 겨울의 추위에 대한 힘겨움과 생각의 변화다.
고 신영복 교수의 책에서 교도소의 겨울도 춥지만 여름은 더욱 힘들다는 표현이 기억난다. 서준식에게는 겨울이 혹독했다. 매년 10월이 되며 기온이 영하로 떨어질 때면 3개월의 겨울을 날 걱정이 편지에 녹아 있다. 가까스로 겨울을 나고 봄이 되면 추위로부터의 해방을 글로 시로 표현한다.
그리고 이종사촌, 고종사촌 동생들은 자신이 옥살이를 하는 중에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생이 되고, 군입대를 하고, 시집을 간다. 그는 정지되어 있지만 나머지 사람들은 세상의 흐름 속에서 변해가고 있다. 물론 저자의 배움에 대한 생각, 종교에 대한 생각도 점차 변한다. 독자들도 저자와 함께 옥중에서 편지로만 가족과 친지들의 소식을 접하는 답답함을 체험한다.
세상에 대한 꿈과 희망에 부풀어 재일교포 2세로서 대한민국의 명문이란 서울대 법학도로 유학생활을 하던 서준식에게 닥쳐온 절망의 시대를 잘 보여주는 그의 옥중 서한집이다. 1983년 후반기부터의 내용은 2부에서 정리한다. 아래는 책에서 남기고 싶은 문장들을 발췌했다.
서구의 현대문명은 현대인들의 생활을 고도로 물질화시키고 단편화시키고 전문화시킴으로써 인간의 끝없는 고독을 자초했고 전반적인 도덕적 황폐를 초래했다. 그것이 우리 젊은이들의 가치관에 직간접으로 영향을 주게 된 데서 요즘 우리 사회에 이런 문제가 제기되는 것 같다. (207)
예수의 전기 전체를 꿰뚫고 흐르는 기조는 물론 '사랑'이지만 그 '사랑'과는 뗄래야 뗄 수 없는 또 하나의 기조가 형해화되고 비인간화된 제도, 규범, 교의에 대한 아름답고 과감한 '안티테제'라는 사실에 주목할 때(마가복음 2장과 3장 그리고 7장 등), 이 요한복음 8장의 이야기 역시 그러한 두 측면에서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234)
부디 심부름꾼으로 그치는 공부만이 아니라 당당한 인격을 가진 어른이 되기 위하여 뜻 있는 학창생활을 보내 주기 바라는 마음이 간절하다. (248)
사람들은 저마다 남보다 잘 살곘다고 땀 흘리며 노력하고 재산을 모으고 출세하고 지위나 명예를 얻으려고 애를 쓴다. 그런데 일단 그런 것들을 어느 정도 이루어 놓으면 이번에는 그런 것들을 잃게 될까 봐 두려워서 말해야 할 때 입을 열 용기가 없어지고 행동해야 할 때 발을 옮길 용기가 없어진다. 즉 사람은 재물과 명예의 노예가 된다. (253)
기독교가 어떤 사적 조건에서 공인 받고 크게 번창한다는 것, 그것은 어느 의미에서는 당대의 '강자'와의 유착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기독교의 발전이 아니라 기독교가 썩은 세계와 더불어 썩어 가고 있다는 이야기가 될 것이다. 그런 때 예수의 이름을 요란스럽게 떠들어 대는 신학이나 설교나 찬송가들은 세심하게 읽어 본 예수의 전기(공관복음서)와는 아주 동떨어진 특정 이데올로기의 시녀로 전락하고, 진정한 예수는 기독교인들로부터 따돌림을 당하게 되는 것이다. (277)
