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습관을 위해 지난 6년간 미술 작품을 소개한 책을 여러 권 읽었다. 그래서 읽기 전부터 이번에 만난 <나의 서양미술 순례>는 어떤 작품을 어떤 식으로 소개할지 궁금했다. 제목만 다른 책에서 추천받았는데 저자가 '서경식'이라는데 놀랐다. 그의 안타까운 가족사를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책 <소년의 눈물>을 2022년에 읽고 놀랐다. 그의 형 서준식의 책 <서준식의 옥중서한>도 그 해 여름에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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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서양미술 순례>는 저자 서경식이 1983년 처음으로 유럽의 여러 미술관을 방문하며 만났던 작품과 그에 대한 감상을 소개한다. 동시에 부모님을 잃은 슬픔을 극복하던 자신의 심정과 가족사에 대한 소회도 곧곧에 흩뿌려놓았다. 그래서 이 책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미술 작품에 대한 호기심에 앞서, 그의 가족사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책의 말미(219페이지)에 관련된 내용이 요약되어 있다.
일제 식민지 시대에서 해방되었지만 일본에서 생계를 유지하던 부모, 그리고 일본에서 태어났지만 대한민국 국적을 포기하지 않은 자녀들의 굳건한 모습을 볼 수 있다. 두 형은 서울대학교로 유학을 와서 민족의 근원을 찾으려 했다. 하지만 정치적인 이유로 두 형은 감옥에서 17년, 19년을 보냈다. 그 사이 두 부모님은 사망하게 된다. 그 직후에 유럽으로 미술 순례를 떠난 것이다.
미술작품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이 책에서 처음 접하는 작품이 여러 편 등장한다. 대부분의 유럽 미술관에는 수많은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 그래서 관광을 목적으로 들리면 시간적 제약으로 유명하다는 작품 위주로 스쳐지나간다. 하지만 저자는 몇 달에 걸쳐 여러 미술관을 방문했다. 그리고 자신에게 깊은 인상을 준 작품을 소개한다. 사람들이 많이 찾지않는 미술관에서 만난 작품들이다. 독자도 자세히 들여다보게 된다. 그리고 저자와 함께 생각한다. 그 점에서 이 책의 매력이 있다.
우리의 근현대사를 돌아보게 하는 책이면서 유럽으로 미술관 여행을 떠나고 싶게 만드는 책이다. 역사와 미술에 관심이 있는 분들에게 충분한 감흥을 줄 것이라 확신한다.
번역에 대해 한 가지 언급할 것이 있다. 일본어를 한국어로 번역하면서 우리에게 익숙한 용어를 사용하지 않았다. 예를 들면, '프랑코'라고 번역하는 게 일반적인데, '프랑꼬'라고, '파리'를 '빠리'로, '나치'를 '나찌'라고 번역했다. 처음에는 독자에게 어색하게 다가오는 부분이다. 일반적인 용어가 더 좋다고 생각한다.
1937년 4월 26일 나찌스 독일의 공군은 프랑꼬파를 지원하기 위하여 바스끄 지방의 소도시 게르니까에 무차별 폭격을 감행하여 시민 수백 명을 학살했다. 희생자가 2천 명을 넘는다는 설도 있다. 빠리에 있던 피카소는 이 학살 소식에 격분하여 파리 박람회를 위해 스페인공화국 정부가 그에게 의뢰해놓고 있던 벽화에 이 <게르니카 Guernica>를 그렸다. (87)
생각해볼 필요도 없이 위대한 예술은 동시에 위대한 선전물이다. 거의 2세기 전에 그려진 한 장의 그림이 작가하고는 아무런 인연이 없는 극동의 한 나라의 관헌들로 하여금 자국에서 매일같이 일어나고 있는 부당하고도 잔혹한 일들을 연상케 하고, 그래서 불안한 기분을 일으키게 했다고 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이 그림의 위대함을 증명하는 일에 다름 아니다. (98)
위의 사진을 출소한 형에게 선물하기 위해 일본에서 한국으로 가지고 들어오다 공항 세관에게 불순한 의도로 오해를 받았던 경험을 이야기한다. 1990년 민주화 이후였다. 하지면 여전히 한국의 민주주의는 개인의 사상을 검열하고 있었다.
