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김형경의 삶을 온전히 반영한 자전적 소설 <세월>을 읽었다. 총 3권으로 이뤄졌다. 교사인 아버지와 어머니를 두고 행복한 가정에서 자랄 수 있었지만 부모는 이혼하지 않고 별거한다. 아버지는 새로운 젊은 여자와 강원도에서 어머니는 경상도에서 교사생활은 한다. 저자는 아버지와 강릉에서 성장하지만 점차 아버지와 멀어지며 고단한 삶을 살게 된다.
낭만적인 아버지의 피와 이상적인 원칙주의자인 어머니의 피가 그녀의 삶에 큰 영향을 준다. 특히 어머니로부터 받은 성에 대한 선입견은 그녀가 7년 동안 사랑하지 않는 한 남자에게 얽매이게 만드는 원인이 된다. 그 과정에서 저자인 '그 여자'가 보이는 남자에 대한 태도는 독자로서 무척이나 답답했다. 아주 먼 조선 시대도 아니고 1980년 전후에 여전히 그런 고지식함이라니.
이 소설의 가장 큰 특징은 저자의 삶을 온전히 담고 있고, 주인공을 '그 여자'라고 부르는 점이다. 평범하지 않은 가난과의 싸움, 한 남자로부터 자유롭지 않은 동거 경험, 문학에 대한 열정을 펼쳐가는 좌충우돌 속의 결정들이 소설을 풍성하게 만들어 준다. 자신의 인생이기에 소설 중에 실명이 거론되기도 한다.
한 여인이 앞이 보이지 않는 암담한 현실 속을 더듬거리며 지나다가 결국에는 자의식과 자신을 에워싸고 있던 선입견을 벗어버리며 성숙한 인격체로 성장한다. 그 여자는 자신을 키운 것이 '세월'이라며 마무리한다.
한 사람의 삶을 통해 우리의 삶을 들여다본다. 아무리 많은 책을 읽어도 사람과 사람이 부딪히며 얻는 것을 모두 알 수 없다. 그래서 저자는 자신을 책에 속았다고 고백한다. 이 소설에서 주인공은 시간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아래는 1권에서 남기고 싶은 문장을 인용했다. 2권으로 이어진다.
슬픔이나 기쁨, 그런 정서는 하나의 사건이나 하나의 대상에서 유발되는 게 아니다. 눈앞의 낙엽과 아주 오래된 기억이 만나, 발부리에 걸린 돌멩이가 잊은 줄 알았던 기억과 만나, 기쁨이 되거나 슬픔이 된다. 기쁨이나 슬픔, 그리고 공포 같은 것들은 감정의 직조 속에 아주 복잡하게 얽혀 있어, 여자는 나중까지도 그것들의 느닷없는 휘둘림에 당황한다. (32)
(...) 살짝 데친 파로 양송이를 꼭꼭 싸는 파양송이 강회가 있다. 파양송이 강회에 곁들여지는 초고추장을 잘 만들어야 한다. (34~35)
동물원을 생각할 때면, 인간의 잔인함에 대한 전시장 같다는 생각이 든다. 누가 인간에게 그런 권리를 주었는가. 아직도 동물원이라는 제도가 옳은 건지 알 수 없다. (43)
금세기의 위대한 실존주의 작가 사르트르가 일찍이 <구토>라는 작품을 쓴 이후, 많은 사람들이 그 말을 사용해왔다. 그들은 '구토'를, 이 불합리한 세상에 대한 자신의 존재 증거로 삼는다. 이 세상의 불합리함과 비인간화에 대해 구역질을 하고, 구토할 수 있는 자만이 이 세상의 탁하고 어두운 흐름 속에서 깨어 있을 수 있다고 말한다. 그렇게 말하는 자들 중에 정말 구토의 고통에 대해 아는 자가 있을까. (53)
어린이 잡지에서 일하는 동안, 다섯 명쯤 되는 소년 가장 어린이를 취재한다. (...) 그때마다 무책임한 어른들에 대한 분노로, 세상에 대한 신뢰를 잃는 절망으로, 아이의 불행을 이용하고 있다는 자책으로, 어린 시절의 제 모습을 보는 고통으로, 돌아서면 늘 눈물을 흘리곤 한다. 서른 살이나 된 여자가, 그러나 그 일에는 결코 내성이 생기지 않는다. (97)
사진은 순간을 영원으로 고착시키는 기능을 한다. 예전의 사진을 들여다볼 때, 거기서 보는 것은 어떤 사람의 모습이나 그 사진을 찍은 배경이 아니다. 사진 속에서 입고 있는 털스웨터에 있던 보풀들, 사진 속에서 끼고 있는 시계를 선물한 사람의 미소, 국화들을 한반도 모양으로, 도자기 모양으로 공들여 가꾼 사람의 자상한 손길, 그 사진을 찍어준 사람의 하나, 둘, 셋, 하던 목소리, 사진 속에서 보는 것은 그런 것들이다. (123)
그 여학생은 다시 하숙을 하게 된다. 아버지와 동생은 임계로 가고, 강릉에는 그 여학생만 남겨진다. 시내에는 할아버지가 있지만 그 집에는 여학생이 묵을 만한 방이 없다. (135)
동생을 생각하면 자주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그때 그 집에 살지 않았어야 했다고. 동생은 계속 그 여학생과 함께 하숙을 하는 게 더 나았을 거라고. 동생은 너무 어린 나이에 너무 큰 상실을 알아버렸다고. (152)
그 여자는 한 학년이 끝나고 통지표를 작성할 때 유난히 시간을 많이 잡아먹는다. 다른 선생님들은 하루 만에 끝내는 일을 그 여자는 이틀하고도 한 나절을 더 걸려서 한다. 세심하게 말을 고르고, 혹시라도 아이의 마음에 흠집을 남기는 표현이 있을까봐 조심한다. 그 시기의 아이들에게는 조심해야 한다. 사소한 말이 인생을 전부 바꾸어버릴 수도 있는 법이다. (158~159)
