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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습관

[986]모차르트_관습과 18세기 현실을 극복하며 자유 예술가를 추구한 천재

by bandiburi 2024. 12. 16.

 '모차르트'라고 하면 우리는 음악의 신동이 떠올린다. 음악의 천재이기에 그에게 음악에 관한 모든 것이 쉬웠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영화 <아마데우스>에서 모차르트의 특이한 웃음과 괴짜 같은 모습을 떠오른다. 하지만 이 책 <모차르트>는 그에 대한 우리의 편견을 바로잡아준다. 그냥 만들어지는 천재는 없다.

모차르트는 잘츠부르크에서 부악장으로 일하던 아버지로부터 일찍이 음악교육을 받았다. 피아노와 바이올린 등의 악기소리가 늘 들리는 가정환경이었다. 체계적으로 아들에게 음악을 가르친 아버지의 역할이 천재의 등장에 큰 기여를 했다. 물론 모차르트는 음악에 대한 뛰어난 감각이 있었다. 이를 알아본 아버지는 이 신동을 이용해 순회공연을 다니며 돈을 벌었다. 그리고 조그만 잘츠부르크를 떠나길 원했다. 그러나 아버지는 잘츠부르크를 벗어나지 못했다.

모차르트는 달랐다. 그는 아버지처럼 궁정에 속한 노예와 같이 살면서 잘츠부르크에 살고 싶지 않았다. 가족과 함께 대도시를 순회공연을 하며 파리, 빈 등을 접했다. 그래서 자신의 꿈은 도시에서 일자리를 얻어 자립하는 것이었다. 과감하게 잘츠부르크의 일자리를 사직하고 대도시로 향했다. 도시에서의 일자리가 모차르트를 기다리고 있지 않았다. 그의 의도대로 쉽게 얻어지지 않았다. 20대가 넘어 더 이상 신동이 아닌 모차르트의 삶은 어려웠다. 하지만 그런 환경 속에서 자유 예술가로서 모차르트는 <돈 조반니> <피가로의 결혼>과 같은 위대한 곡들을 창조했다. 

영국과 프랑스와 같이 중앙집권적인 국가에서는 음악가의 일자리가 적지만, 독일과 이탈리아와 같은 분권화된 국가에서는 여러 곳에서 일자리를 얻을 수 있었다는 점이 흥미로운 부분이었다. 예술가들이 후원자를 만날 기회가 더 많은 곳에서 더 활성화될 수 있는 법이다.

이 책에서 얻은 소중한 지식이라면 모차르트와 베토벤의 삶을 비교하는 부분이다. 모차르트는 누군가에게 지시에 따라 음악을 하는 게 아니라 자유 예술가로서의 삶을 추구했다. 18세기 부유한 시민들이 증가하며 개인적으로 음악을 추구할 여력이 되는 사람들이 증가했다. 그들은 자유예술가로서의 삶을 살아가는 환경을 조성했다.

안타깝게도 1756년에 태어난 모차르트는 그런 환경을 충분히 누려보지 못하고 1791년에 35세로 단명했다. 하지만 그보다 14년 뒤인 1770년에 태어난 베토벤은 그런 자유예술가로서의 삶을 마음껏 누리고 1827년에 사망했다. 베토벤은 자신의 생각을 자유롭게 작곡으로 옮길 수 있었다. 두 사람은 동시대인이면서도 14년의 차이는 자유 예술가로 살기에는 차이가 컸다.   

진정한 모차르트의 삶을 알고 싶은 분들에게 추천한다. 태어날 때부터 천재는 없다.

아래는 책에서 남기고 싶은 문장들이다. 

프란시스 1세와 마리아 테레지아 앞에서의 모차르트_1762년 10월 13일(출처: Wikimedia Commons)


좀더 일찍 중앙집중화된 국가들, 특히 프랑스와 영국에서는 17세기부터 권력과 부 그리고 문화적 비중에 있어서 다른 귀족 가문들을 훨씬 능가하는 중앙 궁정이 발달했던 반면 독일과 이탈리아는 일일이 셀 수 없을 정도로 무수한 궁정들, 궁정을 지향하는 도시 지도자층들로 분열되어 있었다. (...) 이 주권 통치 지역들 대부분에서 절대적으로 통치하는 지배자는 관료 조직을 유지하고 있었는데, 거기에 빼놓을 수 없는 체면 유지의 수단으로써 고용 음악가들로 구성된 소규모 관현악단이 있었다. 이러한 다양성이 독일과 이탈리아 음악계의 특징인 것이다. (40~41)

다시 말하면 그는 바로 이들의 인정을 받고 싶어했고, 자신의 음악적 업적으로 동급의 인간으로 대우받기를 원했다. 이러한 이중성은 무엇보다도 궁정의 고용주를 격렬히 거부하면서도 동시에 독립한 '자유 예술가'로서 주로 궁정 귀족으로 이루어진 빈 청중의 호감을 사려했다는 데서 표출된다. (52)

