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 권력에 의해 진실이 가려진 시대를 살았던 수많은 청년들에게 세상을 보는 눈을 뜨게 해 준 책이 있다. 故리영희 교수의 <전환시대의 논리>이다.
독서습관을 위해 다양한 분야의 책을 읽고 있는데 여러 책에서 저자에게 인생의 변곡점을 만들어준 책으로 <전환시대의 논리>를 꼽았다. 이 책은 1974년에 초판이 발행되었지만 50년 가까이 지난 현재도 커다란 감흥을 준다.
박정희 군사정권 시기, 대부분의 국민이 생계를 위해 열악한 노동현장에서 분투할 때, 열강들의 움직임 속에서 국가의 지향점을 제시하는 지성이 드물었다. 진실을 있는 그대로 듣기를 거부하는 벌거숭이 임금님의 권좌 아래서 권력자의 눈치를 보며 살던 시대였다.
그런 시대 상황 하에서 리영희 교수의 이 책이 당시의 지성인들에게 주는 울림은 컸다. 고등학교까지 가르쳐주지 않았고, 대학에서도 알려주지 못하는 베트남 전쟁의 실상, 중국의 현황 등 냉철한 역사인식과 비판을 리영희 교수는 깊이 있게 전달하고 있다.
수많은 사람들의 세계관을 뒤엎은 책이라고는 하지만 2023년 현재는 맞지 않는 내용이 대부분일 것이라 속단하며 읽기를 미루고 있었다. 하지만 매 페이지를 넘기며 역사적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는 진실을 보게 된다. 그래서 이 책을 통해 근현대사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을 얻을 수 있다.
단편적으로 언론에서 언급하거나, 일부 책에서 인용된 것보다 깊이 있는 해석을 볼 수 있다. 이를 바탕으로 우리나라의 현 위치를 다시 보게 한다. 이미 1970년에 리영희 교수는 미국과 일본의 역학관계를 언급했다. 일본을 통해 동북아시아를 지배하고자 하는 미국의 의도는 한미일 삼국의 협력을 강조하는 지금도 동일하게 비친다.
일본과의 과거사를 잊지 않고 반복되지 않도록 위정자들은 깨어 있어야 하며 주변국과의 외교에서 견제와 균형 속에 실리를 얻으려 노력해야 한다. 지금 우리의 외교력이나 경제력이 후퇴하고 있는 듯해서 우려된다.
많은 국민들이 리영희 교수의 <전환시대의 논리>를 읽고 지금 한반도를 둘러싼 역학관계를 이해하면 좋겠다. 미국, 일본, 중국, 러시아 등 열강들의 동향이 과거를 반복할 수 있다는 가능성이 주의해야겠다. 필요할 때는 한마음이 되어 우리의 주권과 국익을 함께 추구해야 한다.
아래는 책에서 인용하고 싶은 내용이다. 남기고 싶은 문장이 많아 두 번에 걸쳐 포스팅한다.
정부가 민주적인 한 원칙적으로 지성인과 관료 사이에 모순이나 대립개념은 서지 않겠다. 그러나 형식에 있어서는 어떻든 본질적으로 비민주적이고 소수이익의 위탁자 역할을 하거나 부패한 정권을 돕는 지식인은 반지성적이고 따라서 반국민(민중)적일 수밖에 없다. (23~24)
진실은 비판을 낳는다. 어떤 사회도 어떤 정부도 비판의 여지없이 최선이거나 만능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럴수록 민주제도는 진실-비판-개선의 끊임없는 과정을 걸어갈 수 있다. 진실이 알려지는 것을 두려워하는 사회체제나 정부는 반드시 비판에 견딜 수 없는 체제와 정부이다. 그러기에 비판을 봉쇄한다. 비판이 허용되지 않는 사회는 개선과 향상이 없고 그 결과는 더한층의 타락이며, 타락한 제도를 유지하려는 지배세력은 탄압에 호소하는 악순화 속에 침체할 수밖에 없다. (27~28)
건전한 비판이 사라지고 정치의 양극화가 심각한 우리 사회가 생각나는 문장이다. 진실을 보려 하고 상대방의 말에 귀를 기울이며 큰 지향점을 향해 함께 나아가야 한다. 비판이 서로 허용되지 않고 말도 안 되는 견강부회식 비난이 난무한다. 개인의 사욕이 공익을 앞서기 때문이다. 언제부터인가 공동체에 대한 언급이 사라지고 돈과 권력만 회자된다. 누군가는 그 가운데 웃고 있겠지.
