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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습관

독서습관300_언론인과 교수로 진리와 정의를 추구한 삶_리영희 평전_김삼웅_2010_책보세(201123)

by bandiburi 2020. 11. 21.

 

 

■ 저자: 김삼웅

독립운동사 및 친일반민족사 연구가이자 정치평론가이다. <민주전선> 등 진보매체에서 활동했으며, <대한매일신보>(현 서울신문) 주필로 있으면서 동호지필의 소임을 다하고자 했다. 제7대 독립기념관장, 성균관대학교 겸임교수를 지냈으며, 민주화운동관련자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 위원,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위온, 제주4.3사건희생자진상규명 및 희생자명예회복위원회 위원, 단재신채호선생기념사업회 이사, 친일반민족행위자재산조사위원회 자문위원, <친일인명사전>편찬 자문위원 등으로 활동했다. 

■ 소감

 한 동안 유튜브에서 '뉴스타파'를 뜨겁게 시청한 적이 있었습니다. 아마 박근혜 정권시절 닫힌 언론을 대신해서 시대를 고발했던 뉴스였습니다. 마지막에 매번 등장하는 노인이 계셨습니다. '진실'을 강조하시는 분이셨죠. 어떤 분인지 몰랐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반복해서 보다 보니 누군지 궁금해졌습니다. 그래서 알게 된 분 '리영희' 교수입니다. 이 분에 대한 호기심이 이 책 <리영희 평전>으로 이끌었습니다.

리영희라는 이 시대를 깨어서 진실만을 추구하며 살았던 지식인이 있었고 이 분을 평전으로 잘 만들어주신 저자 김삼웅 평론가도 글을 참 잘 썼다라며 감탄이 절로 나왔습니다. 아마도 리영희 교수에 대해 잘 알고 있고 지식과 혜안의 수준이 통하는 수준이라서라고 추측해봅니다.

일제시대에 청소년기를 보내고 20대를 한국전쟁과 함께 보내며 통역장교로 근무했습니다. 이승만 정권, 박정희 정권, 전두환 정권, 노태우 정권까지 진실을 추구하는 삶을 허용하지 않는 어두운 대한민국의 근대사속에서 고난을 겪어야 했습니다. 먹고살기 급급하던 시기에 하기 어려운 결단입니다. 육체적인 고통 속에서 우리는 스스로를 위로하며 편리한 길을 택하기 쉽습니다. 무엇이 그를 이렇게까지 단단하게 만들었을까 생각해봅니다.

책에서도 언급했듯이 나름 부유한 외할아버지 집안에서 일어났던 두 가지 사건이 그의 인생에 영향을 크게 줬을 것이라고 합니다. 바로 외할아버지 집에서 일하던 사람이 독립군이 되어 나타나 군자금을 위해 외할아버지를 살해한 사건과 일본 유학을 다녀온 외삼촌이 갑자기 소작인들에게 땅문서를 나눠준 사건입니다.

고등학교 시절 민주화 열풍이 불었지만 오직 대학교육을 받고 사회에 대한 문제의식 없이 전공과 취업만을 위해 살았던 사람으로서 늦었지만 부끄러움을 느끼게 되는 책이었습니다. 뉴스에서 가끔 나오는 민주화와 관련된 이름들이 리영희 교수와 함께 고초를 겪었던 분들이었습니다. 미국의 정의롭지 않음을 깨우친 사람들, 언론과 사법부, 검사, 의사 등 소위 사회 권력층의 부도덕을 알고 있는 사람들, 특히나 친일의 잔재를 남겨둬 그 후손들이 떵떵거리며 잘 살고 있는 반면에 독립운동의 후손들이나 나라를 위해 정의를 부르짖던 사람들의 후손들이 어렵게 살고 있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언론이 원하는 대로, 정권이 원하는 대로, 학교에서 가르치는 대로 그것이 진실인 것마냥 믿고 살아왔습니다. 비판의식이 없는 학생이나 시민이었습니다. 그래서 내 아이들에게는 사회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을 가지라고 권합니다.

리영희 교수가 언급하는 종교에 대해서도 깊이 공감합니다. 종교 자체가 나쁜 것이 아니라 종교를 이용해 돈과 권위를 내세우는 사람들이 더러운 것입니다. 자신들이 하고 있는 일이 올바르지 않다는 것을 알지만 현실이 안락하니까 내려오질 못합니다.