베토벤은 모차르트보다 15년 늦은 1770년에 태어났다. 모차르트가 헛되이 추구했던 것을 베토벤은 (...) 별 힘 안 들이고 얻을 수 있었다. 즉 궁정 귀족의 후원에 대한 의존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고 그래서 곡 의뢰인의 관습적 취향보다는 자기 자신의 목소리를 담은 (...) 곡들을 작곡할 수 있었다. 베토벤만 해도 이미 음악 청중에게 자신의 취향을 강요할 수 있었다. 그는 모차르트와는 달리 사회적으로 힘 있는 고용주나 의뢰인을 위해 아랫사람이나 하인으로서 음악을 생산해야만 하는 사회적 속박을 벗어날 수 있었고, 생애의 대부분을 자유 예술가로서 미지의 청중을 위해 창조할 수 있었다. (59)

모차르트가 파리나 독일 도시들에서 궁정 귀족 특권층의 지배권에 시민 계급이 저항하는 기미를 감지하지 못했을 것 같지는 않다. 그의 아버지는 결국 마지못해 자신에게 주어진 사회적 운명에 순응했던 반면 - 그의 세대 음악가들에게는 귀족적 질서로부터 도피할 수 있는 길이 열려 있지 않았기 때문에 - 아들은 그래도 탈출의 희망을 가질 수 있었던 세대, 음악가로서 고정된 자리 없이 자력으로 생활해갈 수 있다는 소망이 반드시 허황되지만은 않았던 세대에 속했다. (66)

어린 모차르트 (출처: PICRYL)

이 이원론은 현재의 발전 수준에서는 자신의 동물성을 제대로 극복하지 못했다는 문명인의 거듭된 확인과 성찰에 다름아니다. 천재의 이상적 이미지는 각자가 자신의 정신성을 지키기 위해 육체성에 대항하여 전투를 벌이는 군대의 동맹자가 되는 것이다. 사람들은 싸움터를 이동시켰다. 이런 식으로 천재의 특성으로 여겨지는 비밀과 그의 비천재적 인간성을 각각 다른 서랍 속에 넣어두는 이분법은 바로 유럽 사상계에 깊이 자리한 비인간적 측면을 표현한다. (76)

과거 사람들은 인간 모차르트를 천재의 이상형에 들어맞도록 이상화하려 했다. 오늘날 우리는 예술가 모차르트를 일종의 초인으로, 인간 모차르트에 대해서는 가벼운 경멸감을 가지고 다루려는 경향이 있다. 이는 그에게 합당치 못한 평가이다. (90)

모차르트는 아주 어린 유아기에 이미 자신이 사랑을 받는지 확신하지 못하고 불안해졌던 것 같다. 사랑받지 못한다는 느낌은 세월이 흘러가면서 여러 경험을 통해 항상 재확인되었고, 사랑받고 싶다는 것은 그의 생애 내내 지배적인 소망이었다. (...) 어린 모차르트는 사람들이 자신을 좋아하는지 확인하려 했고, 자신의 욕구가 채워지지 않으면 드러내놓고 슬픔과 절망을 표현했다. (98~99)

그가 세 살 때부터 시작한 체계적 수업은 이런 인상을 더욱 강화시킨다. 그것은 아버지가 직접 편찬한 악보에 따라 규칙적으로 연습하는 엄격한 수업이었다. (...) 영리하고 용의주도한 사람이었던 만큼 레오폴트 모차르트는 그와 가족들에게 열려 있는 기회가 어떤 것인지 즉각 알아차린다. 아버지이자 친구, 스승이자 매니저로서 그는 그때부터 자신의 삶을 자식에게 바친다. (112)

소년 모차르트 (출처: creazilla)

그는 아마 태어나는 첫날부터 음악적 자극, 즉 바이올린과 피아노의 변화하는 음열에 노출되어 있었을 것이다. 그는 연습하고 실력을 연마하는 아버지와 누이 그리고 다른 음악가들의 연주를 들었을 것이다. 이런 환경에서 그가 일찍부터 음의 차이에 대한 높은 감수성과, 트럼펫의 탁한 소리를 오랫동안 못 견뎌했던 그 섬세한 음악적 양심을 키울 수 있었다는 것은 그리 놀라운 사실이 아니다. (116)