대불전쟁 중이던 1812년, 스페인의 의회는 계몽주의 자유주의에 입각하여 주권재민, 입헌군주제, 표현의 자유, 종교재판의 폐지 등을 규정한 까디스헌법을 제정했다. (...) 그러나 1814년에 전쟁은 끝났으나, 복귀한 국왕 페르난도 7세는 까디스헌법의 승인을 거부하고 종교재판을 부활해 자유주의자를 탄압했다. 고야 자신도 한때는 종교재판소에 고소되기도 했다. 민중의 희생과 저항은 '외압'에 대한 승리를 가져왔으나 그것은 반동을 동반하고 온 것이다. (104)
진보는 반동을 부른다. 아니 진보와 반동은 손을 잡고 온다. 역사의 흐름은 때로 분류가 되지만 대개는 맥 빠지게 완만하다. 그리하여 갔다가 되돌아섰다가 하는 그 과정의 하나하나의 장면에서 희생은 차곡차곡 쌓이게 마련이다. 게다가 그 희생이 가져다주는 열매는 흔히 낯 두꺼운 구세력(舊勢力)에게 뺏겨버리는 것이다. 하지만 헛수고처럼 보이기도 하는 그런 희생 없이는 애당초 어떠한 열매도 맺지 않는 것이다. 그것이 역사라고 하는 것이다. 단순하지도 직선적이지도 않다. (108)
이 문장은 '비상계엄'을 선포한 2024년 12월 3일의 대한민국에 꼭 맞는 문장이다. 경제적 성장과 정치적 민주화를 이룬 대한민국이다. 다른 나라에서 부러워할 만한 성과를 거두었다. 하지만 이러한 진보에는 늘 반동이 도사리고 있다. 상식이 통하지 않는 시대는 개인의 자유와 평화보다는 소수의 특권이 우선시 된다. 위험한 반동의 시대로 접어들 수 있는 것이다. 깨어있는 시민들의 희생을 통해 진보는 이어진다.
일반적으로 19세기 프랑스 미술사는, 들라크루아(Delacroix), 꾸르베(Courbet), 밀레(Millet), 도미에(Daumier), 마네(Manet) 모네(Monet) 나아가서 고갱(Gaugin)이나 고흐 같은 선구적 반역자들과, '쌀롱'을 근거로 하는 권위주의적이고 공식적인 아카데미즘 화가들, 곧 뽕삐에들과의 투쟁의 역사로 이해된다. 보나는 오로지 그러한 뽕삐에의 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말하자면 미술사상의 적방(敵方)인 것이다. (119)
그 시대의 건축이나 예술이 야만족 고트(Goth)에서 연유함으로써 경멸의 뜻이 담겨 있는 '고딕'(Gothic)'이란 명칭을 갖게 된 것은, 저 속악(俗惡)하고 수다스럽기 이를 데 없는 베르싸유궁전이 세워진 루이 14세 시대 이후의 일이었다. 그 뒤 르네쌍스, 바로끄를 거쳐 근대에 이르기까지 조각은 진보했다고 할 수 있을까. 아니 도대체 예술의 진보란 어떤 것인가 (155)
'고딕'이란 용어의 유래를 알려준다. 건축이나 예술, 문화는 그 시대를 반영한다. 시대를 교차해서 비교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중세에는 화가가 작품에 서명하는 일이 드물었다. 그들은 예술가라기보다는 직인(職人)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르네쌍스에 들어와서 화가의 개성이 중요시되자 차츰 서명이라는 관습이 일반화된다. 얀 반 에이크의 <아르놀피니의 결혼>의 화면 중앙, 유명한 볼록거울 윗부분에는 '얀 반 에이크 여기 있음 1434'라고 판독되는 글귀가 있다. (171)
서양에서 그림에 화가들이 서명을 하기 시작한 시점을 알려준다. 돈을 대주는 사람의 주문에 따라 그리는 직인의 위치에서는 자신의 서명이 없었다는 사실을 이해하게 되었다. 종교와 직업에 매몰된 사회에서 개인과 개성이 중요시되는 사회로의 진보의 일면이다.