리영희 교수가 노년에 질병으로 고생하시다 돌아가신 것은 안타까운 부분입니다. 돈이 풍족하지 못했지만 주변 분들의 도움이 있었습니다. 앙코르와트에 가보지 못하는 것에 아쉬움을 보이실 때... 인간적인 면이 보입니다. 좋은 책 한 권 읽었습니다.

■ 마음에 동하는 문구

9페이지) 리영희 선생의 결곡한 삶의 궤적과 늠연한 선비적 자세는 광기의 맹신이 소용돌이치는 시대에 참 지식인이 취해야 할 모습을 보여주었다. (중략)

"생활은 단순하게 생각은 깊이하자"는 에머슨의 말을 가훈으로 삼으며 청렴하게 살아온 한국 지성계의 대부 리영희 선생

19) 러시아 사상가 베르자예프의 말이다. 니콜라이 알렉산드로비치 베르자예프(1874~1948)는 두 차례의 투옥에 이어 소비에트 러시아에서 추방되어 독일 베를린에서 머물다가 프랑스 파리로 옮겨 종교철학원을 개설하고 종교기관지 <길>을 발행하였다. 그의 <자유와 정신> <노예와 자유> 등 대표작은 한국에도 소개되었다. 

20) 리영희에 대한 네오콘의 이념 공세를 지켜볼 때마다 베르톨트 브레히트가 떠오른다. <서푼짜리 오페라>로 유명한 독일의 극작가 브레히트(1898~1956)나치를 비판하다 쫓겨나 유럽 각국을 떠돌다가 미국으로 망명하여 <억척 어멈과 그 자식들> <갈릴레이의 생애> 등 숱한 명작을 쓰고 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귀향하였다. 

25) 무슨 거창한 이념이 있었다기보다는 '거짓'이 태생적으로 맞지 않아서 이렇게 살아왔나 봅니다. 특히 대중을 속이고 바보로 만들면서 개인적인 치부나 향락에 몰입하는 권력집단의 거짓을 참을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권력을 지키려 국민을 비인간적으로 만들고 인간다운 권리와 정체성을 박탈하는 집단이죠. 

27) 내가 글을 쓰는 유일한 목적은 진실을 추구하는 오직 그것에서 시작되고 그것에서 그친다. 진실은 한 사람의 소유물일 수 없고 이웃과 나눠져야 할 생명인 까닭에 그것을 알리기 위해서는 글을 써야 했다. 그것은 우상에 도전하는 이성의 행위이다. 그것은 언제나 어디서나 고통을 무릅써야 했다. 지금까지도 그렇고 영원히 그러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괴로움 없이 인간의 해방과 발전, 사회의 진보는 있을 수 없다. 

31) 리영희는 자신이 군사독재의 포악한 시대에 지적 활동을 지탱해준 두 권의 책에서 진리란 어떤 것인가를 깨닫고, 진리에 몸 바쳐야 하는 지식인은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가도 배웠다고 했다. 존 배그넬배리<사상의 자유의 역사>앤드류 화이트<기독교 국가에서의 과학과 신학의 투쟁의 역사>이다. 

32) '논증'을 철학적으로 풀이하면 "주어진 판단에 참이라고 하는 것의 이유를 밝히는 논리적 절차, 논증되어야 할 판단을 논제 또는 주장이라 하고, 그 이유 내지 근거로 선택되는 것을 논거라 한다."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에서 인간의 사유는 '논증적'이지 '직관적'이지 않다.

44) <연세대학원신문>이 1999년 12월 9일 자 기획특집으로 교수와 대학원생들을 상대로 우리 학계 전반에 영향을 끼친 학자와 저작에 대한 설문을 벌였는데, 리영희와 <해방 전후사의 인식>이 1위로 꼽혔다. 

45) 인간의 이성을 높이 치면서 <순수이성비판>과 <실천이성비판> 등을 집필, "역사적 진보가 객관적으로 모순에 의거하여 합법칙적으로 이루어진다."는 임마누엘 칸트를 두고 '이성의 우상'이라거나 '지성의 우상'이라 부르는 독일인은 없다. 

52) 미국은 알렌의 노련한 수완으로, 조선에서 가장 큰 이권으로 평가되는 평북 운산금광 채굴권과 경인철도 부설과을 손에 넣었다. 내한 초기부터 조선 광산의 실태를 은밀히 조사해온 알렌은 전문가들의 광산 탐사보고서를 토대로 평북 지방의 운산금광이 엄청난 보고라는 것을 확인하고 채굴권을 따내는 데 성공한 것이다

 56) 평안도는 전반적으로 기독교의 선교가 일찍 퍼졌던 탓이겠지만, 나의 고향에서는 양반 상놈 구별이라든가. 엄격한 신분적 위계질서 같은 것을 알지도 못하고 느끼지도 못하고 자랐다. 서울이나 남한의 각 지방에서는 해방 후의 오늘날에도 일상생활에 그런 구별이나 의식이 짙게 남아 있는 것을 볼 때, 나는 평안도가 평등주의적 기풍이 상당히 철저했던 것을 새삼 깨닫게 되는 것이다. 

