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블랜더 거실
독서습관

[역사]73_교양 한국사1-단군조선에서 후삼국까지_이덕일_2005_휴머니스트(180609)

by bandiburi 2018. 6. 9.

저자 이덕일 교수는 1961년 충남 아산 출생으로 숭실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동북항일연군 연구>로 박사학위를 취득했으며, 현재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를 직접 설립하고 소장으로 재직하고 있다. 대중에게 영향력 있는 역사저술가이지만 스스로를 재야사학자라고 자처하고 있을 만큼 정설과 거리가 먼 소수설을 주장하고 있다. 

 이덕일 교수의 벙커특강을 통해 일제식민사학이란 것이 아직도 우리가 가르치고 배우는 역사 속에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우리와 우리의 자녀들이 학교에서 주입식으로 무조건 외우는 역사가 왜곡된, 사실과 다른 역사일 수도 있다는 의문을 품게 되었다. 

중국이라는 큰 나라의 오랜 역사속에서의 영향력과 일본의 식민지배를 받았던 나라로서 우리를 가르치는 교사나 교수들이 가진 역사관이 황국사관이나 중화사관을 극복하지 못했다면 부지중에 우리의 교육 내용 중에 우리 스스로를 작게 보는 역사가 있을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정설과는 다른 소수의견을 가지고 새로운 각도에서 역사를 조망하는 이덕일 교수의 책을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 2005년에 출간한 <교양 한국사 1,2,3>권이 도서관에 있어서 먼저 1권을 읽고 올린다. 

고조선 시대부터 근현대사까지 역사를 통관해서 보기는 고등학교 시절 역사수업 이후 처음이다. 이번에는 시험을 보기 위해서가 아니라 역사를 바로 알기 위해서 본다. 

1권에서는 고조선의 위치에 대한 논쟁, 본격적인 삼국시대를 언제로 볼 것인가 기원전인가 기원후인가, 실제 삼국시대였는가 열국시대였는가, 삼한은 어디에 있었나, '왜국'의 위치가 초기부터 일본 열도였을까? 등 교과서보다 상세한 저자의 역사관이 담겨 있다.  때로는 지루할 수도 있지만 우리 중심의 역사관으로 본다는 관점에서 유익한 내용이다. 

추천도 : ★★★★★

이하 주요 내용을 발췌했다. 

<7>식민사학이 잉태한 이 비극의 씨앗은 일제 패망 후에도 죽지 않고 놀라운 생명력으로 살아남았다. 함석헌 선생이 <뜻으로 본 한국역사>에서 "얼마나 많은 역사가들이 공정한 객관적인 과학적인 역사를 쓰려다가 죽은 뼈다귀의 이름만을 적어놓고 말았나?"라고 한탄한 것처럼, 자국사를 실증주의라는 논리의 죽은 뼈다귀 이름 외우기로 전락시킨 것 자체가 이들의 생존전략이었다. 

<44> 우리 역사에서 고조선사는 살아있는 현대사다. 일제시대 식민사학자들은 고조선(단군조선)의 실재를 부인했다. 현재 대부분의 우리 역사서도 <삼국유사>에 기술되어 있는 고조선의 건국 연대를 사실상 부인하고 있다. 그리고 그 강역과 중심지에 대해서도 만주 지역으로 비정하는 견해와 한반도 내로 비정하는 견해로 갈려 있다. 이 가운데 한반도 내로 비정하는 견해는 일제시대의 식민사학자들과 맥을 같이하고 있는 것이다. 

<82> 우리 고대사에서 삼국시대는 100년에 불과했다. 삼국으로 정립되기 전에는 여러 나라가 분립하고 있는 열국시대였다. 부여가 고구려에 항복한 494년까지는 부여, 신라, 고구려, 백제, 가야의 오국시대였으며, 이후 가야가 신라에게 멸망하는 562년까지는 사국시대였다. 삼국시대는 이때부터 백제와 고구려가 멸망하는 660~668년까지로 불과 100여 년에 불과했다. 그러나 우리는 그간 삼국시대가 우리 고대사의 전부인 것처럼 그릇되이 인식해 왔다. 이런 인식 역시 일제 식민사학의 산물이었다. 

