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과는 어울리지 않는 <도덕적 혼란>이란 무거운 제목의 책이다. 넬이라는 동일한 여주인공이 등장하는 단편소설로 구성되었다. 단편들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넬의 어린 시절부터 부모님의 마지막을 함께 하는 과정까지 이어진다.
할로윈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명절이었다. 그날을 왜 그렇게 좋아했던가? 아마도 나 자신으로부터, 혹은 나 자신인 척하는 것으로부터 잠시 휴식을 취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나 자신인 척하는 것은 점점 더 편리하게 느껴지기도 했지만, 동시에 남들 앞에서 그러기가 점점 더 버겁게 느껴지기도 했다. (52)
이제 곧 나는 작년의 학생이 될 것이다. 나는 베시 양의 세계에서 떠나게 될 테고, 그녀는 나의 세계에서 떠날 것이다. 우리 둘은 모두 과거에 속하게 될 것이고, 우리 둘 모두, 나는 그녀의 관점에서, 그녀는 나의 관점에서, 완전히 지나가 버린 존재가 될 것이다. 현재의 내 책상에는 다른, 더 어린 학생이 앉아서, 내가 그랬듯이 지정된 텍스트 전체를 훑어보며 공부하도록 가차 없이 채근당하고 재촉당하고 떠밀려 갈 것이다. (140)
티그라는 유부남을 그의 부인인 오나를 통해 만나고 오나의 영향력 속에서 티그와 그의 두 아들과 살아가는 과정이 흥미롭다. 마치 오나의 호구처럼 생활하지만 결국은 오나는 비참하게 죽음을 맞이하고 주인공 넬은 티그와의 사이에 아이를 낳고 점차 생활이 나아진다. 우리의 현실에서는 보기 힘든 상황으로 캐나다에서는 가능한 것일까
아마도 그녀는 이 농장 생활을 통해 술수에 능해질 것이다. 아마도 어둠의 일부를 흡수하게 될 것이다. 어둠은 결코 어둠이 아니라 지식일 수도 있다. 그녀는 다른 이들이 조언을 구하러 오는 여성이 될 것이다. 사람들은 응급 상황에 처했을 때 그녀에게 연락할 것이다. (247)
사실 오나는 상태가 점점 악화되고 있다고 넬은 말했다. 처음 만났을 때 오나는 막강했다. 그녀는 매력적이었을 뿐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한 강한 의지와 강한 의견과 투지를 갖고 있었다. 적어도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내보인 모습은 그랬다. 그녀가 우울증에 빠지곤 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럴 때마다 침대 밖으로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오나의 그런 면을 볼 수 없었다. 그들은 그녀가 겉으로 내보이는 밝고 안정되고 다소 비웃는 듯한 얼굴만을 보았다. (301)
책의 제목과 같은 단편소설 <도덕적 혼란>에서는 티나와 넬이 시골에 집을 구하는 과정과 집에 새로운 가축들이 키우게 되는 사연이 담겨 있다. 계란이 부화하는 부분의 슬픔, 말을 만나서 애지중지 키웠지만 집을 나가 고속도로에서 자동차에 치여 죽는 슬픔, 어미에게 버려진 새끼양을 키웠지만 숫양이 되어 티나를 공격하기에 도살되어 먹을 수밖에 없는 슬픔, 소에게 이름을 붙였지만 도살되어 돌아오는 슬픔 등 동물을 만나고 키우고 헤어지는 여정을 담고 있다.
그들은 오나에게 잘해 주는 것이 넬이 해야 할 일이라고 말했을 것이다. 그런 식으로 볼 수도 있겠군 하고 넬은 생각했다. 다른 식으로 보자면, 넬은 모든 사람의 호구였다. (312)
건강했던 아버지와 어머니의 마지막 노년의 병든 모습은 고령화가 심화되는 우리의 현실에서 일어나고 있는 상황이라서 감정이입이 되었다. 특히 어머니가 넘어져서 뼈가 부러지는 상황은 최근에 3년 사이에 고모님 두 분이 길에서 넘어져 팔에 골절상을 입고 오랜 기간 고생하셨던 일과 겹쳐졌다.