59) 조선 세종은 사민정책으로 한강 이남의 백성들을 북방 변경지대로 이주시켜 그 지역을 개척하게 하였는데 리영희의 선대도 그때 강원도에서 평안도로 옮겨 터를 잡은 것으로 보인다. 

76) 일제 말기가 될수록 항일 지하운동이나 민족해방투쟁의 주력은 공산주의자나 사회주의자였으니까, 히틀러 나치 독일 점령하의 많은 유럽 국가들에서도, 우익은 일찌감치 굴복하거나 나치 협력자가 됐고 좌익과 공산주의자들은 거의가 목숨을 바쳐 반나치 저항운동에 투신하지 않았어요? 

79) 그러나 아무런 준비도 없이 한국에 상륙하여 권력을 접수한 미국은, 건준을 해체하고 임정(대한민국임시정부)깢 부정한 채 군정을 실시하는 과정에서 민족반역자 친일분자들로 구성된 조선총독부의 인적 토대를 그대로 존치시켰다

80) 민족은 식민지에서 해방됐다는데, 일본제국주의 식민 권력에 빌붙어 살았던 친일민족반역자들이 하나도 숙청되지 않은 채 고스란히 남한사회를 지배하고 있었어. 그들이 힘없는 자기 동족들을 먹이로 삼아 지배하고 행세하였지요. 


83) 민족정기란 털끝만치도 없고, 오히려 친일민족반역자들이 국가권력을 독차지하고 있었다는 것을 여실히 알 수 있지. 이것이 해방 후 미군정이 이남에서 해방된 민족을 다스렸던 철학과 사상과 행정의 실체입니다. 우리는 이런 사실을 똑바로 알아야 해요.

98) 리영희는 군고위층의 부패와 타락에 분노했다. 국군 수뇌부의 대다수가 일군이나 만군 출신들로 구성되어 있는 것에 분개해온 그는 국민방위군 사건 소식을 듣고는 분노와 증오의 감정을 가누기 어려웠다.

131) 내 생활신조는 "Simple Life, High Thinking"입니다. 물질이 내 몸에 많을수록 정신이 그만큼 번잡해지며, 재물이든 권세든 물질을 늘리기 위해 거기에 집착할수록 내면적 도덕적 철학적 인간적 성숙도는 그에 정비례하여, 아니 그 제곱에 비례하여 고갈되어 갑니다.

138) 리영희는 1959년 '풀브라이트 장학계획'의 일원으로 선발되어 미국으로 건너갔다. 미국이 세계의 패권 유지를 목적으로 각국 언론계를 지도할 유망한 기자를 뽑아서 세뇌(미국화)하려는 미국 정부의 야심 찬 프로그램이었다.

144) 전쟁에 패망하고 15년이 지났을 때인데, 세계 인류의 지적활동과 정신적 탐구는 모든 분야에서 없는 서적이 없을 정도로 일본인들의 연구업적이 그득 차 있었어. 나는 그 엄청난 책의 더미 앞에서 그냥 넋을 잃었다고.
리영희는 도쿄의 서점에서 몇 권의 책을 구입하면서 님 웨일스<아리랑의 노래>도 샀다. (중략) <아리랑> 즉 Song of Ariran(아리랑의 노래)의 저자 님 웨일스는 <중국의 붉은 별>을 쓴 애드가 스노의 아내 헬렌 포스터(1907~1997)의 필명이다. 1935년에 혁명가 김산과 만나 나눈 대화를 재구성하여 Song of Ariran을 슨 그는, 1936년 중국 동북지역의 통치자 장쉐량을 인터뷰함으로써 중국의 국공합작 가능성을 <런던 데일리 헤럴드>에 처음 보도하여 세계적인 특종을 터뜨리기도 한 유능한 기자였다.


145) 이 나라를 무겁게 내리누르고 있던 지난 30년의 지적 사상적 암흑 속에서 가끔 <아리랑>을 펼치는 것은 내게는 큰 위안이었다. 모색하다 지치고 좌절 때문에 실의 했을 때는 '김산 金山'을 찾았다.