그 여자는 이제 안다. 선생님의 말씀이 옳았다는 것을. 그 여자가 지금도 일관되게 나이든 사람들을 존중하는 이유는 그것이다. 어느 만큼 살기 전에는, 어느 나이가 되기 전에는, 아무리 노력해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있는 법이다. 그 여자는 그 후로도 이따금 선생님의 눈물을 생각한다. (...) 아마, 당신의 힘으로는 어떻게 녹여볼 수 없을 정도로 굳어버린 여학생의 마음을 읽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221)
그러다가 그 여자는 그 시절의 무용선생님처럼 울음 기운을 느끼고 만다. 그때야 무용선생님의 붉어지던 눈빛을 완전히 이해한다. 아니, 공감한다. 그건 아이에 대한 섣부른 동정이나, 그때까지도 극복하지 못한 자기연민 때문이 아니다. 그건, 노여움 때문이다. 아직도, 아직도 세상에는 제 잘못이 아닌 일로 고통받는 아이들이 있구나, 그 아이들이 느끼는 캄캄한 절망과 어두운 반항을, 진심으로 이해하고 감싸안는 사람은 참으로 적구나, 그런 노여움 때문이다. (223)
얄팍한 자존심이나 치졸한 열등감 따위, 아니, 인간의 마음에 깃들어 있는 이런저런 감정들 따위, 그것들 때문에 그렇게 숨이 넘어갈 지경이라는 것을. 고통이라고, 좌절이라고, 절망이라고 느끼는 것들이 사실은 자의식에 투영된 어떤 감정들이라는 것을. 그것을 깨닫고 나서 자의식을 버리려 노력할 때까지, 그 여자는 아직도 많은 시간을 힘들게 보내야 한다. (231)
세월이 많이 흘렀다. 가장 큰 약은 시간이라고, 나이든 사람들이 그런 말을 할 때는 그걸 비겁함이라고 받아들였다. 그러나 이제는 이해한다. 가장 좋은 약은 시간이라는 것을. (268)
그러나 이제, 그 여자는 두 피를 내부에서 조화롭게 섞을 줄 알게 되었다. 아버지의 피는 그 여자에게 낭만적인 기질을 가져다주고, 어머니의 피는 절망 속에서 몸을 추스르는 힘을 준다. 아버지의 피는 일상을 가꾸는 일을 하고 어머니의 피는 이상을 간직하는 일을 한다. 두 피는, 그 여자의 삶에 적당한 균형감각을 가져다준다. (325)
사람들 사이에 오가는 농담에는, 새로운 논리의 세계가 열리는 충격도, 우리의 일상에 얼마나 논리가 결여되어 있는가에 대한 통찰도 없다. 그저, 맥빠진 웃음만 있을 뿐이다. 같은 이야기도, 언제 어디서 누구로부터 듣느냐에 따라 그토록 달라진다. (334)
그때는 1978년이다. 그 다음해 기어이 무너지고야 마는 바로 그 정권이, 20년 가까이 억압해온 모든 것들이 세상 곳곳에 누적되어 있던 때다. 누적된 억압이 정교하고도 치밀해서, 어디에서도 작은 반발이 용납되지 않던 때, 그래도 1975년까지는 시위도 있고 그 끝에 구속되는 학생들도 있었다고 들었다. 그러나 1978년, 세상은 재갈을 물린 듯 조용하다. 강요된 침묵. (338~339)
문학평론은 허공을 떠도는 문학 작품에 근사한 옷을 입혀, 어딘가에 자리잡을 수 있도록 위치를 설정해준다. 그저 줄거리만 따라읽던 소설 읽기에서 벗어나 작품 속에 깃들어 있는 다른 요소들을 읽게 된 것. 그것은 평론서들을 읽은 영향이다. (341~342)
https://bandiburi-life.tistory.com/2210
독서습관837_세월 1권_김형경_2008_푸른숲(240216)
■ 저자: 김형경
1960년 강릉에서 출생, 경희대학교 국문과를 졸업했다.
1983년 <문예중앙> 시 부문 신인상을 받으며 등단하였고, 1985년에는 <문학사상>에 중편소설 <죽음잔치>가 당선되어 소설가의 길로 들어섰다.
장편소설 <새들은 제 이름을 부르며 운다>(전2권)로 제1회 국민일보 문학상을 수상했다. 장편소설 <사랑을 선택하는 특별한 기준>(전2권), <피리새는 피리가 없다>(전2권), <성에>, <외출>, 소설집 <단종은 키가 작다>, <담배 피우는 여자>, 시집 <모든 절망은 다르다>와 산문집 <사람 풍경> 등을 펴냈다.
'독서습관' 카테고리의 다른 글
[839]세월③_그 여자를 키운 것은 세월 (0) | 2024.02.17 |
---|---|
[838]세월②_굴종과 가난 속에 위로가 필요했던 대학시절 (0) | 2024.02.17 |
[836]도덕적 혼란_주인공 넬을 통해 인생의 의미와 노년의 삶을 성찰하는 단편소설집 (1) | 2024.02.12 |
[837]미래출현_기후위기 고령화 첨단기술이 바꿔놓을 우리의 미래 (0) | 2024.02.05 |
[835]아홉살 인생_어린이의 경험으로 얻는 삶의 지혜 (0) | 2024.02.03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