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박경리는 1926년 경남 통영읍에서 태어났다. 1945년 진주여자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결혼했으나 부군은 좌익으로 몰려 한국전쟁 중에 서대문 형무소에서 죽음을 맞았다. 1955년 소설가 김동리의 추천으로 단편 <계산>과 1956년 단편 <흑흑백백>이 현대문학에 발표되면서 작가로서의 본격적인 삶을 시작한다. 2007년 7월 말 폐암이 발견됐으나 고령을 이유로 치료를 거부했다. 하지만 병세가 악화되어 2008년 4월 4일 뇌졸중 증세까지 나타나 서울아산병원에 입원했다. 입원 후 의식불명 상태에 빠져 중환자실에서 치료를 받다, 2008년 5월 5일 향년 83세로 세상을 떠났다.
이 책 <시장과 전장>은 1964년에 쓰여졌다.
<시장과 전장>을 읽으며 고 박완서 작가의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가 생각났다. 1950년 한국전쟁 시기에 서울에서 벌어진 이념이란 이름으로 자행된 살인이 얼마나 끔찍했는지 알 수 있었던 계기였다. 이 책 <시장과 전장>은 한국전쟁 전후에 한 가정 구성원에게 일어나는 비극을 마치 그 당시로 돌아간 듯한 몰입감을 주는 흡인력으로 서술하고 있다.
지영은 남편 기석을 떠나 교사생활을 하고 있었고 기석은 전형적인 인텔리로 그리고 기석의 형인 기훈은 공산주의자로 등장한다. 그리고 기훈과의 운명적인 만남과 함께 가화가 기훈의 주변을 맴돈다.
전반부에 기훈과 그 주변 인물들 사이에 벌어지는 공산주의 관련 사상논쟁은 대학시절 마르크스주의를 한창 토론하던 시대가 아닌 마당에 이해하기 쉽지 않았다.
눈부신 경제 발전의 혜택으로 물질에 대한 부족함이 거의 없는 세상을 살고 있는 대한민국에서 한국전쟁 시기의 상황을 이해하기는 어렵다. 특히나 그 시절을 겪어보지 않은 60세 이전의 세대들은 참혹한 전쟁의 모습을 상상으로만 받아들일 뿐이다. 풍족함 속에서 아직도 남보다 더 가지고 더 앞서려고 경쟁의식에 물들어 있는 우리들에게 때로는 이런 소설을 통해 현대사의 아픈 시기를 되새겨 보는 것도 좋은 성찰의 기회를 준다고 생각된다.
무엇보다 끔찍한 것은 한국전쟁시기에 서울 한복판에서 벌어진 일이다. 초기에 인민군이 서울을 차지했을 때 이승만에 의해 한강 다리가 끊어져 피난 가지 못한 사람들을 포함한 잔류한 자들 중 사상이 불순하다는 이유로 목숨을 잃었고 어떤 자들은 어쩔 수 없이 살기 위해 인민군들에게 부역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얼마 후 인천상륙작전과 함께 유엔군의 서울수복으로 피난 갔다 돌아온 자들과 국군에 의해 잔류했던 많은 사람들이 빨갱이에게 부역했다는 이유로 다시 목숨을 잃거나 투옥되어 재판을 받게 된다. 이 소설에서 지영의 남편 기석은 순수한 인텔리로 형의 공산주의를 옹호하지는 않으나 입당원서를 제출했다는 이유로 서울이 수복되었을 때 잡혀가 재판을 받는다. 결국 소설의 끝까지 그의 종적은 형무소에서 지영의 옥바라지를 받는 것으로 더 이상 등장하지 않는다.
서울에 살던 사람들의 유일한 희망은 다시 인민군이 서울로 들어오지 않고 유엔군이 만주까지 점령하고 전쟁을 끝내는 것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바람은 오래가지 않았고 중공군이 서울을 지나 남으로 내려가는 상황이 벌어지고 이번에는 사상으로 인한 끔찍한 피해를 입지 않기 위해 많은 사람이 피난짐을 싸게 된다. 지영 가족은 남자가 없이 어린아이 둘과 노모만이 있어 그대로 서울에 남아 폭격을 당하고 노모 윤 씨가 총탄에 죽음을 당하는 상황에 면하게 된다.
교사였던 지영은 점점 악화되는 상황 속에서 살아남고자 안간힘을 쓴다. 그녀의 악착같은 모습을 통해 당시를 살아갔던 우리 조부모 세대의 질곡을 다시금 생각하게 된다.
빨치산으로 남은 기훈과 장 대장의 기구한 인연, 그리고 기훈과 가화의 끊어질 듯하면서도 이어지는 인연이 빨치산을 탈출하려다 가화가 죽음을 당하게 되는 것으로 결말을 맞이한다. 남한에서 반공이 강조되던 시대를 살던 소설가 박경리 씨의 작품에서 필연적으로 결말은 정해진 거였을 것이다.
이하는 소설에서 등장하는 의미 있는 부분이다.
[240] 전장과 시장이 서로 등을 맞대고 그 사이를 사람들은 움직이고 흘러간다. 사람도 상품도 소모의 한길을 내달리며, 그리고 마음들은 그와 반대 방향으로 내달리고 있는 것이다. 사라져 가는 민심을, 사라져 가는 인민들의 불길을 억지로라도 되살리기에는 오직 승리가, 사람과 상품의 소모를 막아줄 결정적인 승리가 있을 뿐이라고 기훈은 생각한다.
[302] 자본주의 사회에 있어서 자본가에 의한 임금 노예나 공산주의 사회에 있어서 국가에 의한 빵의 노예나 뭐가 다르다는 겁니까? 인간의 상품화, 상품의 물신성을 막고 인간을 해방하려는 마르크시즘은 어디로 달아났다는 겁니까? 지금 프롤레타리아는 존재하지만 한 사람 한 사람의 노동자는 존재하고 있습니까? 사회주의 실현의 목적은 인간 해방일 겁니다. 그런데 지금 인간은 오 개년, 십 개년 계획과 사회주의 경쟁을 위한 수단으로 되고 말았단 말입니다. 절대주의와 뭐가 다르며 필연적으로 섹셔널리즘에 빠질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목적은 어떻든 운동이 모두라고 하는 생각은 충분히 검토해 볼 만한 가치 있는 거라 생각합니다. - 장덕삼이 하기훈에게 반박하는 부분
[376] 어느 권력자건 모두 그들은 선량한 백성이 공범자 되기를 원하는 가부죠. 피 묻은 자만이 열렬할 수 있단 말입니다. 피 묻은 자는 결코 그들을 배반하지 못하니까요. 공범자는 그들 자신을 위해서라도 싸우죠. 이 저주받은 땅덩이에서 애국이라는 윤리가 어떻게 성립이 되겠어요? 모두 마음속으로야 부끄러운 거예요 - 여의사가 지영에게 해주는 설명
[449] "밣혀도 밟혀도 뻗어나가는 잡초, 난 잡초야!"
지영은 우물 속을 향해 나지막하게 중얼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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