146) 미국은 한국의 유망한 언론인들에게 여비와 활동비를 주어가면서 '풀브라이트 장학계획' 코스를 마련하고, 리영희에게도 혜택이 주어졌다. 적지 않은 한국의 언론인이 이 과정을 밟고 와서 미국에 우호적인 '친미 언론인'이 되었다. 이들 중에서 정관계에 진출하여 '출세'한 인사도 적지 않았다.

147) 독립운동가 심산 김창숙은 이승만을 '독부 獨夫'라고 질타하면서 하야를 요구했다. 독선과 독재로 인심을 잃어 남의 도움을 받을 곳이 없게 된 권력자를 독부라 했다.

153) "진리를 사랑하는 자는 진리를 추구할 뿐 아니라 반드시 이를 옹호해야 하며, 생활 속에서 그 진리에 복무해야 한다." 마르크 블로크의 말이다.

159) 리영희는 지식인들의 비겁을 질타하면서 '자유인'으로서의 행동을 강조한다. "자유는 인간존재의 전부이며 그 본질이다. 본질을 부정당했다거나 박탈당한 상태는 자유가 아닐 뿐만 아니라 '인간' 자체가 아니다. '자유인'만이 진정한 의미에서의 인간이라 할 수 있다."

161) 나는 하와이에서 만난 과거의 이승만 동지들에게서 이승만의 너무나 많은 결점을 듣고 알고 있었지. 중국에 망명해서 임시정부 활동을 할 때에도 이승만은 언제나 자기가 일인자가 아니면 운동을 버리거나 조직을 분열하거나 배신했어요. 하여간, 한마디로 말해서 이승만은 분열주의자이지 통합주의자가 아니거든. 결국 이와 같은 그의 개인적 성향은 독재자의 일반적인 요건인 듯싶어. 민족의 통합보다 분열을 더 중시하고, 남북의 화합을 극렬히 반대하고, 자기의 패권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정치인이지요. 이승만이 일제강점기의 친일민족반역자들을 모조리 자기 정권의 기둥으로 이용하면서 일본과의 화해를 거부한 것은 큰 아이러니이기도 하지요.

162) 그 결과 이미 6.25전쟁 전후 시기에 진정한 애국자들과 양심적 지도자들이 남한을 버리고 북한으로 갔어요. 흔히 남한에서 지난 수십 년 동안 '납북자'라고 불리던 수많은 사람들의 대부분은, 납북이라는 말이 뜻하는 대로 '끌려간 사람들'이 아니라 대부분은 이승만 정권치하 친일민족반역자들의 통치를 거부하고 자진해서 북한으로 넘어간 거예요.

171) 국가나 사회, 국민과 민족에 대한 공적 관심보다 자기 개인이나 가정의 복지를 앞세우는 삶의 자세는 당시의 내게는 부도덕한 것으로 생각되었다. 이것 역시 선친께서 한탄했던 나의 성격적 결함임이 틀림없다.

197) 리영희는 일제강점기 동안 조선인 개인과 법인체들이 소유했던 저금, 보험, 증권, 부동산, 일본국채 등의 문제에 주목했다. 이 엄청난 국민재산권의 대가를 박정희 정권은 대일재산청구권이라는 이름으로 슬쩍 받아 챙겨 해당 개인과 법인체에 주지 않고 몽땅 정부 자금으로 사용하려던 참이었다.

217) "나는 저널리스트로서, 직업적 양심과 훈련된 격식에 따라, 본 대로 있는 대로 쓸 수밖에 없습니다. 거짓은 못 쓴다는 말입니다."

218) 외신부에 있으면서 베트남 문제에 천착해온 리영희는 1985년 <베트남전쟁>을 펴낼 만큼 전문가가 되었다. 그는 베트남전쟁을 "인류의 양심에 그어진 상처"로 인식한다.

223) 흔히 '베트콩'으로 불리는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FLN)군과 호치민이 지도한 '베트남독립동맹'(월맹)군의 민족통일전선 중앙위원회 31인은 한 사람의 예외도 없이 항불, 항일 독립투사였어! (중략) 이 사실 하나만을 두고 보더라도, 베트남 인민이 이른바 외세의존, 반공주의 사이공 정권과 민족해방세력 사이에서 어느 쪽에 더 민족적 동질감을 느끼며, 어느 쪽에 더 충성을 보낼 것인가 하는 것은 자명한 일이 아니겠어요.

