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블랜더 거실
독서습관

[사회]3_소비의 역사_설혜심_2017_휴머니스트_3부_빈곤지도,수집,몸뻬,백화점,노예선,네이더(180208)

by bandiburi 2018. 2. 8.

 

위의 사진이 무엇을 나타내는지 알 수 있을까? 

 

[174] 찰스 부스(Charles Booth, 1840~1916)가 그린 영국 런던의 빈곤지도다. 그는 사회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정확한 자료와 통계가 필요하다고 믿고 오랜 기간 면밀하게 조사를 해서 무려 17권에 이르는 <런던 사람들의 삶과 노동 Life and Labor of the People in London>을 펴냈다. 

 

마치 오늘날의 항공사진을 나타낸 것처럼 리얼하다. 부자가 거주하던 지역은 황금색이고 가장 가난한 사람들이 사는 지역은 검은색이다. 통계에 의하면 19세기 후반부터 제1차 세계대전 전까지 도시에 살던 노동자 계급의 삶은 처절하다고 볼 수 있다. 수입의 절반 이상을 식비로 사용했다고 한다. 

 

[176] '과시적 소비(conspicuous consumption)'란 재력을 과시하고 명예를 획득하고 유지하기 위해 행하는 소비로, 경제학자 소스타인 베블린(Veblin)이 주창한 개념이다.  

 

[180] 노동계급에게 어디에 사는가 하는 집 다음으로 중요한 사치는 옷이었다. 특히 일요일에 교회에 갈 때 입는 옷은 매우 중요해서 주중에 있던 낡은 옷차림으로 교회에 나타난다면 무례한 일로 여겼다. 노동자들은 깃에 풀 먹인 셔츠를 입고 광나게 닦은 구두를 신는 등 '선데이 베스트(Sunday Best)'라 불리던 가장 좋은 나들이옷을 입고 교회로 향했다. 

 

[191] 기독교가 지배하던 중세 유럽에서는 교회나 수도원의 보물실에 성물과 신기한 자연물을 모아두었다. (중략) 이 보물실의 전통을 통해 르네상스 시대의 스튜디오로 studiolo라는 개인 서재 공간이 탄생했다. 

 

르네상스 시대가 되면서 수집은 점차 교회에서 벗어나 세속 군주와 귀족, 새로이 등장한 부유한 가문의 손으로 넘어갔다. 특히 축적한 부를 바탕으로 상류층의 반열에 올라선 상인 가문들은 하층민과 자신들을 구별 짓고 자기 정체성을 만들어내는 수단으로 수집에 몰두했다. 

 

[194] 그런데 갑자기 수집이 보다 더 넓은 계층으로 확대되는 일이 일어났다. 그 계기는 프랑스혁명이었다. 혁명의 와중에 몰락한 귀족들이 소장하고 있던 값진 물건들이 골동품상으로 쏟아져 나왔다. 19세기 중엽부터 금전적 가치가 세상을 지배할 것이라는 생각이 만연해지면서 엄청난 부자들이 수집에 뛰어들기 시작했다. 

 

[221] 진짜 은화는 물론 우리가 간직했다. 가짜 은화는 너무 반짝였기 때문에 유통하기 전에 미리 그리스를 바르고 손때를 묻혀 더럽게 만들어야 했다. ------ 비단과 리넨은 새것처럼 보이도록 세탁하고 다림질하는 방식이 있었다. 보석의 경우는 보통 식초로 윤을 냈다. ----- 은식기는 녹인 뒤 은덩이로 만들었다. -----장물은 런던 구석구석으로 보내졌다. 무슨 물건이든, 정말로 무슨 물건이든 깜짝 놀랄 만한 속도로 보낼 수 있었다. 

 

 이 글은 박찬욱 감독의 영화 <아가씨>의 원작으로 알려진 소설 <핑거스미스 Fingersmith>의 한 부분이다. '핑거 스미스'는 빅토리아 시대 도둑을 뜻하는 은어로, 소설 속 주인공의 직업이기도 하다. 원작자 세라 워터스 Sarah Waters는 영문학 전공자답게 철저한 고증을 바탕으로 빅토리아 시대 런던의 뒷골목을 생생하게 그려냈다. 그곳에는 그만큼 도둑이 많았다. 

 

[241] 본래 피부학자이자 매독학자였던 야다손은 베를린에 외과병원을 연 뒤 주로 코와 귀의 축소 수술을 시행했다. 귀를 수술한 이유는 당시 유대인의 귀에 대한 편견이 심각했기 때문이다. 살집이 두둑한 귓불과 크고 불그스레한 귀는 '돌출귀'라는 별명을 얻었는가 하면, 오스트리아에서는 그런 귀를 '모리츠(당시 가장 흔한 유대인 이름) 귀'라고 부르기도 했다. 

 

[242] 1930년대 나치스의 '인종 교육' 수업을 통해 아리아인과 유대인의 차이를 배우게 했다. 

 

[246] 19말 일본에서는 일본인 고유의 특성에 대한 연구라는 미명 하에 소수민족인 아이누족을 대상으로 이들의 열등함과 미개함을 부각시키는 방식으로 자료를 축적해갔다. 아이누족을 찍은 사진들은 '기념엽서'로 서구 세계에 소개되기도 했다. 

 

[255] 백화점 관계자에게 왜 노인 전문관이 없느냐고 문의했더니 대답은 두 가지로 돌아왔다. 우선, 노인은 자신이 노인임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저항 심리가 강하기 때문에 노인 전용 상품관을 만들어봤자 손님이 들지 않는다고 한다. 또 다른 대답은 대체로 사람들은 자신이 젊었을 때부터 구입해온 브랜드의 옷을 계속 입기 때문에 나이가 들었다고 해서 굳이 노인용 전문 브랜드로 바꾸지 않는다는 것이다. 