집권세력과 어떤 권력집단, 예로 군부 같은 것이 국민을 구렁텅이로 끌고 가는 수법이 이 현실주의이다. 오늘의 현실을 수정하지 않으면 내일의 현실이 우리를 구속할 것이라는 지성인들의 사관만이 이런 불행을 예방할 수 있다. (34)
<뉴욕타임스>라는 언론기관과 다니엘 엘즈버그라는 진정한 지성인이 있음으로 해서 미국의 지성적 풍조는 이제 큰 전환을 이룰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한 소년이 왕의 알몸을 폭로할 때까지 오랫동안 온 지식인과 백성들이 입을 열지 못하고, 사회는 공포와 타락과 암흑 속에 침체해야 했던 그 엄청난 인간적 사회적 소모가 있었다는 사실을 거듭 중요시해야 할 것이다. (36~37)
이런 사고방식으로 굳어져버린 사람이나 세력은 세계와 국내의 모든 '사실이 사실대로' 보도 전달되기를 바라지 않는다. 이런 진실 또는 진리에 반대하는 힘 또는 세력은 대중이 진리를 배우도록 훈련 교육하기를 거부한다. 그들이 가르치는 대로 믿을 것을 강요하고 가르치는 것은 흑백뿐이다. (42)
이 정책은 50년 1월 당시의 애치슨 국무장관이 극동에서의 미국방위선은 북은 알류샨 군도에서 일본을 거쳐 필리핀을 연결하는 것으로 남한과 대만은 이 선에서 제외된다고 되풀이 공개적으로 강조한 것으로 한국과도 관계된다. 이것이 소위 애치슨 라인이라는 이름으로 불린 미국의 극동방위 범위였다. 미국은 초기에는 중공정권과의 공존을 불가피한 것으로 보았고, 또 그것을 가능케 하기 위해 트루먼정권이 분명한 정책을 수립한 것은 틀림없다. (59)
그것은 핵무기로 대표되는 현대 전쟁과학의 발전으로 전략구조의 수정 및 재편성을 통해서 미국의 지배권을 확보하고 미국이 직접 담당해 온 간섭기능은 써브시스템(초강대국 지배질서구조 속의 중급국가체제)에게 대행시키려는 정책이다. 이것은 닉슨 독트린이 한 예로 한국에 대한 미국의 책임을 일본에 이양 분담케 하는 최근의 조치에서 단적으로 표시된다. (63~64)
현재 우리나라가 가고자 하는 한미일 협력 체제가 결국은 미국이 구상하고 일본이 주역할을 하는 판에 호구 역할을 하는 건 아닌지 무척 걱정된다. 미국과 일본의 의도를 우리가 충분히 일고 활용해야 한다. 하지만 과도한 쏠림이 시작되었다.
닉슨 대통령은 70년대를 대중공관계를 정상화하는 시기로 잡고 있다. 한국에서의 미군 감축 또는 철수 계획은 궁극적으로는 중공과의 관계를 재조정하려는 대아시아정책 수정의 일부이다. (69)
미국은 대만의 장개석 정부가 주장하는 전중국의 합법적 정부라는 자격과 중국본토 수복계획을 사실상 비현실적인 것으로 간주한 지 이미 오래다. 1970년 2월 닉슨 독트린 발표 이후 처음으로 대만을 방문한 에그뉴 부통령은 미화상호방위조약의 의무는 지키겠지만 본토 수복정책은 지지하지 않는다는 미국정부의 의사를 장개석 총통에게 전달한 것으로 보도되었다. (70)
일본의 재군비와 일본으로 하여금 극동지역 특히 한반도에서 미국 역할을 대행케 하기로 한 닉슨 독트린의 실천, 그리고 캄보디아와 라오스에의 확전은 중공으로 하여금 미국의 진의를 의심케 만든 것 같다. (71)
이 지역 국가의 독자적인 이해나 의지는, 전후 어느 시기에도 그런 때가 없었지만 70년대에는 특히 문제해결의 '정수(定數)'가 아니라 '함수', 그것도 미 소 중 일 4 대국 이해관계를 1차 함수로 하는 2차 함수적 위치를 차지하게 될지 모른다는 국제정세의 변화를 주시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 <정책연구> 1971년 1월호 (84)
저자의 세계를 보는 통찰을 엿볼 수 있는 문장이다. 지금 우리에게 제2, 제3의 리영희가 있는가 의문이다.