아버지는 뇌졸중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이 뇌졸중을 앓는다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길을 잃을 줄은 몰랐다고 말하는 것이다. 우리는 뭘 해야 할지 알잖아요. 내가 말한다. 어쨌든, 우리는 괜찮을 거예요. (351)
어머니는 눈 주위에 한두 번 멍이 들었고, 결국은 갈비뼈가 부러졌다. 침대 옆 탁자 위로 넘어지고 나서, 침대로 다시 올라기기 위해 병 안에 든 딱정벌레처럼 아픔을 무릅쓰고 몸을 일으키려 애쓰다가 다시 넘어지면서 방바닥에서 오랜 시간을 보냈던 것 같았다. 그리고 낮동안 와 있도록 고용된 도우미에 의해 발견되었다. (357)
노화가 진행되며 균형감각이 사라지고, 시력과 같은 기본 신체 기능이 쇠퇴한다. 치매와 뇌졸중과 같은 질병이 찾아온다. 하지만 과거의 추억은 사진으로 이야기로 깊은 기억 속에서 자리 잡고 있다. 주인공 넬은 아버지의 병석에서, 어머니의 병석에서 부모님의 추억을 소환한다. 우리 모두는 자신만의 추억을 간직하고 있다. 매 순간이 추억의 과정이다. 글이나 사진으로 남기지 않았을 때 기억은 점차 휘발되어 사라진다. 부모님들의 희미해진 추억을 기록하고 정리해서 사진과 함께 자서전으로 만드는 것도 큰 의미가 있겠다.
어머니의 귀에 대고 말하는 것은 어둠을 지나 내가 상상도 할 수 없는 곳으로 연결되는 길고 좁은 터널의 끝에 대고 말을 하는 것과 비슷하다. 어머니는 그곳에서 하루 종일 무엇을 하는가? 하루 종일, 그리고 밤새,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일까? 어머니는 지루할까, 슬플까, 정말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일까? 그녀의 귀는 파묻힌 활동의 전체 세계에 이르는 유일한 연결 고리다. (359)
그녀가 가벼운 발걸음으로 자신만의 시간을 관통해 갔음에 대한 증거, 또는 자신을 찾기 위해 오솔길을 따라오는 누군가를 위해 여기저기 흩뿌려 놓은 몇 개의 단서들. (367)
그녀는 베개 위 머리를 돌려 좋은 귀를 닫아 버린다. 눈을 감는다. 이것으로 대화는 끝이다. 그녀는 저 안쪽에 있다. 아주 멀리, 전설의 시간 속에. 그녀는 무엇을 하고 있을까? 어디에 있는 걸까? 말을 타고 나무 사이를 질주하고 있을까? 폭풍과 맞서고 있을까? 원래 자신의 모습으로 되돌아갔을까? (384)
책에서 아쉬운 점은 오타가 많이 발견된다는 점이다. 그리고 조금 더 번역이 매끄러웠다면 읽기에 조금은 더 쉬웠을 것 같다. 다음은 책에서 남기도 싶은 문장을 인용했다.
독서습관 836_도덕적 혼란 Moral Disorder_마거릿 애트우드_2020_민음사(240205)
■ 저자: 마거릿 애트우드
1939년 11월 캐나다 오타와에서 내어나 온타리오와 퀘백에서 자랐다. 애트우드의 가족은 곤충학자인 아버지를 따라 매년 봄이면 북쪽 황야로 갔다가 가을에는 다시 도시로 돌아오곤 했다. 이런 생활 속에서 어울릴 친구가 별로 없었던 애트우드에게는 독서가 유일한 놀이였다. 고등학교 진학 후 시인이 되기로 결심하고 토론토 대학교와 하버드 대학교에서 영문학을 공부했다. 스물한 살에 첫 시집 <서클 게임>을 출간했으며, 이 시집으로 캐나다 총리 상을 수상했다. 이후 장편 소설 <떠오름>으로 시인이자 소설가로서 본격적으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대표작으로 <시녀 이야기>(1985), <고양이 눈>(1988), <도둑 신부>(1993), <그레이스>(1996), <오릭스와 크레이크>(2003), <홍수의 해>(2009), <미친 아담>(2013) 등이 있으며, 2000년 발표한 <눈먼 암살자>로 부커 상을 수상했다. 권위적이고 지배적인 남성 중심 사회를 비판하는 작품들을 통해 페미니즘 작가로도 평가받는 동시에, 외교 관계, 환경 문제, 인권 문제, 현대 예술, 과학 기술 등 다양한 주제를 폭넓게 다루고 있다.
브리티시컬럼비아 대학교, 토론토 요크 대학교, 뉴욕 대학교 등에서 영문학 교수를 역임했고, 현재 국제사면위원회, 캐나다 작가협회, 민권운동연합회 등에서 활동 중이다. 토론토 예술사, 아서 클라크 상, 미국 PEN 협회 평생 공로상, 독일도서전 평화상, 프란츠 카프카 상 등을 수상했다. 2019년 <시녀 이야기>의 후속작 <증언들>로 두 번째 부커 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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