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도살장>은 전쟁이 살아남은 자들에게 어떤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기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저자가 경험했던 제2차 세계대전 포로의 경험이 바탕이 되었다.
주인공은 검안사 빌리다. 빌리는 전쟁에서 포로로 잡혔지만 생존했다. 부유한 집안의 딸과 결혼해 넉넉한 삶을 살았다. 아들과 딸을 낳아 평범해 보이는 가정을 이뤘다. 비행기 추락사고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두 명에 속했다. 운 좋은 사람이다. 병원에서 회복하는 동안 아내가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빌리는 딸의 도움을 받았다. 빌리는 때때로 비행접시를 타고 먼 우주로 향한다. 외계인에게 납치되어 지구에서 멀어진다. 외계인들에게 동물원 원숭이처럼 전시되는 벌거벗은 인간이 된다.
이런 이야기들이 시간과 공간을 넘나들며 뒤섞여 등장한다. 독자는 혼란스럽다. 마치 전쟁의 후유증으로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빌리의 머릿속으로 독자가 직접 들어가 있는 느낌을 준다. 빌리는 1940년대 전쟁포로로 잡혀 드레스덴에서 머무는 중 폭격을 맞는다. 이 폭격으로 드레스덴은 거의 초토화되고 자신과 함께 지하로 대피한 미군 포로 100명은 살아남는다. 1960년대 현재로 돌아와 딸의 도움을 받는 정신이 온전치 못한 연약한 존재로 등장한다. 다시 1950년대 결혼을 하던 시기로 간다. 그러다가 깜박 잠이 들면 다시 외계인의 포로가 된 자신을 본다.
<제5도살장>이란 제목처럼 외계인에게 납치되어 전시되는 인간, 빌리를 통해 전쟁이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얼마나 무시했는지 보여준다.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짐승과 같은 인간은 소모품처럼 변했다.
전쟁 속에서 죽음에 대한 공포가 인간을 압도한다. 그래서 죽음을 면할 수 있다면 어떤 환경이든 감수한다. 그중에 깊은 충격을 준 한 장면이 있었다. 빌리를 포함한 미국 포로들이 독일군에 의해 기차로 이송될 때의 장면이다. 비좁은 객차 안에서 많은 사람이 며칠을 갇힌 상태로 머물러야 했다. 그 안으로 음식이 들어가고 배설물이 밖으로 나온다. 환기구 근처에 위치한 빌리가 헬멧에 담긴 배설물을 밖으로 버리는 역할을 한다. 상상만 해도 그 악취와 불결함은 최악이다. 삶과 죽음을 가르는 전쟁터에서 그런 환경은 죽음보다 나은 것이다.
빌리를 통해 새로운 각도에서 전쟁을 보게 만드는 책이다. 아래는 책에서 남기고 싶은 문장을 인용한다.
빌리는 눈을 감았다. 눈을 뜨자 다시 제2차세계대전으로 돌아와 있었다. 부상당한 랍비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있었다. 독일인이 그의 발을 걷어차며 일어나라고, 이동해야 한다고 말했다. (79)
바깥을 어슬렁거리는 경비병들에게 각 칸은 먹고 마시고 환풍구로 배설하는 하나의 유기체가 되었다. 그 유기체는 환풍구를 통해 말했고 가끔 고함을 지르기도 했다. 물과 검은 빵과 소시지와 치즈가 안으로 들어가고, 똥과 오줌과 말이 밖으로 나왔다. 그곳의 인간들은 철모에 배설을 하고, 철모는 환풍구 옆에 있는 사람에게로 건네지고, 그 사람들이 그것을 버렸다. 빌리가 버리는 담당이었다. (...) 음식이 들어오면 인간들은 조용해지고 신뢰로 가득해지고 아름다워졌다. (94)
지구를 떠나는 비행접시의 엄청난 가속 때문에 빌리의 자는 몸이 비틀리고, 얼굴이 일그러졌다. 빌리는 시간에서 떨려나와, 다시 전쟁으로 돌아갔다. 그가 의식을 회복한 곳은 비행접시가 아니었다. 유개화차를 타고 독일을 다시 가로지르고 있었다. (102)
로즈워터는 빌리보다 두 배는 똑똑했지만, 그와 빌리는 비슷한 방식으로 비슷한 위기에 대처하고 있었다. 그들 둘 다 인생이 의미 없다고 생각했는데, 그것은 부분적으로는 전쟁에서 본 것 때문이었다. 예를 들어 로즈워터는 독일군 병사라고 오인하여 열네 살짜리 소방수를 쏘았다. 뭐 그런 거지. 빌리는 유럽사 최대의 학살을 보았는데, 그것은 드레스덴 폭격이었다. (131)
빌리는 담요 밑에서 밖을 살폈다. 이제 약혼녀가 거기에, 면회객 의자에 앉아 있었다. 이름은 발렌시아 머블이었다. 발렌시아는 일리엄 검안학교 소유주의 딸이었다. 부자였다. 먹는 것을 멈추지 못했기 때문에 몸도 집만큼 컸다. 지금도 먹고 있었다. (...) 빌리는 못생긴 발렌시아와 결혼하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그의 병의 증상 중 하나였다. 그녀에게 다이아몬드 반지를 받아달라고, 평생 동반자가 되어달라고 간청했을 때 그는 미치는 줄 알았다. (138~139)