255) 군사정권의 관제교육이 심어놓은 상식과 가치들은 여지없이 부정됐다. 종신집권 체제인 유신의 허구성과 강력한 국가주의 망령을 직시하는 것은 그들에게 참으로 충격이었다. - 리영희의 <전환시대의 논리>에 대해

266) ~ 박정희 치하에서 고민하던 나는 이 구절을 읽는 순간, 그 구절을 무덤에서 루쉰이 내게 타이르는 소리 같이 들렸다. 나는 눈을 뜨고 정신을 번쩍 차렸다. 나는 내가 할 일이 무엇인가를 깨달았다. 그리고 결심하였다. 그 순간, 나의 삶의 내용과 방향과 목적은 결정되었다. 맹목적이고 광신적이며 비이성적인 반공주의에 마취되어 있는 사람들을 잠에서 깨어나게 하여 의식을 바로잡아주는 일이 나의 삶의 전부가 되었다.

272) 대한민국의 정치외교학이나 국제경제학 분야에 종사하는 교수들이 다소라도 앞을 내다보는 선견지명이 있었다면, 그중 몇 사람이라도 중국의 현실에 관해서 관심을 가졌을테지만, 그런 사람들이 없었어.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한국의 대학교수들의 기본이념이 미국 국가정책에 순응하고, 또 해방 이후의 광적인 반공주의에 길들여진 의식에 의한 것이었거든.

274) 글을 쓸 때의 치밀성과 더불어 집필한 뒤에도 검증과 퇴고, 교열, 독자 반응에 이르기까지 철저하게 자기 글에 대해 책임감을 갖는다. <말>지 기자를 지낸 조유식의 증언이다. <말>지에서 수많은 필자를 접해왔지만 리영희 교수만큼 자기 글에 대한 책임의식이 강한 사람은 흔치 않았다.

281) <우상과 이성>은 리영희에게는 핍박과 고난을 안겨주었지만, '이성'으로 살고자 하는 수많은 지식인, 노동자, 학생들에게는 "오랫동안 주입되고, 키워지고, 굳어진 신념체계와 가치관이 자신의 내부에서 무너져가는" '의식화의 교과서'가 되어 '우상' 타파의 강고한 전선을 형성시켰다.

298) "도대체 한국의 대학이 무슨 지식을 가르쳐준다는 말입니까? 머리 좋은 대학생들의 의식을 몽땅 바보로 만들어버리는 것밖에 뭣을 가르쳐줍니까? 내가 책에 쓴 그런 지식과 정보와 의식은 대학교육에서가 아니라 20년 가까운 신문사의 정치부 기자와 외신부장으로서의 직업적 훈련의 경력 탓입니다."

314) 리영희는 이 글에서 판 검사들이 연수기간이나 임용 전에 이 관속에 열흘만이라도 들어갔다 나오는 체험을 의무화할 것을 제안한다. "그러면 육법전서의 국보법이니 집시법이니 하는 법조문 활자보다 '인간'의 얼굴이 조금은 크게 보일 것이고, 그렇게 됐을 때 비로소 이 나라 사법부의 권위가 회복 될 것"이라고 했다.

315) 그는 2010년에 펴낸 <가시울타리의 증언>에서 12.12사태 관련자, 이부영, 김근태, 이근안, 전경환, 6월 항쟁 등에 얽힌 숱한 비화와 특히 6월 항쟁을 촉발한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의 진상을 소상히 밝히고 있다. (중략)
안토니오 그람시는 사회주의운동을 한 혐의로 기소되어 20년형을 선고받았으나 역작 <옥중수고><어른이 되면 무엇을 할까>라는 잊지 못할 글을 남기고 숨을 거두었다.

325) 이승만 시기에서 전두환 말에 이르는 40년 이상의 극한상황에서 나는 하나의 확고한 교우관을 지니게 됐어요. 친구를 사귀는 일종의 기준인데, 나는 20년을 사귀어야 그 사람을 웬만큼 알았다고 생각하고, 그 극한상황 속에서 믿을 수 있는 벗이라고 할 때에는 30년쯤 사귄 사람을 말해. 적어도 20년을 두고 봐야 사람을 알 수 있고, 30년쯤 험난한 행보를 같이 해야 믿을 만한 벗이라고 생각하는 거야.