성직자나 외국 선교사들의 말을 넙죽넙죽 받아 삼키면서 성서 구절이나 줄줄 암송하고 다니는, 그리고 '크리스천'이라는 상표만 붙여 놓고는 제법 '예수의 제자' 연하는 예수꾼들이 범람하는 이 시대에 우찌무라의 자세는 너무나도 귀중하다. 우찌무라는 글자 그대로 '자생'한 것은 아니지만, 크리스천으로서의 그의 발전 과정은 외부에서 주어지는 그 어떠한 것도 (하나님의 말씀조차도!) 자신의 '구체적인 삶'이라는 토양에 심어서 키우지 않고는 절대로 그대로의 형태로는 자기 것으로 삼지 않겠다는 철저한 '자생'에의 의지가 관철되는 과정이었다. (287)
학교 졸업장을 인간의 가치와 동일시하려는 세상의 더러운 관습에 휩쓸려 들지 말아야겠다. (297)
재판관이 그 사회를 압도하는 상식이나 정신적 풍토, 기성 질서나 강대한 권력에 영합하고 법의 정신이나 법관의 양심을 헌신짝 버리듯 내팽개치기 위하여 그 비상한 지능으로 얼마나 기상천외의 궤변을 만들어 내는 데 골몰하는가를 증명해 주는 예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러나 결국은 그것은 강변이요 궤변 외에 아무것도 아닙니다. (310)
저는 감방에서 혼자 이 변호사를 생각할 때마다 구 제국주의 시대 일본의 그 빛나는 변호사, 후세 다쓰지를 함께 떠올리곤 합니다. 법학도였던 시절의 제가 다른 친구들처럼 사법시험에 대한 정열을 조금이라도 간직하고 공부한 시기가 있었다면 그것은 거의 전적으로 후세 다쓰지의 일대기를 읽고 감동했던 탓입니다. 순전히 휴머니스틱한 동기에서, 모든 종류의 소위 반국가 사범 사건의 무료 변호에 분주했던 후세 다쓰지는 우리의 위대한 3.1 독립만세운동의 도화선이 되었던 일본 유학생들의 2.8 독립선언 사건을 비롯하여 여러 우리 민족독립운동 사건들을 무료로 담당한 변호사였습니다. (342)
어쨌든 전라도는 오랫동안 '반역향'으로 규정되어 왔고, 사실 수없이 많은 '반역'이 있어 왔습니다. 지세나 인간성 때문에 그랬던 것이 아니라, 멸시받고, 차별받고 인간 이하의 생활을 강요당해 온 가난한 전라도 백성들은 그렇게 자주 봉기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었습니다. 이리하여 반역의 정신이 전라도 사람들의 골수 깊이 자리 잡은 것은 필연이라 할 수 있습니다. (355~356)
독서습관584_유학생 간첩단 사건으로 억울한 수감생활과 부모님 사망_서준식의 옥중서한(1971~1988)①_2002_야간비행(220619)
■ 저자: 서준식
인권운동가. 1948년 일본 교토에서 재일교포 2세로 태어나 고등학교를 마치고 '조선놈'이 되기 위하여 한국에 유학했다. 서울대 법대 3학년 재학 중 형 서승과 북한을 방문하였다가 1971년 이른바 '유학생 간첩단'의 일원으로 체포되어 7년형을 선고받았다. 형기를 마쳤지만 '사람의 생각은 누구도 규제할 수 없다'는 신념에 따라 전향을 거부함으로써 다시 10년 동안 보안감호처분을 받았다. 1988년 5월 비전향 좌익수로는 처음으로 석방되었다.
도시 빈민들과 어울려 살며 글쓰기를 하려 했으나 '운명적인' 강기훈 유서대필사건을 만나면서 인권운동에 투신했다. 1993년 인권운동 사랑방을 꾸려 한국을 대표하는 인권운동 단체로 이끌어 왔고, 여전히 세상의 근본적인 변화를 좇아 현실의 굽이굽이를 직직하고 있다. 비타협적 삶 덕에 사람들은 그를 '강퍅한 투사'라 오해하기도 하지만, 벗들은 그를 단지 '착한 마음을 가진 사람'으로 기억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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