 

[283] 18세기 유럽에서 튀르크풍 드레스가 누리게 된 지위와 관련해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있다. 바로 '18세기 영국에서 가장 반짝이는 여성'으로 불리는 메리 위틀리 몬터규(Lady Mary Wortley Montagu, 1689~1762)다. (중략) 오스만튀르크 제국에 머무는 동안 몬터규는 그곳 여성들이 독자적으로 재산을 소유하고 심지어 사업을 통해 부를 축적할 수 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결혼한 여성에게서는 재산권이 아예 주어지지 않는 영국에서는 꿈도 꿀 수 없는 일이었던 것이다. 또한 튀르크 여성들이 이혼을 요구할 수 있고, 심지어 섹스를 거부할 수 있는 권리 등 일반적인 유럽 여성들이 전혀 갖지 못한 권리를 누리고 있음에 놀라게 되었다. 

 

 

[288] 튀르크풍 의상은 20세기 초 뜻밖의 운명에 처하게 된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역사상 최초의 총력전이 펼쳐지면서 후방에 있던 여성들은 남성의 영역이었던 여러 분야에 투입되었다. 영국 의회는 바지가 여성들의 작업능률을 높이는 데 도움이 된다는 의견을 받아들여 전쟁 중 여성에게 바지를 입도록 허락했다. 전쟁은 튀르크풍 바지를 하렘이나 궁정 무도회에서 끌어내 일터에 배치한 것이다. 

 

영국에서 튀르크풍 의상이 일바지가 되어버린 십수 년 후 우리나라에서도 일제가 국가총동원법(1938) 등을 제정해 전시체제를 가동하면서 여성들에게 '몸뻬(표준어는 일바지 혹은 왜바지)'를 입으라고 강요하는 일이 벌어졌다. 여학생에게까지 교복으로 강제했던 몸뻬는 일본 동북 지방 여성들이 입던 작업복이 한반도에 건너온 것이었다. 하지만 실제 그 원형은 일본 남성들의 작업복인 모모히키라고 한다. 

 

[326] 우리에게는 영화 <티파니에서 아침을>로 잘 알려진 티파니사는 어릴 적부터 친구였던 찰스 루이스 티파니와 존 버넷 영이 1837년 뉴역에 처음 세웠던 '티파니, 영 앤드 엘리스'에서 시작되었다. 처음에 문구류와 팬시상품, 골동품을 판매하는 상점이었던 티파니사는 1845년 미국 최초로 우편주문용 카탈로그를 만들어서 배포했다. 카탈로그의 표지는 결혼식과 관련 깊은 로빈새의 알 색깔인 독특한 푸른색으로 꾸몄다. 티파니의 상징이 된 그 독특한 푸른색은 '티파니 블루'라는 이름으로 알려졌고, 카탈로그에도 '블루 북'이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다. 

 

[329] 일반적으로 최초의 백화점이라고 칭했던 곳은 프랑스 파리의 봉마르셰이다. 1852년 세워진 봉마르셰는 정찰제를 도입하고, 상품 교환과 반품을 보장하는 등 근대적인 판매제도를 도입했다는 점에서 소비의 역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339] 백화점의 진열장이나 카탈로그는 사람들을 거대한 상품의 세계로 자연스럽게 인도했다. 눈앞에 펼쳐진 상품들의 파노라마는 모르고 살아도 별 상관이 없을 온갖 물건에 대한 욕구를 불러일으켰다. 이런 욕망은 사회적 지위나 계급에 관계없이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체험일 터였다. 

 

[362] 16세기 해외 팽창 과정에서 설탕 재배로 얻게 될 엄청난 수익성을 감지한 유럽은 17세기부터 서인도제도의 섬들과 브라질 등지에서 본격적으로 사탕수수 재배에 돌입했다. 사탕수수로 설탕을 생산하는 과정에서 많은 노동력이 필요했는데, 현지에서 노동력 공급이 원활치 않자 유럽인들은 아프리카에서 흑인들을 잡아들여 서인도제도의 사탕수수 재배업자들에게 노예로 공급했다. 영국은 17세기 후반에 뒤늦게 노예무역에 뛰어들었는데, 18세기 초가 되자 네덜란드와 프랑스를 제압하고 노예무역에서 독점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419] 미국의 대중이 네이더에게 열광한 이유는 여러 가지였다. 먼저, 네이더는 거대 기업과 부패한 권력에 맞서 싸우는 작고 평범한 사람으로, 미국적 정서에서 볼 때 진정한 영웅의 이미지를 지녔기 때문이다. 그래서 네이더는 남자 잔 다르크 혹은 루터라 불렸으며, 심지어 레닌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이뿐만 아니라 네이더의 독특한 캐릭터와 청교도적인 생활방식도 대중의 관심을 끌었다. 그는 초라한 하숙집에 살면서 매일 똑같은 싸구려 양복을 입고 자동차도 몰지 않았다. 평생 결혼도 하지 않고 어떤 종류의 사치나 악덕도 멀리했으며, 하루 두세 시간만 잠자면서 공익을 위해 일했다. 

 

평소에는 잘 몰랐던 소비와 관련된 사실을 알려주는 좋은 책이었습니다. 후반부에는 좀 피로감이 오긴 했지만 두 번 정도 읽는다면 충분히 흡수할 수 있다 생각됩니다. 

728x90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