342) 리영희는 1980년에 쓴 <민주주의와 진실의 추구>에서 '지식욕'에 관해 피력했다. "지식욕은 인간의 본능이며 사회발전을 추진하는 가장 강력한 기동력이다. 이 생산적인 본능은, 그 사회의 지배세력이 그것을 어떻게 방향지우고, 어떻게 대접했는가에 딸, 그 인간집단(민족 또는 현대사에서는 국가)을 위대하게도 하고, 퇴화시키기도 하는 속성을 지니고 있다." 그는 그런 인식으로, 시대의 아픔 속에서도 글쓰기를 멈추지 않았다.

346) 리영희는 여기서 '삼가 청년에게 고함'을 소개한다. 이는 중국 5.4운동을 주도한 천두슈, 후스, 루쉰, 리다자오 등이 발행한 <신청년>에 실렸으며, 천두슈의 <청년잡지> 창간호 <창간선언>에도 실린 내용이다.

1. 노예적이지 마라, 자주적이어라.
2. 보수적이지 마라, 진보적이어라.
3. 은둔적이지 마라, 진취적이어라.
4. 쇄국적이지 마라, 세계적이어라.
5. 허식적이지 마라, 실맂거이어라.
6. 공상적이지 마라, 과학적이어라.

349) 우리와 일본의 관계를 이런 측면에서 비판적으로 생각할 뿐 아니라 우리는 해방 직후와 그 후 오늘까지의 미국의 세계관이나 정책에 대해서도 비판적으로 볼 줄 아는 안목이 있어야 한다. '우방'이라고 해서 무조건 우리에게 옳은 일만 한 것은 아니다.

350) 우리나라에서는 작년의 일본 교과서가 일본 국내에서 문제되는 까닭에 그것이 단순히 '역사'로서의 '과거'에 관한 기술을 왜곡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그들 나라와 사회의 내부에서 문제되는 까닭은 과거보다 '현재' 즉 앞으로의 일본이라는 나라의 진로에 심각한 불안과 의구심을 갖게 하기 때문이다.

355) 분야는 다르지만 장일순 선생입니다. 나이로는 두어 살 위인데 인격 사상 품위 경륜 모든 것으로 해서 내가 10년 위로 모시고 싶은 분이었어요. 마음으로는 웃어른으로 모셨어. 민주회복국민회의를 이끌었던 이병린 선생도 내가 스승으로 존경하는 어른이시죠. 학문적으로는 직접 관계가 없지만 인격적으로는 그렇습니다. 사적으로나 공인으로서나 충실하게 살아오신 분으로 박형규 목사, 이돈명 변호사도 존경해요.

359) 리영희가 "마음으로는 항상 웃어른"으로 모셨던 장일순은 누구일까. 무위당 또는 일속자라 자호한 장일순(1928~1994)은 원주에서 농민운동과 반독재 민주화운동을 전개하고, 1980년대부터는 도농 직거래 조직인 '한살림협동조합'을 창립, 본격적으로 생명운동을 펴왔다. 하지만 이것은 무위당의 전모가 아니다. "노장사상과 사회적인 식견까지 갖춘 분, 가톨릭 노장사상 사회의식이 조화된 분"이라는 임헌영의 말에 리영희는 이렇게 보탠다(중략)

361) 당시 리영희는 장일순의 부탁으로 파울로 프레이리가 쓴 <페다고지>와 같은 교육서를 번역하기도 했다. <페다고지>는 피억업자의 교육학이자 의식화 교육론이다. 프레이리는 브라질의 대표적인 교육사상가로, 교육의 궁극적인 목표는 인간해방임을 설파하고 평생 이를 실천한 교육계의 '소크라테스'이자 '의식화의 원흉'이다.

374) 리영희가 미국에 대해 비판적인 것은 한국 정치 즉 정권 담당자를 저들의 이익에 맡은 자를 '간택'했다는 데 있었다. 미국의 한국 정치 개입을 지식인으로서 참을 수 없었던 것이다. 또 하나는 베트남전쟁에 대한 미국의 부당한 역할이다.

382) '용서'라는 것은 용서를 안 해도 되는, 강자만이 할 수 있는 자기선택적인 것이지 선택의 여지가 없는 약자가 자청해서 할 수 있는 미덕은 아니다. 용서란 승자가 베풀 때에는 위대한 도덕성을 과시하는 미덕일 수 있지만, 패자가 부르짖으면 꼴불견이 된다. 비굴의 자기기만일 수가 있다.