루소를 생각해보자, 루소는 일찍이 고향 제네바의 소시민적 환경을 박차고 나온다. 프랑스에서 그보다 훨씬 나이 많은 귀부인이 그를 받아들인다. 그녀는 그의 애인이 되고 프랑스령 스위스에서 온 다듬어지지 않은 이 청년을 궁정적 의미에서 문명화시킨다. 베니스에서의 일 년, 그리고 파리에서 궁정의 재정 담당 관리들과의 교류가 그를 이 방향으로 교육시킨다. 파리 살롱 사람들은 이 명백한 인재에게 기회를 주는데, 그것도 그들이 싫증 나지 않는 한, 또 그의 행동거지가 조금도 어색함 없이 자기 집단의 감정 및 행동 규범과 일치하는 한 그러했다. 문필가로서 루소는 그 사회의 지배 규범에 저항했던 대안 운동의 대표자 중 한 사람이다. 그가 궁정 집단과 개인적으로 친분이 없었다면 그의 작품들이 그곳에 수용될 수 있었을지는 의문이다. 직접 그들과 교류하면서 그는 일종의 '세련미'를 갖추고 있었다. 이것이 없었더라면 근본적으로 이 세련미의 거부를, 좀 더 단순하고 '자연적인' 인간생활의 장점을 찬양했던 그의 저서들이 성공하기는 상당히 어려웠을 것이다. (135)

1673년 이래 파리에서 상연된 이탈리아 희극과 프랑스 무언극의 전형적 인물. 얼굴에 하얀 분칠을 하고 느슨한 의상을 입고 등장하며 몽상적이고 침울한 하인 역할을 맡아서 한다. 페트루쉬카는 러시아의 피에로다. (143)

모차르트 가족 (출처: creazilla)

모차르트는 음악에 있어서 왈가왈부 간섭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다. 그는 젊었고 꿈에 가득 차 있었지만 세상 물정에는 어두웠다. 사람들은 그가 하는 대로 내버려 두었다. 그건 결국 그리 중요한 문제는 아니었으니까. 그러나 상근직을 구하는 사람이 자신의 음악적 이념을 고집하는 것은 결코 추천할 만한 사항은 아니었다. (162)

그가 1781년의 비판적인 상황에서 군주와 궁정의 직속상관과 아버지, 간단히 말해서 잘츠부르크의 연합 세력의 압력에 저항할 수 있는 힘을 가지지 않았더라면, 그는 훗날 '천재'의 반열에 자신을 세워놓는 그런 작품들을 창작할 수 있었을까? (176)

동시에 그는 인간의 음성만을 듣고 공감하는 데에는 익숙하지만 관현악의 반주에는 낯설어하던 궁정 사회를 당혹하게 만들었다. 다시 말하면 모차르트는 오케스트라에게도 무언가 말할 것을 부여했지만 청중은 그것을 듣지 않았던 것이다. 그들은 단지 "너무 많은 음"을 들었을 뿐이었다. (184)

주요 이유들 가운데 하나는 독일 문학의 발전이 독일어로 말하는 중산 계급 독자층의 부상과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이에 반해 모차르트가 살았던 시대의 음악의 발전은 궁정의 취향에 의해 결정되었다. 모차르트의 개인적 태도는 자신의 환상의 흐름에 충실하려 하고 자신의 예술가적 양심의 자기 통제에 따르려 했던 '자유 예술가'적 태도였던 반면, 생계 수단은 전적으로 궁정 귀족의 손에 달려 있었다는 사실이 그의 비극적 삶의 가장 중요한 원인이 된다. (196)

우리가 모차르트 개인의 천재성을 너무 지나치게 강조한다면, 기존의 관습과 사회관계는 오직 장애물로만 생각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공기의 압력은 비둘기의 비행을 어렵게 하는 듯이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것을 가능하게 한다"는 칸트의 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예술의 창조적 표현은 관습의 형태에 맞서는 저항에도 '불구하고'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저항 '덕분에' 완성되는 것이다. (212)


독서습관 986_모차르트_2007_문학동네(241219)


■ 저자: 노베르트 엘리아스 (Norbert Elias, 1897~1990)

20세기 사회학을 이끌어온 노베르트 엘리아스는 1897년 독일 브레슬라우에서 태어나 브레슬라우 대학에서 의학과 철학을 공부했으며, 1924년 <이념과 개인>이라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유대인이었던 그는 나치 정권의 탄압을 피해 파리, 영국 등지에서 망명생활을 했으며, 이 과정에서 대표적 저작 <문명화 과정>(1939)를 출간했으나 시대의 질곡으로 인해 빛을 보지 못했다. 1969년 그의 주요 저작들이 복간되면서 독일과 네덜란드, 프랑스 등지에서 본격적으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일상생활에 대한 미시적 분석과 사회변동에 대한 거시적 분석을 설득력 있게 통합해 낸 그의 문명이론은 파슨스 이후 정체된 사회학계에서 새로운 방향타를 제시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1975년 독일 사회학회에 의해 명예회원으로 추대되고 1977년 아도르노상을 수상하는 등 현대사회학의 거장으로 확고히 자리를 굳혔다. 저서로는 <문명화 과정>, <궁정 사회>(1969), <죽어가는 자의 고독>(1982), <인간의 조건>(1985), <사회 참여와 거리두기>(1987)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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