15세기라는 시대에 있어서만큼 사람들의 마음에 죽음의 사상이 무겁게 짓누르고, 강렬한 인상을 지속적으로 부여한 시대는 없었다. 'memento mori' (죽음을 생각하라)의 외침이 삶의 모든 국면에 끊임없이 울려퍼지고 있었다. (호이징가, <중세의 가을>) (193~194)
늘 죽음을 생각하며 살아갈 때 겸손할 수 있고, 현재에 충실할 수 있고, 만족하며 행복할 수 있다. 죽음이 주변에서 서성이던 시대와는 완전히 다른 시대를 산다. 그 자체가 얼마나 큰 행복인가.
아래는 저자 서경식의 가족사에 대한 글이다. 저자의 상황을 이해할 수 있어 인용했다.
형들 중의 둘째와 셋째는 1960년대 말. 단절되어 있던 우리와 고국 동포들과의 고리를 회복하기 위해 유학생으로서 잇따라 귀국을 했는데 1971년, 군사독재정권의 감옥 속에 갇혀버렸다. 조사를 받는 중에 입은 큰 화상, 사형선고, 사상전향을 강요하는 잔혹한 고문, 생명을 건 옥중에서의 장기 단식투쟁 등 그때까지는 상상했을 뿐이었던 일들이 차례로 현실화하였다. 그것이 조국의 현실이었다. 그러한 방법으로 우리 일가는 일이 일어날 때마다 허겁지겁 허둥거리면서도 다시금 조국의 동포들과 운명을 함께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무려 10년 가까이나 면회와 차입을 위해 감옥을 들락거리신 어머니는 1980년, 자궁암의 재발로 세상을 떠나셨다. 아버지 또한 대장암으로 어머니께서 가신 3년 뒤에 떠나셨다. 양친 모두 옥중의 형들이 다시 자유의 몸이 되는 모습을 보지 못하셨다. (208)
1988년 5월, 17년간의 옥중생활을 마친 셋째형이 출옥하고, 그 직후에는 나 지신도 아직 옥중에 남아 있는 둘째 형을 면회할 겸해서 한국 왕래를 하게 되었다. 그런 지 2년 후인 1990년 2월 말 둘째 형도 19년간의 옥중생활을 끝내고 출옥했다. 두 형이 모두 출옥함으로써 우리 일가를 짓누르고 있던 운명은 하나의 구획을 지은 셈인데, 돌이켜보건대 잃은 것은 너무나 많고 또한 조국의 분단상태를 비롯하여 이러한 운명을 초래한 구도의 근본이 아직 고쳐지지 않고 있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러한 의미에서 본다면 20년의 세월이 흐른 뒤에도 우리들이 아직 평안을 누리지 못하는 게 차라리 당연하다 하겠다. (209)
33세 되던 1983년에 처음으로 외국나들이에 나선 저자가 그해 10월 15일, 벨기에의 소도시 브뤼주의 흐루닝헤 미술관에서 헤랄드 다비드의 그림 <캄비세스왕의 재판> 앞에 우뚝 선 채 움직이지 못하고 있을 때, 그의 가냘픈 두 어깨 위에는 저 망국의 설움에서부터 식민지시대와 해방 분단 그리고 6.25 동족상잔과 4.19, 5.16을 거쳐, 10월유신과 10.26, 12.12, 5.18로 이어진 악몽의 터널을 지나 그 어머니, 아버지의 죽음까지에 이른, 우리 근현대사의 모든 질곡과 결코 순탄할 수 없었던 자신의 가족사가 한데 엉켜서 몽땅 지워져 있었던 것이다. (219)
독서습관 987_나의 서양미술 순례_서경식_2017_창비(241220)
■ 저자: 서경식
1951년 일본 교토에서 재일조선인 2세로 태어나, 와세다대학 프랑스문학과를 졸업했다. 2000년부터 토쿄케이자이대학 현대법학부 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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