385) (중략) 즉, 북쪽에서 공산주의가 혁명을 했으니 남쪽에서 혁명하는 것은 공산주의적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속셈과 직접적인 의도는, 외세의 식민지 민족 분열정책의 비호 아래 기회와 혜택을 나눠먹던 그 기득권을 상전이 물러간 뒤에도 그대로 유지하려는 데 있었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389) 참지식인은 비판을 생명으로 한다. '비판'은 "시와 비를 반으로 쪼개어 보여준다"는 뜻이다. 지식인은 자기가 살고 있는 곳에서 진리를 밝히고, 진리를 억압하는 권력구조를 비판해야 한다고 믿었다. 지식인이 가진 힘이란 이성적인 사고와 진리에 대한 믿음과 용기뿐이라고 생각했다. 비판할 줄 모르는 지식인은 육체적 고자와 같다.

393) 리영희와 만나고 20여 년이 지난 뒤 송두율'민주화된 고국'에 낭만을 갖고 귀국했다가 우상들의 야만성에 온갖 상처를 입고 다시 독일로 돌아가 '영원한 변경인'이 되었다.

394) 1871년 3월 공동체 구성원이 평등한 사회체제를 수립한 '파리 코뮌'의 젊은 용사들이 계급통치의 반동적 정부군과 싸웠던 묘지에는 그들의 목을 매달아 죽인 쇠갈고리만 처참한 모습으로 남아 있었다.

404) 세계의 정치개혁운동사에서, 어느 나라의 경우에나 큰 공통점이 있어요. 우익은 이권으로 뭉치고 좌익은 이념으로 모이지만, 동시에 우익은 이권분배의 크기로 분열하고, 좌익은 이념의 지나친 정밀화 세밀화에 집착하는 '작음'의 고질적 아집 때문에 망한다는 역사적 경험이에요.

416) 김정한은 일제에 굴하지 않고 독립운동에 나서다 투옥되기도 한 소설가였지. 작품을 통해 일제의 태평양전쟁을 지지하거나 일제를 찬양하던 일제강점기의 다른 작가들과 달리, 그러한 집필활동을 거부한 고결한 인격의 소유자지. 이승만 시대에는 정권에 밉보여 부산대 교수직에서 일찌감치 추방되기도 했고, 대중과 함께 가슴 아픈 시대에 눈물을 흘린 분이오. 이런 이유에서 존경받는 지식인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김정한을 한겨레신문사의 초대 사장으로 추대한 것이지.

444) 마르크스의 논문 한 편이나 저서 한 권 읽어본 일도 없이, 사회주의나 공산주의에 관한 진지한 이해의 노력도 해보려는 지적 탐구심도 호기심조차 갖지 않고 뭐든지 좌로 가르고 우로 나누는 식의 '용공'이니 '좌경'이니 하는 따위의 흑백논리를 경계해야 한다는 말이다.

447) 보안법은 일제강점기 독립투사를 탄압하기 위해 조선총독부가 제정한 것이 시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에는 이승만이 1949년 12월에 제정한 것을 1958년 12월에 다시 야당과 언론을 탄압하기 위해 자유당 단독으로 개악 처리한 이래,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군사독재에서 '정권안보용'으로 악용돼왔다. 민주화운동 통일운도 노동운동에 헌신해온 사람들에게는 어김없이 모진 족쇄가 되었다.

448) 정치 사회 문화면에서는 물론, 무엇보다도 경제면에서 부정의 Injustices가 너무 많다. 이에 대한 정의의 요구가 기득권의 입장에서는 모두 좌로 보일지 모른다. 그것은 중대한 착각이다.

457) 리영희는 이곳에서 현대 학문(약학)과 전통 한약에 두루 정통한 선비 최준기와 친교를 맺었다. "(영암은) 500년 전 대동계의 발상지이며, (최준기) 지금도 그 전통을 그대로 지키고 있는 인물이다.

462) 사회주의가 없는 자본주의는 부패 불법 타락 빈부격차 폭력 범죄 잔인 인간소외 등을 낳게 마련이에요. 그것들은 자본주의의 '본태성 질병'이에요. 어쩔 수 없어요. 사회주의의 인간중시 가치관만이 이러한 자본주의의 반인간적 측면을 방지하고 보완하는 기능을 수행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대문입니다.