<120> 일반인들은 <삼국사기>에 기록된 대로 고구려, 백제, 신라가 기원전 1세기경부터 존재했던 것으로 인식하고 있지만 한국 사학계는 이를 부인하는 것이 정설이다. 한국 사학계는 일제시대 식민사학자들이 고안한 '삼국사기 초기기록 불신론'에 따라 <삼국사기>의 초기기록은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김부식의 창작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고구려 역사는 제6대 태조왕(재위 53~146) 때에 이르러서야 역사적 사실로 믿을 수 있고, 백제는 제8대 고이왕(재위 234~286) 때, 신라는 제17대 내물왕(재위 356~402) 때에 이르러서야 사실로 믿을 수 있다는 것이다. <삼국사기>의 신라, 고구려, 백제의 건국 순서가 고구려, 백제, 신라로 뒤바뀐 연유 또한 식민사학자들의 '삼국사기 초기 기록 죽이기'에 기초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아직도 식민사학의 시대에 살고 있다. 

<144> 일반적으로 청동기시대가 되면 생산력의 발달에 따른 잉여 생산물의 소유를 둘러싸고 계급이 발생한다. 이 잉여 생산물을 소유한 쪽이 지배계급이 되고 그렇지 못한 쪽이 피지배계급이 된다. 즉, 고조선에서는 전쟁에 의한 포로나 사회 분화 등에 의해 노비계급이 이미 발생했던 것이다. 

<145> 고조선의 8조 법금은 지배계급이 사회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엄격한 법률과 그것을 강제로 유지할 수 있는 형벌 수단을 갖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178>금관가야의 시조 김수로왕이나 허황후의 등장 과정이 극적인 구성을 띠고 있어 가야사에 대한 의문은 더욱 증폭되고 있다. 이들은 과연 어디에서 온 것일까? 가야사는 금관가야 왕실의 후손 김유신이 삼국 통일의 주역이 되고 그 핏줄들이 문무왕 이후 신라 중대의 왕실을 장악하기 때문에 더욱 중요하기도 하다. 

<321> 발해는 만주의 광대한 영토를 차지했으나 발전을 위해서는 핵심 영토인 요양 지역을 장악하고 나아가 요서 지역을 차지해야 했었다. 그러나 이런 노력 대신에 만주 동북부의 광대한 영토에 만족했다. 즉 발해가 현실에 안주하는 동안 세력을 길러 요양 지역을 차지하고 동진한 거란에게 멸망하고 말았던 것이다. 역사에서 진취성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말해주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340> 신라는 삼국 통일을 이룩했으나 통일 후 사회 통합에 대한 전망을 마련하지 않았다. 확장된 영토와 늘어난 인구는 그에 걸맞은 사회체제를 요구했지만 신라의 지배층은 이런 요구를 외면했다. 예 백제, 고구려 유민들을 신라 사회 내로 흡수하기 위해서는 보다 개방된 사회체제가 필요했으나 신라 지배층은 오히려 진골의 특권을 강화하는 폐쇄적인 방향으로 나아갔다. 그 결과 신라는 백제, 고구려 유민들의 마음을 잡는 데 실패했고, 여기에 덧붙여 진골귀족 내부에서 치열한 권력 다툼을 벌임으로써 총체적으로 붕괴되어 갔다. 

<353> 자기 혁신의 시기를 놓친 결과 신라 사회는 만인에 의한 만인의 투쟁시대로 접어들었다. 그 전면에 선 세력이 호족과 농민들이었다. 새로운 전국시대인 후삼국시대에 돌입했던 것이다. 

 

728x90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