미국인 출신으로 독일 선전부에서 출세한 사람이 쓴 것이었다. 그의 이름은 하워드 W. 캠벨 주니어였다. 그는 나중에 전범으로 재판을 기다리던 중 목을 매어 자살한다. (163)
아, 여러분은 폭탄 걱정은 할 필요가 없을 겁니다. 드레스덴은 국제법으로 보호받는 비무장 도시거든요. 방비를 하지도 않고, 군수산업도 없고, 이렇다 할 규모의 병력이 모여 있지도 않습니다. (184)
"드레스덴은 1945년 2월 13일 밤에 파괴되었어." 빌리 필그림은 이야기를 시작했다. "우리는 다음날 대피소에서 나왔지." (...) 담장 기둥이 모두 사라진, 지붕과 창이 사라진 가축 우리 이야기를 해주었다. (...) 건물들은 무너졌다. 목재는 타버리고, 석재는 무너져내려, 서로 부딪치며 굴러 떨어지다 마침내 밑에서 맞물리면서 낮고 우아한 곡선을 그리고 있었다. "달 표면 같았어." 빌리 필그림이 말했다. (223)
"미국인이 마침내 드레스덴 이야기를 듣게 되었어." 럼포드는 공습 23년 뒤에 그렇게 말했다. "이제 많은 사람들이 드레스덴이 히로시마보다도 훨씬 심각했다는 걸 알고 있어. 그러니 나는 내 책에 그 일에 관해 뭔가 집어넣을 수밖에 없었어. 항공대의 공식적 관점에서 보자면 완전히 새로운 내용이 될 거야." (237~238)
작가는 실제로 유럽에서 독일군에게 포로로 잡혀 드레스덴의 도살장을 개조한 수용소 - 제5도살장 - 에 끌려갔다가 1945년 2월 13일부터 15일까지 이뤄진 연합군의 공습을 경험했고, 고기 저장소에 피신한 덕분에 살아남았다. (267)
<제5도살장>을 비롯해 그의 여러 작품에 등장하는 무명의 과학소설가 킬고어 트라우트는 사실 이 시기의 작가 자신을 깎아내리고 희화한 인물이라고 볼 수도 있다. 실제로 보니것의 첫 장편 <자동 피아노>는 미래 세계를 배경으로 했기 때문에 어떤 비평가는 이 작품을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와 비교하기도 했다. 보니것 자신도 헉슬리의 영향을 인정했으며, <1984>를 쓴 조지 오웰을 가장 좋아하는 작가로 꼽기도 했다. (268)
https://bandiburi-life.tistory.com/613
이렇게 드레스덴은 베트남이라는 등식, 작가는 화자이고 화자는 곧 빌리와 다름없다는 등식에 균열이 생기면서 우리는 복잡한 소설적 환경에 처하게 된다. 심지어 빌리는 드레스덴 폭격의 불가피성을 합리화하려는 럼포드와 이야기를 할 때도 그에게 적극적으로 반대하지 않고, 그 불가피성 - 트랄파마도어적인 불가피성이지만 - 을 인정한다. 이 책에서 누군가가 죽을 때마다 등장하는 "뭐 그런 거지"라는 표현 - 총 106번 나온다고 한다 - 도 체념적 수동성을 드러내는 말로 들리기도 하여, 과연 이 책이 반전의 메시지를 던지기는 하는 것인지 다시 생각해보게 된다. (272)
애드거 더비의 처형이 이야기의 클라이맥스라고 한다면, 그리고 화자가 굳이 빌리를 이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내세웠다면, 빌리의 정신이 무너진 것은 무엇보다도 더비의 죽음 때문이라고 보아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따라서 <제5도살장>은 다른 무엇보다도 등장인물 가운데 가장 무력한, 가장 살아남을 가능성이 적었던 빌리가 결국 살아남아, 등장인물 가운데 가장 훌륭한, 가장 살아남을 가능성이 높았던 애드거 더비의 어처구니없는 죽음이라는 부조리와 아이러니 때문에 무너지는, 또 동시에 그 부조리를 견디고 받아들이는 - 트랄파마도어의 철학으로 -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274~275)
독서습관 989_제5도살장_커트 보니것_2017_문학동네(241224)
■ 저자: 커트 보니것 Kutt Vonnegut Jr.
1922년 미국 인디애나 주 인디애나폴리스에서 독일계 미국인 가정의 3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코넬 대학교에서 생화학을 공부했고, 재학 중 <코넬 데일리 선> 편집에 참여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전쟁에 나갔다가 독일군에게 포로로 잡혔고, 1945년 드레스덴 폭격을 겪었다. 전쟁이 끝난 후 시카고 대학교에서 인류학을 공부했다.
195년 <자동 피아노>를 출간하며 등단했고, <고양이 요람>이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주목을 받았다. 1969년 <제5도살장>을 출간하면서 미국 문학사에 한 획을 그은 반전작가로 발돋움했다. 이후로도 여러 편의 소설을 쓰고 영화 작업에도 참여했으며, 1997년 <타임퀘이크>를 마지막으로 소설가로서 은퇴를 선언했다.
2007년 맨해튼 자택 계단에서 굴러 떨어져 머리를 크게 다쳤고 몇 주 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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