463) 자본주의 발전원리는 '인간의 가치'를 무시하고, 소유의 '물신숭배' 신앙으로 물적 생산과 낭비와 파괴를 인간 행복의 필수적인 전제조건으로 삼고 있어요. 그 대신 물질적 획득과 소유가 커지면 커질수록 인간적 요소들은 손상되고 무시되고 파괴되는 위험도 정비례로 커집니다. 자본주의사회 어디서나 그렇고 우리나라는 더욱 그렇지요. 법률이나 종교나 아무리 해도 인간의 소유욕을 다스릴 수는 없으니까. 그래서 결국 나의 결론은 인간은 물질적 요소로 존재하는 동물이니가 자본주의적 요소로 말미암을 필연적인 비인간화적 결과를 5할 정도의 선에서 인정하고(중략)

475) 북한과의 진정한 통일협상의 주체가 되기 위해서는 도한 미국에 양도한 군사주권을 회복해야 한다. 남북 분단의 주요 모순이 군사적 성격인 만큼, 영구분단을 목적으로 조성된 미국의 한반도 군사전략과 구조에 예속되어 있는 한 한국은 통일문제에서 미국의 국가이익에 봉사할 뿐이다.

479) 리영희는 또 한 권의 명저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를 두레에서 펴냈다. '전환시대의 논리-그후'라는 부제에서 보듯 20년 전에 펴낸 <전환시대의 논리>의 정신과 논리를 이은 책이다.

483) 정직하게 말해서 나는 예수와 부처의 사상과 행덕을 기리는 데는 남에게 빠지지 않으려는 사람이지만, 그 두 분의 이름을 빌려서 행해지는 제도화된 종교와 종교형식은 경멸하는 사람이다. 어쩌면 그렇게도 추악할 수 있을까? 세속권력과 돈의 노예가 된 종교들! 어쩌면 그렇게도 잔인할 수 있을까? 나는 신이 있는지 없는지를 알지 못하고,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지만, 신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온갖 잔인무도한 행위를 본 뒤로는 차라리 신이 없기를 바라는 사람이기도 하다.

493) 적어도 초월자와 절대자의 정신에 충성을 맹세한 수도자는, 자기가 먹고 입을 것을 남의 보시로써가 아니라 자기의 육체와 땀으로써 직접 공양해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507) 표제글 <스핑크스의 코>결혼 40주년 기념으로 아내와 함께 지중해지역을 돌아보고 쓴 짧은 기행문이다. 리영희의 글은 기행문이라 해도 문제의식이 뜨겁고 깊다.

521) 오스트리아 빈 출신의 풍자가 칼 크라우스에 대한 극우파들의 비난과 온갖 모함 중에는 "제 나라를 욕한다"는 '맹목적인 애국주의자들'의 언동도 있었다.

525) 리 교수의 지적에 따르면, 남북 선악론의 발단은 1948년 남한을 유일합법 정부로 승인한 유엔총회 결의에 대한 왜곡된 해석이었다. 당시 유엔총회 결의는 1948년 5.10 선거로 수립된 남한 정부에 대해 '38선 이남의 유일 합법정부'라 인정한 것에 불과했는데, 이를 역대 정권이 38선 이북까지 포함한 한반도 차원으로 확대해 왜곡했다는 것이다.

526) 리 교수는 또한 북한의 '통미봉남' 정책에 대한 남한 지식사회의 비판에 대해서도 "미국으로부터 군사 주권을 회복해 북한과 동등한 대화 자격을 획득하기 위한 노력을 소홀히 한 자기반성을 먼저 할 필요가 있다"고 질타했다.

537) 리영희는 포럼을 마치고 아내와 함께 유서 깊은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둘러보며 모처럼의 망중한을 즐겼다. 일찍이 페트로그라드, 레닌그라드로 불리기도 한 이 도시는 1703년 표트르 대제가 설립했으며, 1713년부터 1918년까지 200년간 러시아제국의 수도였다. 무엇보다 이 도시가 리영희에게 특별한 감회로 다가온 것은 도스토예프스키의 문향이자 <죄와 벌>의 무대이기 때문이다.

541) 리영희의 서재에는 오래 전부터 백범 김구의 오언절구 붓글씨 한 편(복사본)이 걸려 있다. 백범이 통일정부 수립 협의차 북행하기 전에 쓴 서산대사의 시다.

(답설야중거) 눈길을 걸을 때
(불수호란행) 흐트러지게 걷지 마라
(금일아행적) 내가 걷는 발자국이
(수작후인정) 뒤에 오는 이의 길이 될 것이다.

562) 다음번에는 반민특위위원장을 지낸 김상덕 평전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그분은 1919년 2.8 독립선언 11명 중 서명을 하고 중국에 있는 임시정부에 가서 의정원 의원, 의열단 단원을 하고 러시아에 가서 약소민족 대표단 회의 대표로 가고 만주로 가서 무장독립운동을 하고, 해방 후에 고령에서 국회의원에 당선되어 반민특위를 하다가 이승만에게 쫓겨나 북한으로 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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