생산이 우선하느냐 인간혁명이 우선하느냐의 양자택일적 문제에서 유소기(劉少奇)는 스딸린에 따라 전자를, 모택동은 후자를 택함으로써 급기야는 유-모의 권력투쟁으로 문화대혁명은 확대된 것이다. (98)
맨발 의사는 그의 공사에 사는 모든 대중에게 가능하면 자기 수준의 의료 보건 지식을 교육하고 대중화해야 할 의무도 지닌다. 의학 지식과 기술도 누구의 독점물이나 이윤추구의 도구가 될 수 없으며 대중의 것이어야 한다는 사상이다. (107)
모택동이 주장했다는 의료에 대한 철학이 마음에 든다. 돈을 추구하며 공부하고 돈을 바라며 고통을 참는다는 적지 않은 헛똑똑이 의사들이 늘어나는 대한민국이다. 우리 현실에서 민중을 위해 사용되는 의술은 요원한 것일까.
지방에서나 가난한 자들에게 가까이 가기 어려운 의료 시스템이다. 서울 한복판에서 어린 응급환자가 받아주는 병원이 없어 사망해야 하는 원시적인 상황이다. 인구감소 시대에 왜 정부는 근시안적인 대책을 벗어나 큰 틀의 대책을 만들지 못하는지 안타깝다.
1960년 소련과의 이념대립이 격화됐을 때 흐루시초프가 중공과의 협업에 의해서 중공에 파견했던 343건의 대규모 공장 및 건설공사의 일체의 청사진과 물자 및 기계를 깡그리 철수시키고, 1390명의 과학자 기술자들을 예고도 없이 소환해 버린 보복행위를 통해 중공은 외국에 의존할 수 없다는 것을 뼈저리게 자각했다. (113)
세인트헬레나와 대만이라는 섬은 '민중의 등에 업힌' 영웅이 '민중의 등에서 굴러 떨어진' 영웅으로 묻히는 무덤이라는 상징으로 비친다. 그리고 한 사람의 황제와 총통이 권력의 성쇠사를 엮는 사이에도 '민중'은 변하지 않고 그 땅 위에서 몇십 명의 영웅을 등위에 올려놓기도 하고 흔들어 떨어버리기도 하는 길고 긴 '민중의 역사'를 엮어나간다. (118)
그의 운명을 결정한 내부적 사태는 1927년 공산당과의 제1차 합작을 쿠데타로 깨어버린 것으로 나타났다. 장개석은 상해에 입성하자마자 북벌군의 무혈입성을 가능케 했던 공산당에 의한 상해지역 노동자의 대대적인 파업의 공을 치하하는 방법으로, 유소기 주은래 등에 의해 조직된 파업주동자의 대대적인 체포와 살해로 응수했다. (122)
중국 정부가 가장 믿고 있던 미국은 이미 1919년 11월 2일의 '랜씽-이시이 협정'으로 "미국과 일본 양정부는 지리적 근접성이 국가 관계에 있어 특별한 관계를 조성한다는 사실을 인정하며, 따라서 미국 정부는 중국에 있어 특히 일본의 이권이 접촉하는 부분의 중국영토에 대해서 일본이 특수권리를 갖는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라고 합의한 터였다. (...) 그것은 우리나라에 적용할 때 일본의 조선 식민지화를 미국이 양해한 것이나 다름없는 '카쯔라 - 태프트 협정'을 상기케 한다. (124)
이 백서는 장개석과 국민당정권이 본토에서 쫓겨나 대만으로 낙향한 후 어째서 한때는 중국국민의 열광적 지지를 받았던 장총통과 그의 정권이 패망하게 되었는가를 1844년의 중국정세부터 거슬러 올라가 분석하면서 1949년까지의 100년을 검토한 1054페이지의 방대한 공식문서집이다. (135~136)
https://bandiburi-life.tistory.com/1925
독서습관 733_전환시대의 논리_리영희_2010_창비(230523)
■ 저자: 리영희
1929년 평안북도 운산군 북진면에서 태어났고, 1950년 한국해양대를 졸업했다. 합동통신 외신부 기자, 조선일보 합동통신 외신부장을 역임했고, 미국 노스웨스턴대 신문대학원에서 연수했다. 1976년 한양대 문리과대학 교수로 재직 중 박정희정권에 의해 해직되었다가 1980년 복직되었고, 같은 해 전두환정권에 의해 다시 해직되었다가 1984년 복직되었다. 1987년 미국 버클리대에 부교수로 초청되어 강의하였으며 1995년 한양대 교수직에서 정년퇴임 후 1999년까지 같은 대학 언론정보대학원 대우교수를 역임했다. 저서로 <전환시대의 논리> <우상과 이성> <분단을 넘어서> <80년대 국제정세와 한반도> <베트남전쟁> <역설의 변증> <역정> <자유인> <인간만사 새옹지마>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 <스핑크스의 코> <반세기의 신화> <대화> <분단민족의 고뇌> <조선반도의 신 밀레니엄>가, 편역서로 <8억 인과의 대화> <중국백서> <10억의 나라>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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